<-- 2부 -->
위글로우, 이제는 코누다이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 땅은 모든 이들에게 영 낯설었다. 위글로우의 시민들은 코누다이안의, 막시밀리언 코누디스의 영지민이 되었으나 그 사실을 체감하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각이 없겠지.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 제국이니 베이고르니 하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아.”
“그렇겠지요. 나라가 바뀌어도 관리들은 여전히 그들의 위에서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갈 뿐이니.”
“그건 너무 적나라한 말 아닌가?”
“영주님께서는 웃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야 괜찮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는 그런 말은 되도록 삼가게 군터 경.”
“그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기분은 어떤가? 존귀한 신분으로의 첫날이 아닌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영지민이 된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베이고르의 문화는 제국과는 다르다. 물론 이제와 백 년도 더 전에 멸망한 나라의 법을 그대로 가져다 쓸 만큼 베이고르 왕과 귀족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기존의 제국법에다 몇 가지를 추가하고 수정하는 식으로 법도를 정비했다. 그렇게 하여 생긴 특이한 신분 중 하나가 바로 기사였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평민도 아닌 어중간한 신분. 귀족은 아니지만 그에 준한다 하여 ‘준귀족’이라 칭하기도 하는 계급.
군터는 바로 그 기사가 되었다. 막시밀리언은 그가 ‘남작’으로서 가진 권한으로 군터를 기사에 임명했다. 그 외에도 미트라스와 위벨이 기사로 임명 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그에게 할당된 기사 서임의 권한을 모두 사용한 것이었다.
“경이라는 호칭이 아직은 어색하겠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걸세. 어쨌거나 자네도 이제 자네의 땅과 백성을 가지게 되지 않았는가.”
“예. 아직도 그것이 영 어색합니다.”
영주에게 영지가 있듯, 기사에게는 장원(莊園)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마을과 다른 것은 장원에 속한 땅과 백성들이 모두 장원을 소유한 기사에게 예속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출에 따른 세금은 장원을 소유한 기사, 즉 장주(莊主)에게 돌아간다. 그것이 장주가 영주로부터 하사받는 녹봉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본래 베이고르의 법은 이렇게 느슨하지 않았다고 하네. 영지민은 영주의 소유이고, 장원민은 장주의 소유였다고 하지. 그들의 삶 자체가 살아가는 그 땅에 묶였던 것이야.”
“노예와 다를 바 없군요.”
영주, 장주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사는 곳을 벗어날 수도 없다. 제국도 거주지에서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관에 신고를 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제국의 신분제는 모든 것이 황제의 밑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고귀한 혈통이라는 귀족이 있지만 그들의 신분 그자체가 평민을 지배할 권리가 되지는 못했다. 실제와는 다르다고 해도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반면 베이고르의 법은 보다 귀족의 권한이 크다. 귀족 친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제국이 황제의 나라라면 베이고르는 귀족의 나라다.
군터는 이제는 둘로 나뉜 바크렌의 백성들이 과연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에 대해 막시밀리언에게 넌지시 의구심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만 막시밀리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백성들은 지배당하는 것에 익숙하네. 그게 관리든, 귀족이든 상관없지.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이야.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백성들이라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물론 당분간은 어수선할 수도 있어. 허나 그렇다 해도 오래 가지는 않을 걸세. 언제나 그랬듯, 백성들은 그들의 삶에 순응하게 되겠지.”
*
영주가 된 막시밀리언은 그의 영지를 관리하는 데 전념했다. 기존에 다스리던 위글로우야 특별히 신경 쓸 만한 것이 적다고 해도 새롭게 다스리게 된 땅과 개척촌 문제는 아직도 살펴야 할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 바쁜 일에 군터가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칼이나 휘두를 줄 아는 무부가 복잡한 영지 운영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도적들이라도 출몰한다면 힘쓰는 일이라도 하련만, 그런 작업은 이미 진즉에 끝내 놓았다.
그나마 군사에 관련한 일은 아직 할 만한 것들이 있다. 병력 충원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신병이 넘쳐나는 상황.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군터가 더 이상 그런 잡다한 일을 맡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네는 이제 일개 무관이 아니야. 이 영지에 있는 세 명 뿐인 기사 중 하나라는 말이지. 자네도 이제는 좀 더 격이 있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신병 훈련 임무도 그의 손을 떠났다. 군터는 살라스에게 병력 충원 및 훈련 임무를 일임하고 그의 장원을 보러 갔다.
그의 장원은 체루지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이제는 이름 없이 그저 ‘군터 경의 장원’이 된 그곳은 가호가 여든 하고 넷에 인구는 삼백이 조금 넘는, 한 마을로서 적당한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농지에서 밀을 수확하고 얼마간 걸어가면 나오는 야트막한 야산에서 나무를 해다 생활하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마을.
