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아뢰기 송구스럽습니다만…….”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리 있겠느냐.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
살라스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그의 책임이겠는가. 천인대 인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오백이다. 그 오백이 전장에 나갔다가 거의 10분지 1로 줄어서 돌아왔다. 치열한 전장이었고, 전투였지만 위글로우에서 머물던 이들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정작 전장에 다녀온 당사자들은 신경을 안 쓰더라도 말이다.
군터는 그런 병사들의 분위기를 잘 알았다. 그는 늘 휘하 군졸들을 살폈다. 좋은 상관은 아니더라도, 개 같은 상관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받아라.”
“이게 뭡니까?”
군터가 내놓은 주머니 두 개를 보고 살라스가 물었다.
“하나는 나와 함께 돌아온 녀석들과…돌아오지 못한 녀석들의 유족들에게. 또 하나는 나머지 녀석들에게 지급해라.”
“사령관께서 내려주신 겁니까?”
“어디서 난 것이든 상관없지 않으냐.”
“대장님…….”
말을 돌린다. 결국 사비라는 소리. 살라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사령관께서 내게 내려주신 것을 다시 나누는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사령관께서 내려주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말은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기 몫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부족함은 알아도 만족함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등한 관계도 아닌, 아랫사람인 부하들과?
“…병사들이 대장님의 은혜를 칭송할 것입니다.”
“필요 없다. 돈으로 사는 칭송 따위.”
군터가 낯간지럽다는 듯 손짓을 하며 물리치니 살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자신의 집무실로 온 살라스는 곧장 다른 백인장들을 불러 모았다.
“무슨 일인가?”
“대장님께서 내리시는 포상이다. 병사들에게 돌려.”
“포상? 뭘 했다고 포상을?”
“밑에서 볼멘소리가 들리는 걸 알고 계신다.”
“으음.”
“대장님의 사비로 나가는 포상금이라는 걸 넌지시 알게 해.”
“끄응. 대장님께 면목이 없군.”
군터 천인대는 위글로우의 최정예 군이다. 그들은 평소에도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며, 철저한 군율 아래서 생활한다. 물론 그만큼 대우도 좋은 편이다. 당장 기본적인 봉급도 미트라스 천인대보다 높은 편이니, 결코 병사들이 섭섭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인원의 반절이 날아가고, 바로 옆에서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을 뿐이다.
“이번뿐이다. 다시 이런 잡스런 소리가 대장님께 들리게 해서는 안 돼.”
살라스가 매서운 눈으로 동료 백인장들을 훑었다.
“커험! 우리라고 뭐 별 다른 수가 있겠나. 병사들의 마음이 그러한 것을.”
“천인대를 살피는 것은 대장님의 일이지만, 백인대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내 말, 무슨 말인지 다들 알 거라고 믿는다.”
살라스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으니 다른 이들도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감았다.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멀뚱멀뚱하게 있는 이는 할렌이 유일했다.
얼마 후. 자그마한 주머니를 나눠 가진 백인장들이 자리를 뜨고, 살라스는 할렌과 단 둘이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이지 한심하군. 자네에게도 면목이 없다.”“살라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지요. 부하관리 못한 것은 그 치들 아닙니까.”
“정예들이 다 가고, 변변찮은 자들만 대거 남았어. 골치가 아프군.”
군터 천인대를 이루는 주축은 누가 뭐래도 아쿼러즈들이었다. 그들은 군터 천인대에서 가장 많은 수였고, 전력 역시 가장 강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그 수가 크게 줄어, 이제는 백 명이 간신히 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아쿼러즈들과는 상황이 다르니 말입니다.”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군.”
아쿼러즈들은 제국에서 이방인이다. 그것도 천시, 혹은 멸시를 당하는 이방인이다. 처한 상황이 열악하니 자그마한 것에도 만족할 줄을 안다. 하지만 제국인들은 다르다. 특히 막시밀리언 천인대에 속했던 병사들은 다소 콧대가 높은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지금은 군터 천인대로서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그 기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트라스 천인대건, 치안대 놈들이건…질 안 좋은 것들과 매일 보고 있으니 점점 물드는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어쩌겠나?”
도적이며 온갖 비루한 출신들로 구성된 치안대나, 위글로우 토박이로 구성되어 한껏 군기가 빠진 미트라스 천인대나 마음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그들과 날 세우는 일은 없도록 하게.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크게 고생하다 왔으니 당분간은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예. 안 그래도 꽤 긴 휴가를 받았습니다. 한동안은 아내 얼굴도 질릴 때까지 보고, 아들놈과도 놀아줄 생각입니다.”
“가족과의 시간이라. 좋지. 부럽군.”
“살라스님께서는 왜 가정을 꾸리지 않으십니까? 살라스님 정도면 좋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무슨. 그렇지 않네.”
살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렌은 짓궂게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살라스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끊으니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못내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주제가 아니면 언제 또 살라스를 놀릴 기회가 있겠는가.
