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피에트르에서 승전보가!”
“미시즈에서 민병이 궐기하여 사령관의 목을 쳤다 합니다!”
“타리넨에서…….”
“파밀리에에서…….”
하루걸러 하루 꼴로 승전보, 혹은 희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당도했다. 말만 들어보면 전쟁이 끝나는 것은 정말로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베이고르도 꽤나 애 쓰는군.”
또 다시 전령이 전한 서신을 읽어내린 막시밀리언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에 군터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자잘한 소식까지 부지런히 전달하는 의도 말이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베이고르는 두려운 게야.”
“전체적인 전황은 순조로운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지. 바로 그 때문이야. 현재 베이고르에 합세한 이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들러붙은 자들이 많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
“쉽게 붙은 자들은 쉽게 떨어져나갈 수 있다…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니 이렇게 연이어 승전보를 전하면서 혹 이탈할 수 있는 자들을 붙들려는 게야.”
“세심하군요.”
“철저하지. 완벽한 승리에 장애가 되는 그 어떤 불안요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쁘지 않아. 대세를 굳히는 데 필요한 것은 대범함보다는 신중함이니까.”
요 근래 막시밀리언의 얼굴은 밝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우니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바빠질 걸세. 그러니 미리 푹 쉬어두도록 하게.”
“예.”
게닝힐과 마랑하이엔을 지키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막시밀리언과 군터는 위글로우로 돌아온 상태였다. 전투를 치른 병졸들에게 휴식도 부여하면서 위글로우에 가득 찬 피난민들의 문제도 직접 다루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반드레온이 힌자예프를 함락시키며 생긴 여유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짤막한 여유. 그 시간을 군터는 온전히 가족들에게 썼다. 특히 보리스에게 직접 무술을 가르치는 데 더 시간을 보냈다. 그의 어린 아들은 무술을 익히는 데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그런 걸 거예요.”
벨리사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군터는 그게 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아비의 정을 갈구하는 자식으로 보기에는 무술 훈련에 임하는 보리스의 태도는 가르치는 그조차 놀랄 정도로 굉장히 진지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이 느껴졌다.
“잘했다.”
재능이 있고, 노력까지 착실히 쏟으니 결과가 안 날 수가 없다. 군터는 보리스를 가르치며 꼭 한 번씩은 칭찬을 했다. 이대로 20년. 아니, 15년만 지나도 제법 번듯한 무인 하나가 나올 거라 군터는 확신했다.
*
전쟁이 끝났다. 아니, 엄밀히 말해 종전은 아니지만 바크렌 전역이 베이고르와 타칸 연합의 손에 떨어졌으니 ‘그들’의 전쟁은 승전으로 끝이 난 셈이다.
아직까지 바크렌 내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나고 있고, 바크렌과 인접한 제국의 3주에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바크렌을 손에 넣었다한들 아직 완전히 상황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이고르의 왕, 주앙 칼 고르는 고토 회복과 베이고르 왕가의 복권을 선포하고 왕도(王都) 베나시드(구 살마드)에서 베이고르 왕가의 적통을 잇는 대관식을 치를 것임을 선언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잘 부탁하네. 어려운 일은 위벨과 상의하면 실수하는 일이 없을 걸세.”
“유념하겠습니다.”
막시밀리언은 주앙 칼 고르의 부름을 받아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딱 집어서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전쟁의 공신록에 이름이 올라 대관식에 참석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또한 그는 이번 대관식에서 귀족의 작위와 영주 지위를 하사받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막시밀리언이 자리를 비우게 됨에 따라 군터는 부사령관으로서 위글로우에 남아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과포화 상태에 이른 피난민들 때문에 다소 골치가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한 번 해본 일이기에 군터는 담담히 막시밀리언을 배웅할 수 있었다.
“개척촌을 세워야 합니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제법 큰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피난민들의 문제를 논하던 자리에서 위벨이 말했다.
“개척촌?”
“예.”
“어차피 피난민들의 문제는 사령관께 영지가 주어지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비록 게닝힐과 마랑하이엔은 해당되지 않지만, 막시밀리언이 바라는 대로 영지가 주어진다면 제법 많은 수의 마을들이 그의 아래로 편입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위글로우에 들어차 있는 피난민들의 문제도 해결될 터.
“부족합니다. 더군다나 무작정 피난민들은 기존의 마을에 밀어 넣을 수도 없지요. 반감을 사게 될 겁니다.”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자들이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겠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전쟁이 한바탕 휩쓸고 간 고향에 돌아가 봤자 남아 있는 것도 없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고, 아직 도시 바깥의 상황이 불안하다는 말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도는 말들 중 상당수는 막시밀리언이 동원한 바람잡이들이 흘린 것이었다.
“외지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합니다. 개척촌은 그러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지요.”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준단 말인가?”
