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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22화 (222/1,064)

<-- 2부 -->

찢기고 불에 탄 제국기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휘날린다. 그 아래에는 무수한 시신들이 들판의 풀처럼 깔려 있다.

“이걸로 끝이군.”

베이고르의 왕. 제국에서 일컫기를 반왕. 주앙 칼 고르는 승리의 전장을 내려다보며 짤막한 소회를 흘렸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두 사내 중 하나, 베이고르의 재상이자 공작인 유그 칸디시아렌이 흘러가는 그 말을 받았다.

“그럴 것입니다. 이제 타라냐드건 본다인이건, 리바스트라건 여력은 없겠지요.”

“방심은 금물이외다. 제국의 저력은 끝을 모를 만큼 거대하지. 그러니 언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오.”

또 한 명의 사내, 파비우스 리에론이 말했다.

주앙 칼 고르가 돌아섰다. 그는 웃으며 파비우스 리에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로 그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여 일만이나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닌가. 오늘 하루 정도는 모든 걱정은 다 접어두고 승전을 축하하세.”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현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습니다. 승기를 잡은 지금 기세를 몰아 바크렌 전역을…….”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법이야. 칼도 그렇지 않은가? 이가 나간 칼을 계속 휘두르다보면 뚝! 하고 부러져버리지 않는가. 단단한 칼도 그렇거늘 하물며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제대로 쓰려면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하는 법. 마냥 몰아붙인다고 해서 효율이 나지는 않아. 고생을 했으면 쉬기도 해줘야지. 아니 그러한가?”

“으음.”

“자아. 그런고로,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보내세나. 전령을 띄워 각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승전 소식도 전하도록 하지. 그러면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아군이 힘을 얻지 않겠나? 그렇게 힘을 얻은 아군이 더 크게 활약을 하면 이 땅의 수복은 보다 빨라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왕의 역할이지.”

“예?”

“왕이란 국가의 기둥.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이 무너지듯, 왕이 무너지면 나라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따라서 왕은 항시 행사에 있어 누구보다 진중해야 하며 또한 그름이 없어야 함이라.”

“왕의 도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나, 그런 신이 듣기에도 좋은 말씀이십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네. 내 조부께서 나를 당신 앞에 앉히시고 가르침을 주셨었지. 내 조부께서는 왕가의 방계로서 젊으셨을 적에 망국의 아픔을 직접 겪으셨지. 평생 동안을, 오직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일념만으로 사신 분이었다네.”

주앙 칼 고르는 앞에서 걸었다. 유그 칸디시아렌과 파비우스 리에론은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 조부께서는 굉장히 현실적인 분이셨네. 할 수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 쏟아 붓는 것과는 별개로, 그분께서는 단시간 안에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계셨네. 때문에 그분께서는 내게 기대가 크셨어. 그분의 대와, 내 아버지의 대에는 힘들더라도 나의 대에 이르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거겠지.”

“이제 곧 비원(悲願)을 이루실 것입니다. 전하.”

유그 칸디시아렌이 말했다.

주앙 칼 고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분께서 바라시고 내다보셨던 대로, 내 대에서 베이고르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몰락한 트라펠 왕조를 대신하고, 그 뒤를 잇는 신왕조가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리라.”

그는 씩 웃으며 파비우스 리에론의 어깨를 짚었다.

“파비우스 리에론. 그대의 공이 크다. 그대의 협력이 아니었던들 우리의 행보가 이리도 순조롭지는 못했을 테지.”

공신이지만 변절자다. 사람에 따라서는 듣기 좋은 칭찬이 아닐 수 있고, 파비우스 리에론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에 대해 내색 하지 않았으니, 파비우스 리에론은 기뻐하는 기색을 내는 대신 몸을 낮췄다.

“제국은 이 땅을 버렸으니, 이 몸은 응당 백성들을 위한 새 주인을 찾아야 했을 뿐입니다. 공이랄 것도 없으니 치사는 거두어주십시오.”

“아아. 위민이라! 훌륭한 대영주의 자질이지.”

주앙 칼 고르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 숙인 파비우스 리에론의 입가도 꿈틀거렸다.

*

한 차례 회전에서 힌자예프군에 대승(사령관의 목을 벤 것을 포함해서)을 거둔 이후 모든 것은 막시밀리언의 예견, 혹은 계산대로 돌아갔다.

위글로우군이 게닝힐과 마랑하이엔을 점거하며 일부러 시간을 늦추는 동안 아모트의 병력은 순조롭게 힌자예프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힌자예프에 걸린 제국기가 사라졌다.

“아모트 사령관이 보낸 전령입니다.”

막시밀리언은 힌자예프에서 온 전령이 가져온 아모트 사령관, 반드레온의 서신을 읽었다.

“알았다고 전해라.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언제 한 번 자리를 가지자는 말도 함께 전하거라. 따로 서신까지는 필요 없겠지?”

