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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21화 (221/1,064)

<-- 2부 -->

위글로우와 힌자예프군의 전투는 직전에 감돌았던 비장한 분위기에 비해 다소 싱겁게 끝났다. 전투 시작을 알리는 북 소리가 울리자마자 맹렬히 돌진해 들어간 군터 천인대가 힌자예프군을 그대로 관통해 버린 것이다. 기병 돌격을 염려해 중보병들을 밀집시켜 놓은 힌자예프군이었지만 군터 천인대는, 군터는 그런 그들의 시도를 비웃듯 그 두터운 방어진을 가뿐히 뚫어냈다.

“막아! 막아라!”

본군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힌자예프의 사령관은 빠르게 가까워지는 적의 칼날을 느끼며 발작하듯 외쳐댔지만 적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으윽!”

그는 기어이 사령관으로서의 위치마저 저버리고 말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그러나 밀집한 병력은 앞뿐만 아니라 뒤에도 있었다.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준비한 병력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것이다.

“비켜라! 여기서 길이나 막지 말고 나가서 싸우란 말이다!”

호통을 치는 내용과 자신의 행동이 완벽히 어긋난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기실 그는 상인들이 도적들로 인해 크게 피해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도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낼 때도, 그렇게 보냈던 병력이 크게 상해 돌아왔을 때도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병사들로부터 그 도적들이 사실 도적이 아니라 정규군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설마…북쪽의 적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런 불안감도 잠시. 위글로우의 깃발을 든 군대가 게닝힐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는 코웃음을 쳤다. 혹여 주변에 동조하는 다른 힘이 있는가 싶어 사방으로 탐마를 뿌렸지만 돌아온 것은 위글로우의 단독 움직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는 위글로우의 사령관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마냥 안일한 생각은 아니었다. 힌자예프는 근방에 있는 어떤 도시들보다 규모가 크고, 보유한 병력 또한 많았다. 위글로우와 힌자예프의 규모 차이는 단순히 배 이상이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직접 이 발칙한 역적 놈을 토벌하리라!”

힌자예프의 사령관은 정계의 연을 잡아 무탈하게 사령관 자리에 오른 자였다. 특별히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공 없이,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때문에 그는 은연중 능력 있고 공이 있는 자들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다. 특히 백부장부터 시작해 전공을 쌓아 인근 도시의 사령관직까지 오른 막시밀리언에 대한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심은 막시밀리언이 리에론의 사위가 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오만한 놈! 내 직접 네 목을 베어주리라!’

어째서 상대가 불리한 싸움을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고민 따위는 깊게 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시간도 부족했다. 이미 힌자예프는 선공을 당했다. 여기서 곧장 응수하지 않는다면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나올 판이다. 그는 주변 도시들과, 특히 살마드에 전령을 보내 막시밀리언의 만행에 대해 알리는 한편 즉각 군사를 소집해 도시를 나섰다.

잘못될 거라는 생각? 꿈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막상 도착하여 본 위글로우의 군세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에 잠시 움찔하기도 했지만 대치하고 버티면 곧 당도할 원군을 떠올리며 용기를 찾았다.

그는 설마하니, 마주친 첫날부터 즉각 정면으로 부딪쳐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또한 나름대로 공 들여 육성한 병력이 적 기마대의 돌진 하나 못 막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거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종합하면 이 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그의 예상에서 한참이나 빗겨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가 꼴사납게 달아나고 있는 이유였다.

“아아악!”

비명소리가 가까워진다. 계속해서 말을 닦달하고 있음에도 소리는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 두툼한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떨림의 이유는 말이 달리는 반동 때문만은 아니리라.

“일군의 수장이란 자가! 참으로 꼴사납구나!”

천둥 같은 일성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그는 하마터면 놀라 낙마할 뻔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것은,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거대한 흑마와 그 위의 거한이었다.

“으,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말의 배를 걷어찼지만 거한과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리석구나! 싸울 자신이 없었다면 도시 안에 박혀있지 그랬느냐! 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높이 올라간 기형의 창이 일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군. 힌자예프의 군대가 이리도 약해빠졌을 줄이야.”

“우두머리부터가 칼 한 자루 제대로 쥘 줄 모르는 샌님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요.”

“내가 적을 너무 과대평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또한, 아군의 전력은 너무 과소평가 했던 모양이야.”

두 눈을 질끈 감은 힌자예프 사령관의 수급을 앞에 두고 막시밀리언은 껄껄 웃었다. 그는 군터에게 크게 포상하리라 약조하고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사령관. 이참에 힌자예프까지 도모하심은 어떠십니까.”

처음으로 일군의 선봉을 맡아 적 지휘관의 목을 베는 대공을 세웠다. 한 전투의 승리를 통째로 가져온 것이나 다름없는 활약을 했으니 군터도 다른 때와 달리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머리를 잃은 힌자예프까지 노려볼 것을 막시밀리언에게 권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그 제안에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하네. 자네도 알겠지만, 야전과 공성전은 다르지. 거기에 이번에 싸운 지휘를 내려야 할 사령관을 잃었으니 바로 도망을 쳤지만, 성벽 안에 웅크린 적을 둘러싸고 공격한다면 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할 것이야. 수가 적은 우리로서는 성벽을 넘기가 쉽지 않을 걸세.”

