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온다. 준비하라.”
“옛.”
이따금씩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은 없다. 살라스는 물론이고 다른 그의 수하들 역시 자신들의 대장의 귀가 짐승보다 더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이 다가온다. 준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말에 오른다.
야산에 자란 제법 높게 자란 나무며 수풀들이 그들의 기척을 가려준다. 재갈 물린 말들이 투레질 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산속의 정적을 깨는 가운데, 초조함이 서서히 늘어질 즈음 저 멀리서 자그마한 소음이 들려왔다.
……!
“정말 성공했군요.”
“힌자예프의 사령관이 그만큼 안일했다는 뜻이겠지.”
위벨은 위글로우의 병사들을 동원해 힌자예프를 왕래하는 상단들을 털게 했다. 마침 위글로우에는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솜씨 좋은 자들이 있었고, 미겔이 이끄는 전직 도적들은 사흘에 걸쳐 힌자예프로 향하는 상행 중 규모 있는 상단들을 덮쳤다. 어중이떠중이 도적들이 아니라 마음먹고 나선 정규병들은 훌륭히 목적을 완수했다.
“하지만 놀랍군요. 어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힌자예프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그곳을 통하는 상인들을 건드린다. 그럼으로써 힌자예프의 사령관을 자극하여 밖으로 병사들을 내게끔 한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다. 그 계산이 조금만 어그러져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위벨님은 힌자예프 사령관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랬겠지.”
피해를 입은 상인들이 일정 이상 몰려가 성토를 하면 힌자예프의 사령관은 필시 병력을 내어 움직일 것이다. 위벨은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이다.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요는 상인들을 움직여 힌자예프 사령관을 압박한다는 것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많은 병력을 움직이기는 힘들다.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수가 더 동원되었을 것이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
군터는 오백이 조금 넘는 병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는 이제껏 양 손으로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를 치러왔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번처럼 기수(旗手)없는 전투는 처음이었다.
‘숨겨야 하는 싸움이라.’
힌자예프의 병력을 최대한 갈아놔야 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은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단 하루, 반나절만이라도 적의 판단과 행동을 늦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만큼 이제부터의 싸움은 중요하면서도 위태롭다는 뜻.
“들어라.”전투를 앞두고 군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경험이 많든 적든 마찬가지다.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누구라도 사선 위에 서게 되는 법.
“며칠 전까지 같은 제국군이었다고 해서 적당히 봐줄 필요는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당 셋씩만 죽여라. 그러면 우리는 승리한다.”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 밑에 그 정도도 못하는 약졸은 없는 것으로 안다.”
용감한 장교 한 명과 군터가 짤막하게 만담을 주고받으니 병사들 사이에서도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보며 옅은 웃음을 지은 군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방향이었다.
*
“달려라! 여기서 붙잡히면 그거야말로 개죽음이다!”
“제일 앞서 가면서 말은 잘하십니다!”
“대장이 앞장서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도망갈 때까지 말입니까?!”
“당연하지! 예외는 없다!”
미겔과 그의 수하는 버럭버럭 고함을 주고받으면서도 발뒤꿈치로 꾸준히 말의 배를 두들겼다. 그런 그들의 뒤편에는 힘겹게 따라오고 있는 병사들(도적으로 위장한)이 있었고, 그보다 더 뒤편에는 그런 그들을 추격하는 힌자예프의 군사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데…괜찮을지 모르겠군요.”
그들이 사전에 예견하고, 또 바랐던 숫자는 대충 천 언저리였다. 그 정도가 큰 무리 없이 잡아낼 수 있는 최대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뒤에 바짝 붙어 쫓아오고 있는 저 병력은 못해도 천으로 보였다. 끄트머리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확인한 것이 그 정도였다.
“저희가 너무 열심히 털어먹은 모양입니다!”
그 말대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소싯적의 버릇이 나와 버렸다. 태평하게 짐수레를 잔뜩 끌고 다니는 상인들을 보니 제대로 절제하지를 못하고 보이는 족족 다 털어버린 것이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열심히 하는 게 좋지 않느냐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서 말이다.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느냐! 아무튼 저곳이다! 저 야산만 지나면 그 괴물양반이 알아서 해주겠지!”
“우리도 반전하여 합류하여야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야지! 단! 그 전에 숨 좀 돌리고!”
인원은 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전원이 기마인 그들이다. 반면에 따라붙고 있는 힌자예프의 병력은 기병과 보병이 섞인, 정석적인 군대. 덕분에 추격 속도는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아슬아슬한 거리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첫째로 그들이 탄 말이 그리 질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적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함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먹이야말로 애간장을 태우는 데는 가장 좋은 미끼가 되니까 말이다.
“대장! 정말 괜찮겠습니까?!”모든 것이 순조롭다. 그런데 그의 수하는 생각보다 더 많은 수의 적 때문에 영 불안했던 모양이다.
