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18화 (218/1,064)

<-- 2부 -->

눈 가득 담기는 크고 작은 건물들의 군락은 바닷가의 모래알갱이처럼 무수히 깔려있다. 이제 잠에 들려하는 태양이 그 무수한 석조 건물들의 숲에 고르게 비친다.

온 세상이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것 같은 모습. 그 황홀함이야말로 제국이 이룬 번영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표상.

“지겹구나. 당신은 그렇지 않소? 아를렌.”

하지만 그는, 제국이 숭상하는 군주 키리스트는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광경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이 위대한 도시가 보잘 것 없던 시절을 기억했다. 세상을 호령하는 제국이 아닌, 흔하디흔한 일개 도시국가였던 시절. 그때부터 그는 훗날 제국의 황제가 되는 사내를 따라 이 위대한 도시를, 위대한 제국을 일구었다.

빈약하고 낡은 성벽이 무너지고 새로이 지어지던 성벽. 흙바닥에 깔리던 대로. 하루에도 수십 개 씩 들어서던 건물들.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오른 첨탑 위에서, 황제는 번영하는 그의 나라를 눈으로 지켜보며 기뻐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신왕(神王)이니 뭐니 하는 깜찍한 칭호를 붙여 부르던 시절에 말이다.

“인간은 약하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룬 것 역시도…….”

세상의 만물은 유한하기에 가치가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황홀함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면 결국은 그 황홀한 빛을 잃고 평범함으로, 익숙함으로 전락하고 마는 법.

“나를 저주하시오, 마를렌?”

영원을 약속하던 달콤한 말은 빛바랜 그림처럼 초라해진다. 감미롭던 축복은 혐오스런 저주가 되고, 고결했던 사내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괴물이 되었다.

“전하.”

키리스트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다. 그는 언제부터 저기서 저런 자세로 서 있었던 것일까?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꽤 오래된 것은 분명하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감각이 그의 걸음소리를 포착한 것은 분명 저 하늘 위의 해가 아래로 내려오기 전이었으니까 말이다.

“알려주십시오. 언약비(言約碑)는 어디에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피워 올리는 불꽃이냐?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모두 다 타 없어질 수도 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생일대의 모험. 허나 얻을 수만 있다면 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은 이제껏 살아온 삶보다 화려하게 타오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것도 좋지.”

키리스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것은 비웃는 듯 서늘하고 가느다란 미소. 그러나 그마저도 영롱한 보석이 내뿜는 빛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여인이었다면 누구라도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피하고, 사내라면 입을 벌려 감탄할 만큼 매혹적인 웃음이다.

“부디 알려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선황폐하를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봐 오신 분이 아닙니까.”

노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저 아름다운 꽃에 솟아난 치명적인 독가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뭣 모르고 손을 뻗었다가는 웃는 채로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는 그 어떤 정적을 상대할 때보다 더 마음을 굳게 다잡은 채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새로이 황좌에 앉은 자가 없거늘 선황이라니. 게다가 내 목줄을 내어달라는 이야기를 쉽게도 하는구나. 뻔뻔하기 그지없다.”

“전하께서 황도의 소란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 뿐만은 아니지.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 같은 망령들에게 관심 두지 말고 너희의 싸움에나 집중하는 것이 어떠냐.”“승리의 열쇠가 바로 코앞에 있음을 알고 있거늘 어찌 복잡하고 험난한 싸움에 마음을 두겠습니까.”“코앞에 있다? 흐흐흐.”

“…아닙니까?”

노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당혹, 의심…….

키리스트는 그 급격하고도 다채로운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물어가는 황도 리비암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너희가 안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미쳐 있었다.”

“으음.”

승하한 황제에 대해 험담을 입에 담음에도 노인은 나직이 신음하기만 할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가 먼저 꺼낼 수는 없겠지만, 군주가 먼저 입에 담는다면 뺄 필요는 없다. 아니, 빼서도 안 된다. 지금 그가 비위를 맞춰야 할 것은 이미 죽어 시신조차 남지 않은 황제가 아니라 멀쩡히 살아 숨 쉬는 눈앞의 미치광이 군주이므로.

“젊은 왕이었던 시절의 그는 분명 꽤나 괜찮은 영걸이었지. 용감하고, 현명한 구석도 있었어. 왕으로서 좋은 자질을 타고난 자였으니,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는 괜찮은 왕으로 사서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내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했다. 그것이 그가 망가진 이유야.”

“선황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 위대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국은 위대하지 않다. 위대하다는 말은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니야. 이 거대한 나라는 거대한 허상에 불과하다. 무모한 탐욕과 아집으로 쌓아올린 불완전한 모래성일 뿐.”

“그 모래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과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습니까. 군주께서도 위대한 정복 전쟁을 이끈 여섯 분 중 하나가 아니십니까.”