“예. 제가 들은 말씀 그대로 전해 올리겠습니다.”

전령이 깍듯이 군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전령이 막사를 나가자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었다.

“우습군. 제국군에서 베이고르군이 되었음에도 군례는 여전히 같아.”

“처음 군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배운 것이 몸에 익은 것이겠지요. 비단 군문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위벨이 말했다. 그는 힌자예프와의 회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 막시밀리언의 명을 받아 위글로우에서 불려온 상태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속에서 꾀주머니를 가까이 두고픈 막시밀리언의 바람 때문이었다.“뭐, 그렇겠지.”

“서신의 내용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별 거 없다. 틀에 박힌 감사 인사 몇 마디. 그리고 앞으로의 긴밀한 공조를 바란다는 정도.”

“아모트 사령관도 역시 야망이 있는 자로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자처해서 적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겠지. 애초에 우리도 반드레온이 그런 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움직인 게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군터는 막시밀리언과 위벨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모트 사령관, 반드레온이라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의 야심 운운하는 부분에서는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보아하니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뿐인 듯했다. 미겔은 표정 변화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알아봤기 때문에 움직였다함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드레온은 일찍이 리에론 가의 후원을 받으며 큰 자다. 그는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바크렌 지방정부가 물갈이 될 즈음에 자처하여 신임 성주의 밑으로 갔지. 그건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고, 배짱만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 기회를 잡는 건 욕심이 있는 자뿐이다. 하물며 위험을 동반한 기회라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야심이 있는 자만이 쥘 수 있는 법.”

막시밀리언은 반드레온의 서신을 탁자 위에 대충 던져놓았다. 보고 싶은 자는 누구든 보라는 투였다.

“그는 나 이상으로 리에론 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다. 나조차도 아내를 맞고 나서야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지.”

리에론의 사위가 되기 전에도 막시밀리언은 그럭저럭 파비우스 리에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랬던 그도 반드레온에 대한 정보는 조금도 접할 수 없었으니, 그만큼 리에론 가에서 반드레온을 신경 쓰고 있다는 뜻.

“기이한 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자가 그렇게까지 리에론 가의 비호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령관께서는 혹 짐작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짐작 가는 바야 물론 있지. 하지만 내 생각. 아니, 추측이 자네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 굳이 말하지는 않겠네.”

머리 좋은 자들은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군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막시밀리언이건 위벨이건,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머리 회전이 느린 자들은 그들의 사고는 물론, 대화마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다지 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리에론 가문도, 반드레온이라는 자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군. 왕과 파비우스 리에론의 군대가 타 주의 원병을 모조리 격파했다. 이제는 내려올 일만 남았지. 타칸연합국은 이미 밀고 내려오는 중이고,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것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행방이지만…….”

“어차피 이제와 그가 무엇을 하든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타칸연합의 대족장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찾고 있다 하더군요.”

“푸른 사자의 복수 때문인가? 타르가이 베르겐은 의외로 낭만적인 자로군.”

“설마하니……. 단지 감정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겁니다. 푸른 사자는 타칸연합의 대전사였지 않습니까. 복수를 바라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백성들이겠지요.”

“글쎄. 군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난데없이 질문이 돌아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군터가 고개를 들자 막시밀리언이 말했다.

“자네는 직접 타르가이 베르겐과 부딪쳐 보지 않았던가. 자네 생각에는 어떤가? 그 타르가이 베르겐이 아그니스 체스퍼를 쫓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말씀처럼, 복수 때문이겠지요.”

“누가 바라는 복수일까?”

“둘 모두일 겁니다.”

“둘 모두라? 하긴 그렇겠군.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내주었어.”

막시밀리언이 낮게 웃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군터가 다시 입을 떼었다.

“하지만 복수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은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음? 아니. 그건 아니지. 지금에 와서 흑포장군의 목은 그다지 가치가 없어.”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미 전쟁의 결과는 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기세가 꺾인 적을 쫓아 끝장을 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에 깃발을 꽂는 것이야.”

“그게 무슨.”

“잊었는가? 이 전쟁은 베이고르와 제국의 전쟁이 아니네. 마찬가지로 타칸연합과 제국의 전쟁도 아니지. 베이고르와 타칸연합이 손을 잡고 제국을 상대하는 전쟁이야. 두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마땅히 전리품도 둘로 나눠 가져야 하지 않겠나?”

“…먼저 챙기는 자가 임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을 테고. 분명 이 전쟁이 계획될 무렵에 두 나라가 맺은 협상안이 있을 것이야. 허나 그것을 감안해도 깃발 꽂기는 중요하지.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나중에 분배를 할 때 생색내기로는 쓸 수 있을 테고, 조금 비약하자면 국가 간의 약속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 작품 후기 ==========

오늘도 그랬지만 내일은 바쁜 일이 있습니다. 내일(8일)은 연재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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