“괜찮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
“저 머릿수는 계획에 없던 것이 아닙니까! 그 군터라는 자, 정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솔직히 말만 무성하지, 제대로 실력을 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부사령관 군터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이들은 많다. 이전부터 막시밀리언을 따랐던 병사들은 그렇지 않지만, 위글로우에서 군터를 알게 된 이들은 그가 사령관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만 알뿐 소문만 무성한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위글로우에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수 년 전에 트라벤 가문을 쳤을 때의 단 한 번뿐. 그마저도 제대로 된 활약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렇듯 보여준 것이 없는 데 반해 사령관의 총애는 더없이 두텁고, 경험이 오래 된 병사들은 그를 치켜세우니 위글로우에서 새로이 막시밀리언의 막하에 들게 된 이들은 군터에 대해 호기심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뭣도 없이 거드름만 더럽게 피워댄다며 험담을 속삭이기도 했다.
“믿어라!”의심 가득한 수하의 물음에도 미겔은 별 흔들림이 없었다.
“대장은 그 자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니! 네가 아는 것과 별 다르지 않을 거다!”
“한데 어찌 그리 태연하십니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으니까! 별 다른 수도 없지 않느냐!”
뒤쪽에서 더해지는 고함소리와 말발굽소리 덕분에 주고받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어느덧 목표로 했던 야산을 지나고 있었다.
“따라잡히겠습니다아-!”
비명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미겔이 황급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적들이 어느새 아군의 후미를 거의 다 따라잡아가고 있었다.
‘젠장! 허리를 비우기로 한 건가!’
속도 조절은 일정했다. 그럼에도 적이 따라붙었다는 것은 적들이 속도를 높였다는 뜻이며, 그 말인즉 보병들을 뒤에 떨쳐놓고 기마만 앞으로 나왔다는 것.
‘빌어먹을! 지금이란 말이다!’
들릴 리 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의 원망스런 시선이 시커먼 야산에 가 닿았을 때, 일단의 검은 형체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두두!주변의 소란 탓에 크게 들릴 리 없는 없음에도 미겔의 귀에는 전마들의 말발굽소리가 웅장하고 아름답게 메아리치는 듯했다.
와아아아아-!
야산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마대는 빠르게 돌진해 들어가 적의 벌어진 허리를 완전히 찢어놓았다. 당황한 적이 말머리를 돌리며 응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콰앙!
용감하게 홀로 덤볐던, 걸치고 있는 무장으로 보아 장교가 분명한 힌자예프의 군인이 그의 말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그와 부딪친 기병 세 기도 덩달아 쓰러졌다.
미겔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옆에 있던 그의 수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뒤따르던 힌자예프군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별동대! 우회하여 기사!”
갑자기 터져 나온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모든 소음을 묻어버렸다. 그러자 기병대의 후열에 있던 수십 기마가 옆으로 이탈하는가 싶더니 널찍한 호를 그리며 혼란에 빠진 힌자예프군을 스쳐갔다. 물론 그냥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창칼 대신 활을 들고 있었고, 그들이 쏜 화살은 힌자예프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아악!”
“밀집! 밀집하라!”
뒤떨어진 보병들이 수십 기마에 의해 발이 묶인 사이, 힌자예프의 기병들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기병대에 맞닥뜨려야 했다.
“웬 놈들이냐!”
지휘관으로 보이는 무관이 친위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병력 대부분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그와 그를 따르는 소수 병력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척 보기에도 정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선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기세가 오른 적을 상대로 시간을 벌면서 아군이 혼란에서 벗어나게끔 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것 없는 정석적인 판단은 불행을 야기했다. 우렁찬 그의 외침은 갈 곳을 찾아 헤매고 있던 흉포한 창날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두두두!
그는 거센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해 달려오는 단 한 기의 기마가 보였다. 척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훌륭한 흑색 군마를 탄 거한. 그 덩치와 무장만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네놈이 수괴더냐!”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하들 몇이 앞으로 나아갔다. 범상치 않아 보인다한들, 그래봐야 고작 하나. 만약 저 자가 정말로 이 정체모를 자들의 수괴라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는 생각.
“감히 제국군을 상대로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다니! 정녕 미친놈이…….”
그런 생각은 달려 나간 수하 한 명의 몸뚱이가 반으로 잘리고, 또 한 명의 양팔이 잘리고, 또 한 명의 머리가 으깨지는 것을 본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한 호흡, 내지는 한 호흡하고 반 정도.
그 짧은 순간에 앞으로 나갔던 셋이 모두 당했다. 그 와중에 적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으며,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익!”
무관은 들고 있던 창을 내질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휘릭!
그가 창을 내질렀을 때, 적도 똑같이 창을 내질렀다. 그는 적의 창이 기이하게 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창날이 창의 삼분지 일에서 반 정도는 되는 것 같은, 일반적인 창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뵈는 창.
그 창은 일직선으로 뻗어오다가 한 순간 뱀처럼 휘었다. 동시에 무관은 목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쿵!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어째서 자신의 눈에 흙바닥이 보이는지를 이해하려 애썼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광경만이 빠르게 점멸하며 흐릿해져갔다.
========== 작품 후기 ==========
어제는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덕분에 어렵사리 모은 비축분을 날려버렸습니다. 비통함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