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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20화 (220/1,064)

<-- 2부 -->

지휘관을 잃은 힌자예프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무리하게 추격속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선두의 보병과 후미의 기병의 거리가 벌어진 상태에서 군터가 이끄는 기병대는 적이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쉼 없이 그들을 몰아붙였다. 힌자예프군이 혼란을 수습하고 뭉치려는 기색이 보이면 귀신같이 눈치 채고 곧장 돌격해 박살냈다. 그런 상황에 미겔이 이끄는 병력까지 가세하니 결국 힌자예프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추격한다! 살라스! 할렌!”

“옛!”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군터는 살라스와 할렌에게 각기 백 명의 병사를 맡겨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도주하는 힌자예프군을 쫓았다.

“부사령관! 저는 어찌 하오리까!”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미겔이 다급히 외쳤다. 그에 군터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짤막하게 답했다.

“이곳에 남아 전장을 수습하라!”

“알겠습니다!”

군터 천인대가 순식간에 세 갈래로 나뉘어 떠나고, 전투가 끝난 전장에는 식어가는 시신들과 쓰러져 신음하는 양측 병사들, 그리고 멀쩡히 서 있는 미겔의 감찰대 병사들만이 남았다.

“이건 뭐…완전히 떨거지 취급이군요.”

“뭐가 불만이냐. 목 날아갈 걱정 안 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좋게 생각해라.”

“그렇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부사령관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던 수하는 다소 기가 죽은 기색이었다. 미겔은 그런 수하를 탓하거나 놀리지 않았다. 그 무지막지한 실력행사를 바로 눈앞에서 보았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어쨌거나 임무는 대성공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이만하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나 참. 우리는 감찰대 아니었습니까? 밖에서 싸우는 건 다른 놈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지…….”

“토라진 애새끼도 아니고 뭐 그리 쫑알쫑알 말이 많으냐? 손이 부족하니 나서는 것 아니냐. 왜? 예전 기억 살리면서 털어먹을 때는 좋았는데 눈앞에 칼이 휙휙 날아다니니 생각이 좀 바뀌더냐?”

“바로 그겁니다. 이거 보이십니까? 여기 이 코에 상처. 진짜 조금만 고개를 빼는 게 늦었어도 코가 통째로 잘려나갔을 겁니다.”

“알았으니 뒷정리나 시작해! 여기 이것들이 다 돈이야 돈! 흔적도 없어야 하는 거 알지?! 시체들도 대충 땅 파서 묻어버려!”

“대장님! 아직 산 놈들은 어떻게 합니까?!”

한 부하의 물음에 미겔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뭘 어떻게 한단 말이냐? 죽여! 그리고 묻어!”

“예이!”

*

군터는 달아나는 힌자예프군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처음 따라붙은 백 명 조금 넘는 무리를 모두 도륙한 그는 곧장 주변을 돌며 많게는 수십, 적게는 단 몇 명에 지나지 않는 패잔병들을 수차례에 걸쳐 쓸어버렸다.

“대장님! 이제 이 주변에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군터는 주변을 돌아보며 눈과 귀를 최대한 열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이 근방에 적은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자 그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자.”

“뒷처리는 어찌 하오리까?”

“굶주린 짐승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힌자예프군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도망친 놈들을 모두 잡아내지 못하는 이상 흔적을 지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습니까?”

미겔은 그에게 주어진 일을 너무 잘해줬다. 애초 목표했던 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병력을 끌어냈고,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들을 전멸시킬 수는 없었다. 이런 돌발 상황이야 실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마도 위벨은 처음부터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겼을 것이다. 어차피 힌자예프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 물론 더 늦게 알게 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힌자예프에게 초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을 테니.

정보의 차단이 아닌 본래의 목적을 생각하면 오늘 거둔 성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 때문에 군터는 말머리를 돌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다 챙겼느냐?”

“옛.”

전장을 수습하는 것은 포기했으나 가장 중요한 전리품을 잊지는 않았다. 바로 그들이 도륙한 적병들의 귀다.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이 저마다 말안장 옆에 걸어놓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머니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수확한 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병장기 같은 것들은 그냥 버려두게 한 군터가 유일하게 허락한 전리품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장에서 벤 적의 귀야말로 전공의 증거니까 말이다.

“혹시 달리다가 떨어뜨리지 않게 잘들 챙기도록. 그게 다 너희의 포상금이다.”

“마누라처럼 챙기겠습니다!”

“너 마누라 없잖아?”

“생기면 애지중지 챙길 거야.”

“언젠가 생길 내 아들이 손자 낳는 게 더 빠르겠는데?”

“하하하핫!”

승리. 그것도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승리는 전장에 나선 군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다. 그런 최고의 선물을 받은 군터 천인대 병사들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이 감돌았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만.’

군터는 위벨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는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힌자예프가 바로 꼬리를 말지는 않을 거라 했다. 감정적으로 복받쳐서라도, 사령관으로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직접 병력을 몰고 밖으로 나올 거라고.

진짜 승부처는 바로 그때다. 그 한 번의 힘겨루기에서 우세를 점해야만 힌자예프는 잠잠해질 것이다. 전초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은 기쁘지만, 아직 들뜨기에는 이르다.

허나 군터는 병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괜히 병사들의 기쁨까지 억눌러가며 긴장감을 새기기보다는 기세가 오른 채로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

군터 천인대와 미겔의 감찰대는 위글로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사전에 이야기 했던 곳에 진지를 치고 막시밀리언의 본군을 기다렸다.

“고생들 했네. 정말 잘해주었어.”