그들은 백인대 하나를 끌고 온 군터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 이 마을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 그의 말에도 어째서 우리 마을이 당신의 것이냐 용감히 따지는 이 하나가 없었다.
‘탐관이라도 된 기분이군.’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자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터라는 이름은 위글로우에서 나름대로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사령관인 막시밀리언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데다 남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이들 때문에 과장된 무용담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기도 했었다. 아마 이들도 그 소문을 들었으리라. 이곳은 위글로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 말이다.
“겁먹지 마라. 나는 너희를 해치지 않는다.”
“예, 옛!”
그 말 한 마디가 그들의 시름을 한 결 던 듯했다. 촌장이라는 노인의 창백해졌던 얼굴이 어느 정도는 안정을 찾았다.
“너희는 그 전에도 징세관(徵稅官)에게 세금을 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예, 예. 그랬습죠.”
“이제 그 세금을 징세관 대신 내게 내면 된다.”
“아아…….”
“그러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계속해서 이곳에서 살아가면 되고, 나는 내게 세금을 바치는 너희를 지키고 다스릴 것이다.”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이 진실해 보였을까, 그게 아니면 그저 ‘지킨다’는 말에 마음이 쏠린 것일까. 촌장을 비롯해 그 뒤편에서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군터는 그들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무사히 납득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저…나리.”
“장주님이라 부르시오.”
뒤편에서 할렌이 호칭을 정정시켰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풀려가던 분위기가 도로 딱딱해졌지만 군터는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아, 예. 장주님. 그럼, 세는 얼마나 내야 할지…….”
“그 전까지는 얼마나 냈지?”
“5할이었습니다.”
“…….”
5할이라. 군터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몰골은 그렇게 궁해 보이지는 않았다. 5할의 세율은 그들에게 있어 가혹한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적어도 먹고 살만은 한 정도였을 것이다.
“4할로 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 몇 가구가 새로 들어올 것이다. 그들과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해라. 알겠나?”
“물론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새로 들어올 가구란 군터 천인대 소속 병사들 중 가정을 꾸린 이들을 말함이었다. 그들은 이제 군터의 장원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일개 병사들이 위글로우에서 집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군터는 그의 장원에서 그의 병사들이 살 수 있도록 했다. 위글로우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럴듯한 집을 가지게 해주고, 세금도 일반 마을 주민들보다 반 정도 더 적게 받기로 했다.
“모든 병사들이 대장님의 은혜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
군터가 이런 계획을 처음 밝혔을 때 살라스를 비롯한 휘하 모든 백인장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기뻐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병사들이 장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켜할까 하는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산다는 건 아무래도 도시에서 살던 것과는 다를 테니까.”
“괜한 우려십니다. 어차피 도시의 삶이라고 해봐야 재물이 풍족하게 있는 자들이나 즐거운 것이지, 벌이가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도시나 시골 마을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게다가 대장님의 장원과 위글로우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오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살라스와 몇몇 백인장들의 말처럼 병사들은 원하는 자에 한해 그의 장원에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이야기에 크게 기뻐했다. 가정을 꾸린 자들은 대부분 옮겨가기로 했는데, 그 수가 서른 명에 달했다.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헤아리면 상당한 수였다. 지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촌장은 머지않아 당도할 인원을 보면 당황하게 되리라.
“생각보다 괜찮은 곳 같습니다.”
“그래.”
그의 장원이 된 마을은 그야말로 평범한 마을 그 자체였다. 특별히 눈여겨볼 부분도 없고 부족한 부분도 없다.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가느다란 개천이 있어 어지간하면 물 걱정은 없어 보이는 것이 그나마 장점이라면 장점으로 보였다.
이 마을은 이제껏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군터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말먹이로 쓸 만한 풀이 있는 초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곳에다 울타리를 세우고 번갈아 사람을 세우면 못해도 수십 마리는 키울 수 있겠더군요.”
“나도 그리 보았다.”
군터는 그의 장원에서 말을 기르고자 했다. 이는 마을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보다 순수한 욕심의 발로였다. 초원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던 시절부터 말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초원에서 가장 큰 재산이라 한다면 단연 말이었고, 말을 여러 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부유하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그는 여러 필의 말을 한꺼번에 끌고 가는 전사들을 동경어린 눈으로 보곤 했었다.
“마을의 경계를 조금 더 넓히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겠느냐. 조금 전 보았던 바위를 기점으로 크게 잡는다면 백 필이 넘는 말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백 필이라. 관리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는 초원에서처럼 풀어서 기를 수도, 마음껏 옮겨 다닐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이 주제에 관해서는 그와 같은 아쿼러즈인 할렌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군터는 할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장원 근처를 크게 몇 바퀴씩 돌아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