“으음.”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힌자예프를 손에 넣는 것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곧 구원군이 당도할 것이다.”

“구원군? 설마…힌자예프의?”

“그래.”

군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힌자예프의 구원군이 당도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적이 당도한다는 것인데, 막시밀리언은 너무도 태평했다. 설마 이번 전투로 아군의 역량에 대한 자신이 생겼기 때문일까?

“아모트의 병력이다.”

아모트는 힌자예프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간 곳에 위치한 도시다. 그 규모는 위글로우보다는 크지만 힌자예프에는 부족한 정도로, 군터는 그곳의 사령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아모트의 사령관은 반드레온이라는 자로, 대외적으로는 성주의 명을 따르는 자로 알려져 있지만…실상은 파비우스 리에론의 숨겨진 칼이지.”

“…그렇다면.”

“아모트의 병력은 원군으로서 힌자예프의 성문을 지날 것이다. 그리고 정복군으로서 힌자예프를 손에 넣겠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습니까?”

“처음부터는 아니야. 자네들이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해주는 동안 결정된 사안이지. 북쪽의 군대가 내려올 때까지 힌자예프를 가둬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자그마한 불안요소라도 미리 치워놓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런 큰 결정에서 배제 아닌 배제가 되었다는 것은 조금 서운한 일이지만, 군터는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막시밀리언이 이 계획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궁금했다. 그가 아는 한 막시밀리언은 결코 이유 없이 남 좋은 일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물론 힌자예프가 함락되면 그의 말처럼 불안요소가 사라지는 셈이기도 하고, 반드레온이라는 자가 파비우스 리에론의 칼이라면 마냥 ‘남’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다 고려한다손 쳐도,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노리는 바가 더 있으리라 예상했다.

“사령관께서 노리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하. 그래. 내가 자네를 잘 아는 만큼 자네도 나를 잘 알겠지.”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그게 다는 아니지. 이건 파비우스 리에론과 반드레온에게 내가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야. 또한 불필요한 주목을 덜기 위한 얄팍한 술수이기도 하지.”

“불필요한 주목이라 하시면?”

“베이고르와 타칸연합국이 제국을 몰아내고 바크렌을 손에 넣으면 그 순간부터 살얼음판이 깔릴 걸세. 기존에 있던 자들과 새로이 합류한 자들이 서로 기 싸움을 벌이겠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쟁이 일어날 테고.”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인데 갖고자 하는 이는 많다. 그렇다면 자연히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

“그런 상황에서는 그저 몸을 사리는 것이 제일이야. 정말로 힘이 있다면 한 번 대차게 거머쥘 각오를 하고서 싸움판에 뛰어들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그 정도의 힘은 없으니 적당히 내 몫만 챙겨서 몸을 빼는 것이지. 하지만 너무 눈길을 끌면 그러기가 힘들어진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사령관의 말씀은…….”

“내게 필요한 것은 몫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공. 그리고 복잡하고 위태로운 정쟁에서 몸을 뺄 수 있는 자유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내게 작지 않은 것을 받았으니 내가 몸을 뺄 수 있도록 용인해주겠지.”

군터가 바라본 전장은 지금 막 전투가 끝난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이 바라본 전장은 처음부터 이곳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아직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미래의, 더 복잡하고 더 위험한 전장이었다.

“골치 아프겠군요.”

정쟁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기야, 수 년 전 처음 벌어진 전쟁에서 그들은 서로를 침략자, 혹은 망국의 잔당이라 부르며 서로의 피를 탐하던 사이였다. 그런 이들이 하루아침에 사이좋게 손을 맞잡을 수가 있을까?

“하하. 꼭 그렇지도 않을 걸세. 처음에야 서로 얕보이지 않으려 사납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겠지만, 결국에는 서로 조금씩 내어주면서 타협하게 될 것이야.”

“그리 쉽게 되겠습니까?”

“군터. 국가와 소속을 막론하고 사람이란 다 비슷비슷한 존재일세. 특히나 권력자들은 더 그렇지. 마냥 감정만 앞세우는 자들은 그 자리까지 오르지 못해. 오른다한들 자연스레 도태되기 마련이지.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자들은 감정 이전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들뿐이야. 그런 자들은 이해관계만 맞는다면 원수와도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자들이네.”

원수와도 웃으며 마주한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령관께서도 그럴 수 있으십니까?”

“나? 글쎄. 어떨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모르겠어. 닥쳐봐야 알지 않겠는가? 다만…노력하겠지. 그래야만 올라갈 수 있다면 말이야.”

막시밀리언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춥군요. 감기가 걸린 건지 으슬으슬합니다. 다들 건강 관리 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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