“어렵지 않습니다. 살 수 있는 집.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땅.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두 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군. 난 농사를 지으며 산 적이 없어.”
“집을 지어주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를 마련해주면 됩니다. 그 두 가지만 있다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도적과 관리들이 수탈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그런 말을 하는 위벨의 표정이 자신만만했기에 군터는 피난민들에 대한 일을 그에게 일임했다. 그러자 위벨은 사뭇 기쁘고 들뜬 얼굴을 했다.
“골치 아픈 일을 맡은 것이 그리도 기쁜가?”
“무관이 전장에서 무용을 뽐내며 호기에 취한다면, 저와 같은 문관들은 백성들을 살피며 보람을 얻습니다.”
“백성들을 살핀다?”
“예. 제가 일을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고, 나아가 나라가 나아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관리로서 살아가는 의의가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의외로군.”
“본래 정치란 정적을 거꾸러뜨리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꾀를 내야 하지만, 본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위글로우를, 주공께서 얻게 되실 영지를 더욱 살기 좋게 만들고 싶습니다.”
“나라가 아닌 영지인가. 충성스러운 신하로군.”
“이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제가 섬기는 것은 제국도 베이고르도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제 능력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백성들을 살피는 일도 어쩌면 제게는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흠. 일을 진행하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이야기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군터로부터 일을 일임받은 이후, 위벨은 밤낮을 잊고 일에 몰두했다. 그는 먼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을 선별했고, 그 중에 몇몇 곳을 개척촌 후보지로 선정했다.
“이곳들을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물자 이동의 편리성입니다. 모든 마을은 위글로우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자네가 고른 곳들이 길을 내기 좋은 곳들이란 말인가?”
“예.”
“뭐, 좋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사람을 부릴 자금. 그리고 안전도모를 위한 병력입니다.”
“자금이야 자네가 알아서 할 테고, 병력은…….”
“제 휘하에서 내도록 하지요. 백인대 셋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미트라스가 나섰다. 이번 일은 직접적인 힘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만일에 대비한 것. 따라서 군터 천인대보다는 미트라스 천인대가 더 적합하다. 안 그래도 군터는 미트라스에게 명을 내리려던 차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눈치 있게 나서주니 번거로움을 던 셈이다.
“모병 상황은 어떤가.”
“일전에 사령관께서 명하신 대로 피난민 우선으로 받고 있습니다. 갈 곳이 없는 불안한 처지라서 그런지 열의가 대단하더군요. 위글로우의 군병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소문도 퍼져서 가려 받는 것이 일일 정도입니다.”
“현재까지 그렇게 충원된 인원은?”
“사백입니다.”
사백이든 오백이든, 어차피 당장 군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한다. 대놓고 병사로 써먹지도 못한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자칫 트집잡힐 수도 있는 일을 빠르게 진행할 것을 명했다. 피난민들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일단 병사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위글로우에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고, 병사가 된 이들의 가족들도 덩달아 정착하게 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상비군 오천이라.’
막시밀리언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병력의 규모다. 하사받을 영지와 관련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고 해도 유지하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굳이 무리하여서라도 오천을 고집했다.
‘병력이 많아 나쁠 것은 없지만.’
무관인 그로서는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 병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에 대해 골머리를 앓는 것은 그가 아니다.
“개척촌의 설립은 어느 정도 걸릴 것으로 보는가?”
“당장 시작한다고 가정해도 지금으로부터 최소 한 달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꽤나 걸리는군.”
“바로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기실 이것도 짧게 잡은 것입니다.”
부지의 선정이 끝나고, 위벨은 본격적으로 개척촌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그간 온갖 예산에 반기를 들며 최대한 액수를 깎아내던 그는 개척촌 설립 작업에 그동안 아낀 돈을 모두 쓰겠다는 듯,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쏟아 부었다. 숫자에 무감각한 군터조차 보면서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써야 할 때 쓰지 않는다면 재물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목공이며 석공들도 수십이 넘게 투입되었다. 풍족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쌓여있던 위글로우의 관금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갔다.
그렇게 돈이 쉬지 않고 투입되는 만큼, 개척촌의 설립도 빠르게 진행됐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 수 있을 법한 집들이 하루에도 몇 채씩 생겨났고, 불과 닷새 만에 마을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마을에 피난민 무리가 병사들의 호위 속에 도착했다.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필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 관리를 보내고 틈틈이 순찰 병력을 보임으로써 위글로우에서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게.”
위벨의 진두지휘 하에 위글로우를 난잡하게 만들던 피난민들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외지인들로 인해 불만이 크던 위글로우의 시민들도 사령관에 대한 성토를 줄여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베나시드로 갔던 막시밀리언이 돌아왔다.마중 나온 수하들과 인사를 나누며, 막시밀리언이 말했다.
“코누다이안 영지의 영주.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이제 그게 내 이름이다.”
“감축 드립니다.”
“감축 드립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