만으로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막시밀리언이 이끄는 천 이백의 병력이 당도했다. 미리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막시밀리언은 군터와 미겔을 치하하고 이제 곧 움직임을 보일 힌자예프군에 맞설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위벨은 게닝힐 남쪽의 이 협곡에서 한 번 더 덫을 놓기를 바라더군.”

“가능하겠습니까? 이미 크게 한 번 물렸으니 독이 바짝 오른 상태일 겁니다.”

막시밀리언의 말에 미겔이 즉각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군터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유인을 해서 적에게 한 방 먹인다? 물론 그대로 된다면야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지만, 미겔의 말처럼 이미 한 번 거하게 물을 먹은 힌자예프군이 그런 뻔한 수작에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벌여 일부러 져주는 식으로 적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네. 병력의 반 정도는 협곡에 미리 매복을 하고 있고, 남은 반의 병력으로 적을 유인한다는 거지.”

“아직도 힌자예프의 군세는 우리와 비등, 혹은 우세합니다. 그런데 반의 병력으로 적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제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유인이네.”

“그렇다고는 하나…….”

미겔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막시밀리언 역시 설명은 하지만 확신은 없어 보였다. 성공만 한다면야 확실히 좋은 계책이지만, 그런 전제는 모든 허무맹랑한 계획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거롭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탁상 위에서 짜낸 현실성 부족한 계획일 뿐입니다.”

지도를 내려 보며 팔짱을 끼고 있던 군터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군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정면에서 힘으로 눌러버리지요. 간단하고, 어려울 것 없는 일입니다.”

“…….”

막시밀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사령관께서 보시기에 힌자예프의 군대는 강군입니까?”

“글쎄. 강군의 기준이야 다 다르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아니라 말하겠네.”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보십니까?”

“물론 그건 아닐세.”

“허면 정면으로 붙는 것을 망설이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아군의 기세는 높고, 적의 기세는 낮습니다. 제게 선봉을 맡겨주신다면 힌자예프 사령관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하하!”

막시밀리언의 기색이 변했다. 이상하리만치 굳어있던 얼굴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따지고 보면 내 이름을 걸고 치르는 첫 번째 전쟁이 아닌가? 때문에 나도 모르는 중압감이 날 누르고 있었나 보군.”

막시밀리언은 작고 복잡한 글귀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는 지도를 구겨 던졌다. 그리고 숙였던 몸을 번듯이 폈다.

“본디 까다로운 책략은 힘이 약한 쪽이 열세를 뒤집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지. 하지만 군터, 자네의 말이 맞아. 우리는 적에 비해 약하지 않다. 적은 이미 손해를 보아 기가 꺾였고, 우리는 반대지. 움츠러들 필요가 없는데 내가 너무 조심성이 많았어.”

그는 이제 그를 누르던 중압감을 완전히 벗어던진 듯했다. 그는 옆에 있던 다른 지도를 폈다.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지 않은 새 지도였다.

“이곳. 이 평야에서 우리는 힌자예프군을 맞는다. 한 번의 회전으로 적을 꺾고 그들을 도시 안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게닝힐과 마랑하이엔을 점령한 채 종전을 기다릴 것이야.”

위글로우와 게닝힐, 그리고 마랑하이엔과 힌자예프를 번갈아 보는 막시밀리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 위글로우와 힌자예프의 군대는 막시밀리언이 예견했던 바로 그 평야에서 마주했다.

*

저 멀리, 흔들리는 제국기를 보며 군터가 나직이 말했다.

“불어라.”

“옛.”

할렌이 그의 팔뚝보다 더 큰 뿔 나팔을 입에 물었다.

뿌우우우-!

보병의 군홧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숨을 고르는 말들의 발굽이 짧게 자란 들풀을 밟는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힌자예프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족히 이천은 넘어 보이는 군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다. 그러나 군터의 눈에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작군.’

움직이는 적군에게 위압감은 없다. 위압은커녕,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솔직한 감상이 그랬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수만의 군세가 부딪치는 현장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일까? 슬쩍 옆을 보니 할렌 역시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길게 뿔 나팔을 불어재끼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엿보인다. 군터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작아. 너무 작다.’

전장에서 방심은 금물이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김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번에 적장을 친다. 그것으로 이 전쟁은 끝이다.”

“제 눈에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군요.”

“목에 눈 먼 칼이 들어와 박히면 그 생각도 지워질 거다.”

“…송구합니다.”

무뎌진 군터의 경각심을 일깨운 것은 할렌의 가벼운 입이었다. 할렌을 질책하면서 동시에 군터는 흐트러진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할렌에게 쏘아붙인 말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실로 간만의 선봉이다. 타칸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몇 번 부분적으로 선봉에 선일은 있었지만 전군을 대표하여 선봉에 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 선봉이 치고 나가는 양상의 전투도 드물었을 뿐더러 그런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 역할은 모두 아그니스 체스퍼의 것이었다.

‘한 번에 끝낸다.’

군터는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는 힌자예프군을 보며 적장의 위치를 가늠했다. 유난히 두텁게 뭉쳐 있고, 군기가 빼어난 곳. 바로 그곳에 힌자예프의 사령관이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둥! 둥!

양 군대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군터는 쉼 없이 거리를 계산했다. 그러다 힌자예프의 전고가 두 번 울린 한 순간,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자! 가자!”

와아아아아!

한껏 당겨졌던 시위가 풀리고, 화살이 매섭게 하늘을 갈랐다. 그 궤적의 끝에 걸린 것은 군대의 가장 단단한 곳에 움츠리고 있는 적장의 목이었다.

========== 작품 후기 ==========

비축분을 날렸다는 것은... 한 편이 올라갔어야 하는데 두 편이 올라갔다는 뜻이었습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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