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힌자예프가 반드레온의 손에 떨어진 이후로는 조금 긴장이 풀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막시밀리언은 처음 말했던 것처럼 게닝힐과 마랑하이엔만을 쥔 채 일체 다른 움직임을 삼갔다. 당초의 계획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렸기에 피해가 적었음에도, 막시밀리언은 이 이상 욕심을 내고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군터가 그에 대해 넌지시 물었을 때 막시밀리언은 픽 웃으며 말했다.
“너무 눈에 띄면 곤란해진다네. 너무 앞으로 나가도, 너무 뒤쳐져도 좋지 않아. 적당한 것이 가장 좋은 법이야. 힘이 부족할 때는 특히나 말이지.”
“힘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면 한동안은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숨 죽여 지내야 할 걸세.”
“…이전에 말씀하셨던, 그 권력 다툼 때문에 말입니까.”
“그래. 베이고르의 권세가들에게 있어 제국에서 귀의한 이들은…말하자면 굴러들어온 돌이지. 필시 내키지 않아 할 게야. 여러 협상과…치열한 물밑싸움이 이어지겠지. 뭐, 그렇다고 정말 거하게 서로를 들이받지는 못하겠지만.”
“그건 어째서입니까?”
“타칸 연합이 있지 않은가.”
“타칸 연합? 베이고르와 그들은 동맹이 아닙니까. 설마하니, 제국이라는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갈라서기야 하겠습니까.”
“꼭 갈라서야만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 어쨌거나 베이고르의 입장에서 타칸 연합은 유용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럽고, 거슬릴 수밖에 없어.”
“부담스러운 것은 이해하나, 거슬린다함은 어째서입니까?”
“베이고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크렌은 본시 그들의 땅이거든. 마땅히 되찾아야 하는 고토(故土)지. 그런데 그 땅에 동맹이라고는 하나 타국에게 나눠주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게 참전의 대가로서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지.”
“베이고르도 그것을 알고 타칸 연합을 끌어들인 것이 아닙니까.”
“맞아. 알고서도 그리 했지. 허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자네도 알다시피 꽤나 얄팍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저 소박하게 성공적인 궐기만을 바랐더라도,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야. 욕심이 나겠지. 더군다나 연합하여 상대할 만큼 강대한 제국도 내부의 환란으로 휘청거려주고 있는 판국이니까.”
“제국의 상황이…그리 좋지 않습니까?”
“말도 못할 정도라더군. 매일 같이 황도에서 피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일세. 군주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자신들의 영지(領地)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않고 있다는 모양이고. 뭐,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그런 고로 베이고르의 귀족들은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결국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네. 타칸 연합의 막강한 힘에 대응하려면 ‘우리’의 힘이 절실할 것이거든.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들과 같은 베이고르니까 말이네.”
“타칸 연합이 먼저 이를 드러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저 욕심 때문에 처음의 약속을 저버리고 맹우와 각을 세운다니. 동맹이라는 것의 무게가 참으로 가볍군요.”
막시밀리언은 씁쓸한 듯 웃었다.
“그런 거라네. 따지고 보면 모든 관계라는 것이 다 그렇다네.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야.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거든. 그 욕심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니, 욕심이 동한다면 신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야.”
“…허면, 사령관께서는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보낼 참이십니까?”
“마냥 놀고만 있는 건 아니네. 나도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유민들을 모으는 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란은 바크렌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는 곳의 백성들은 진즉부터 남쪽으로의 피난을 시작했다. 막시밀리언은 병력을 풀어 인근에 떠도는 피난민들을 위글로우로 이끌었다. 한 번에 큰 숫자를 모으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수가 늘어 지금 위글로우는 포화 상태에 다다라 가고 있었다.
“당장은 식충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혼란이 조금만 가라앉으면 알게 될 게야. 결국 힘이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거든. 돈이든, 식량이든, 병력이든…모든 것이 사람 없이는 이야기가 안 돼. 어차피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땅은 남아돌게 될 터. 그때가 되면 위글로우에 있는 피난민들은 보물이 되겠지.”
이제는 군터도 막시밀리언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베이고르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가 영주로서 영지를 수여 받은 이후를 착실히 대비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먼 곳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어느덧 그가 그리던 미래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참! 아그니스 체스퍼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다네.”
“…그렇습니까.”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얼굴이군.”
“그는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와 같은 전장에서 싸웠던 것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만…그뿐입니다. 그가 어디서 무얼 하건 이제 저와는 관계없지요.”
“흐음. 그런가. 아무튼, 아그니스 체스퍼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타라냐드로 갔다 하네.”
“타라냐드? 아예 바크렌을 벗어났다는 말입니까.”
“바크렌 내에서 뭘 도모해도 가망이 없다고 본 거겠지. 아마 살마드가 떨어지고 성주와 총독이 모두 죽은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야. 그러니 아예 타라냐드로 건너가 원군을 끌어내 볼 생각이었겠지. 내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지만…….”
“아그니스 체스퍼가 타라냐드로 향했다는 사실을 타칸 연합도 알고 있습니까?”