노인의 목소리에 슬쩍 날이 섰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국을 폄하하는 언사에는 심기가 크게 뒤틀린 모양이었다.“그래. 그랬지.”

“위대한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값싼 자부심이군. 역시 의미 없다.”

“군주시여.”

“허망한 세월이었지. 결국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목표였고 끝낼 수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황제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불그스름한 빛도 이제는 사라져갔다. 이제 잠시 후면 언제 하늘 위에 빛이 있었냐는 듯 캄캄한 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황도의 화려한 밤거리는 불을 밝히겠지. 언제나 그렇듯, 제국의 심장 리비암은 잠들지 않는다.

꺼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던 키리스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언약비는 하나 남은 목줄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질긴 굴레지.”

노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어디에 묶여있든, 누가 손에 쥐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너희를 도와야 하느냐?”“맹약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

“호오. 크게 던지는구나.”

“새로운 황제께서 즉위하신다면 키리스트 전하의 자유를 약속드리지요.”

“나머지 다섯은 계속 부리고 말이냐?”

“…….”

“그거 참 끌리는군. 현재로서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어째서 현실성이 없다 하십니까. 전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언약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언약비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웃음을 머금은 군주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무언가,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황제가 군주와 맺은 맹약이 담겨있다는 신성한 석비. 그것만 있으면 군주들을 부릴 수 있다고 알고 있겠지. 아니냐?”

“…틀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르지. 무엇이 다른가 하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지만, 우선 언약비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알려주마.”

“하나가 아니다……? 그 말씀은.”

“여섯 개다. 그마저도 의심 많은 황제는 한 번에 보관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 누구보다 오랫동안 황제를 가까이서 봐온 나조차 알 수 없도록 은밀하게 숨겨놓았지.”

“으음.”

“그뿐이랴. 언약비는 맹약의 당사자인 나조차 그 존재를 느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봉인…혹은 은폐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다. 황제가 제대로 마음먹고 숨겨놓았다는 뜻이지. 과연 너희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노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오늘 눈앞의 군주와 결판을 낼 심정으로 그를 찾은 것이었다. 헌데 바라던 대로 답을 들었으나 그 답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암담한 얼굴을 한 채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키리스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저물어가는 황도를 내려다보았다.

“주군.”

갑옷을 입은 무사가 계단을 올라왔다.

“37황자가 죽었습니다. 사인은 독살이나, 아직까지는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변변찮은 놈이군. 그래서인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무사는 내심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성에 머무는 이들치고 황가의 족보를 꿰고 있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러나 그의 주군만큼은 예외다. 그는 황도에만 수십이 넘어가는 황자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37황자는 6황자의 친동생이었습니다. 다시금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별 볼 일 없던 한량이 그래도 마지막에 의미 있는 일을 하나 하고 가는구나.”

황자들 간의 크고 작은 다툼은 이미 도시 안팎에서 몇 차례나 일어났었다.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은 까닭은 남 좋은 일 시켜주기 싫어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황도 심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의 주군을 의식해서이리라.

“우습군요. 황궁 앞에서는 감히 싸울 엄두도 못내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신경전만 펼치고 있는 꼴이라니.”

신경전이라 폄하하지만 이미 수천, 수만의 백성과 군사가 상했다. 내3주는 비교적 잠잠한 편이지만, 외6주에서는 회전까지 수차례 벌어졌다. 일찍이 정복전쟁 초기에 영토를 크게 확장해나가던 시기 이후로는 황도 부근에서 이만한 피가 흐른 일이 없었다.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먼저 나섰다가 몰매를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게지.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았다.”

*

“들어라 위글로우의 시민들이여! 현재, 위글로우는 전에 없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의 군대는 처절히 패퇴했고, 그들을 무너뜨린 타칸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다! 위글로우뿐 아니라 바크렌 전체가 누란의 위기에 몰려있다!”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핏대 선 목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장 내일의 일을 장담할 수가 없는 판국이다! 위글로우의 사령관으로서, 그대들의 보호자로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부끄럽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위글로우의 시민들이여! 이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힘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시민들의 눈이 단상 위에 선 막시밀리언에게 모였다.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무수한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냉정히 바라봐야 한다! 위글로우의 시민들이여! 제국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비통하지만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제국의 관리이기 이전에 그대들 위글로우 시민들을 이끌고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진 사령관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말은 사실 궤변이었다. 제국의 관리가 아니라면 그가 가진 의무와 권리 역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시민들 중 그러한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뿐이었다.

“제국은 우리를 버렸다! 그들은 위글로우를 버렸으며 이 땅을, 바크렌을 버렸다!”

막시밀리언의 고백을 빙자한 발언은 이제 더 이상 첨탑 위에 제국기를 걸지 않으리라는 선언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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