“글쎄. 아마 알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들이 푸른 사자의 원한을 갚기 위해 타라냐드까지 들이치지는 않을 게야. 그랬다가는 기껏 좋은 전황이 뒤집힐 우려가 있거든. 원군으로 온 병력을 몇 번 잡았다고 해서 타라냐드를 우습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타라냐드까지 건들어서 균형을 깨면 타 주의 제국군이 밀려올 우려가 있어. 그게 제일 크지.”
“균형……?”
“지금 베이고르와 타칸 연합은 바크렌 내의 제국군을 몰아붙이고 있어. 일방적인 흐름이지. 때문에 타 주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게야.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손실만 크고 득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 어느 하나가 먼저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먼저 나선 쪽이 크게 피해를 봐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서지 않아.”“하지만 타칸 연합이 먼저 타라냐드를 건드린다면…타라냐드가 본격적으로 피를 흘리게 되기에 타 주가 가질 위험부담이 줄어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지. 타칸 연합이 타라냐드를 치면 타라냐드도 전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본다인이나 리바스트라도 한 시름 덜고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균형입니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같은 제국의 지방 정부이거늘…….”
군터의 중얼거림에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지 않네.”
“예?”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사람이라는 것이 다 욕심대로 움직인다고. 제국은 하나지만 제국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네. 그들이 백성이고, 관료고, 귀족이야. 그들은 그들 각자의 욕심대로 움직이지. 그리고 지금 같은 때에 어중간하게 힘 있는 자들의 머릿속에 차는 생각은 대개 하나야. 그게 무엇일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보신(保身)이지. 살고 싶은 욕심. 자리를 유지하고픈 욕심. 준걸(俊傑)은 더 큰 야망을 불태울지도 모르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자라고 어중간한 이들의 머릿속에는 그저 살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할 게야. 바로 그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쟁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거지.”
조금 전까지 씁쓸하게 웃던 막시밀리언은 이제 기분이 좋은 듯 껄껄대며 웃었다.
“보게나. 베이고르든 타칸 연합이든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변방 소국에 불과하네. 실제로 저번 전쟁 때 맥없이 밀리던 전세가 군주 한 명의 참전으로 인해 박빙으로 치닫지 않았나? 제국은 마음만 먹으면 이따위 전쟁, 얼마든지 끝낼 수 있네. 하지만 그러지 않지. 아니, 그러지 못해.”
제국은 거대하다. 거대한 만큼 적도 많지만 그것은 힘을 쓰지 못하는 핑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들이 제국을 위한다는 대의 앞에 하나가 되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제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러지 못해. 왜냐? 거대한 제국에는 거대한 만큼 사람도 많거든. 그들이 하나가 되어 힘을 낸다?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지. 반면에 베이고르 같은 소국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적이 있음으로 인한 위기의식으로 이해관계를 넘어 하나가 되어 힘을 낼 수 있지.”
“재미있군요. 강하지만 약하다니.”
“강하지만 약하다? 맞는 말이군. 그래. 그저 강했다면 진즉에 제국이 세상을 모두 발아래 두었겠지.”
막시밀리언은 읽던 서신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한때는 그런 적도 있었다고 하더군. 강하기만 한 제국 말이야. 황제의 명령 아래 백만이 훌쩍 넘는 제국군이 하나가 되어 진군하고, 다섯 군주가 하나씩 군대를 이끌고 적국의 도성을 밀어버리던 시절. 그때의 제국은 정말이지 세상을 뒤엎을 것처럼 강대하고 위대했다 들었어. 백 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말이네.”
황제는 죽었다. 군주들은 이제 군대를 이끌고 적국을 짓밟지 않는다. 제국의 강력했던 창칼은 적국 대신 스스로의 몸을 헤집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지.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야. 내 보기에 영광스런 제국의 역사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제부터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 될 것이야. 나는 우리가 그 흐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제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군요.”
“어려울 것 없다네. 나도 뭔가 대단한 촉이 있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그렇기를 희망할 뿐이지.”
바람이 불어와 막사의 입구를 열어 젖혔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싸워야 할 적은 아마도 없을 테지만 병사들 중 누구 하나 손에 창칼 한 자루 쥐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어차피 역사는 사람의 손으로 써내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흐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흐름에 휩쓸리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흐름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니…누가 그 주인공이 될지는 하기에 달린 것이야.”
막시밀리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그 이상의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열기가 그의 흉중에 자리한 야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군터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또한 욕심이군.’
막시밀리언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지금의 그를 움직이는 것 역시 그의 욕심이리라. 다만 그것을 욕심이라 하지 않고 야망이니 야심이니 하는 거창한 말로 표현함은, 그 욕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때로는 경이를 표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말하고 흐름을 말한다. 얼핏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사내의 유치한 허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까닭은 그런 말을 하는 사내의 눈이 꿈꾸듯 몽롱하며 표정이 아이의 그것처럼 순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의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욕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개 백인장에서 도시의 사령관이 되고, 귀족이 되어 영주가 된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것을 이루었다면, 더 올라가지 못하란 법도 없지 않은가.’
사람의 한평생에 무엇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어찌 사람이 재단할 수 있겠는가.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활활 타오르는 야심이 과연 어디까지 옮겨 붙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