*
바람이 인다. 가느다란 미풍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의 거센 바람이다.
군터는 칸젤이 아닌 두께가 그의 팔뚝에 근접하는 철봉(鐵棒)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무게가 어지간한 성인에 버금가는 물건을 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매섭게 휘둘렀다. 언뜻 보면 홀로 난리를 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모페이브의 눈에는 군터를 둘러싼 얼굴 없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 한 채 덤벼드는 그들은 두꺼운 철봉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부서지고, 나가떨어졌다.
쿵!
마지막 적까지 쓰러뜨리고 나서야 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군터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것으로 땅을 짚으니 연무장 바닥이 묵직한 비명을 질렀다.
“놀랍군요. 이제 대장님의 육신은 명백히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신 것 같습니다.”
성인 한 사람 무게에 달할 정도의 무거운 철봉이라고 해도 단순히 들기만 하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자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들고 일반 창 휘두르듯 장시간 동안 휘둘러댈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이 위글로우에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서너 번만 휘둘러도 팔이나 어깨가 망가져버릴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대체 무엇을 얻으신 겁니까?”
“수없이 싸웠다.”
치열한 사투의 연속이었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강적과도 몇 번을 싸웠고, 끝내 숨통을 끊었다. 군터는 지지부진하던 그의 육신이 다시금 진화한 것이 그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모페이브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는 특히나 군터가 맞서 싸웠던 강적이 그 ‘푸른 사자’였다는 것을 알자 탄식을 뱉었다.
“푸른 사자 포라칸. 그 자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가 군주와 맞서 싸우고 푸른 사자라는 무명(武名)을 얻기 전부터 알았지요.”
“사교도였을 때 말인가?”“예. 그 자는 초원의 대전사였고, 대족장 바로 밑의 2인자였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단한 자라는 이야기는 귀가 따갑게 들었었습니다.”
“대단한 자였다. 여러모로 운이 따랐지. 지금 다시 그 자와 붙는다고 해도 승리할 것이라 자신할 수 없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 자는 패하여 죽었고, 대장님께서는 승리하여 살아남으셨지요.”
“…그래.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푸른 사자는 정말 끔찍한 상대였다. 일당십은 너끈히 해내는 수인병, 바르바피들을 이끌고 돌진하던 그의 군세는 그야말로 항거불가였다. 그가 무리하여 추격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과연 그 자를 잡을 수 있었겠는가. 자문해보지만 역시 무리라는 답이 떠올랐다.
군인으로서, 그리고 무인으로서 그는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모페이브의 말처럼 그는 끝내 패하여 죽었고, 자신은 승리하여 살아남았다. 그 차이는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닌, 그저 한 순간의 판단과 실수로 인한 것.
‘전장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마지막까지 아그니스 체스퍼를 향해 달려들던 그를 기억한다.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 그는 억울해했을까? 후회했을까?
‘나는 살았고 너는 죽었다.’
마지막 하나. 끝까지 남아있던 그림자가 흐릿해진다.
비 오듯 땀을 흘렸음에도 그의 몸에는 여전히 힘이 남았다. 멈췄던 봉이 다시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이겼고, 너는 졌다.’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종횡무진 하는 푸른 사자와 바르바피들을 보며 군터는 여러 번 무력감을 느꼈었다. 회전을 치를 당시에는 마주치는 일이 적었지만, 추격이 따라붙고 뿌리치는 와중에서는 몇 번이고 부딪쳤었다. 그때마다 할 수 있었던 일은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친 횟수만 한 손으로 헤아릴 수 없다.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어찌 패배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순간에 끝내 푸른 사자의 숨통을 끊었을 때조차 그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와의 협공이 아니었다면, 그와 싸우고 있을 때 먹인 기습공격이 아니었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미련은 모페이브의 말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그는 살아남았고, 푸른 사자는 죽었다.
푸른 사자의 머리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전리품이 되었으며, 그의 육신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들판에 버려졌다. 지금쯤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겠지.
‘사라져라.’
철봉이 일으킨 바람이 그림자를 걷어낸다. 군터는 이전보다 확연히 강해진 육신의 힘을 느끼며 연무장 바닥을 밟았다. 철봉을 휘두를 때와 비슷한 강풍이 그의 내딛은 발아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
“아버지. 지금부터 할 테니까 잘 봐 주세요?”
“그래. 보고 있다.”
앙증맞은 손으로 자그마한 목검을 움켜쥔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긋는다.
“호오.”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정말로 꽤나 깔끔한 베기였다. 살라스로부터 배웠다더니, 정말로 제대로 배운 모양이다.
“생각보다 잘하죠?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그 좋아하는 아침잠마저 포기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래. 솔직히 조금 놀랐어.”
베기뿐만이 아니다. 움직임을 이어가는 보폭도 일정하니, 짧은 시간 동안에 쉽게 익힐 만한 수준은 벗어났다. 그것만 보아도 보리스가 얼마만큼 노력했는지가 보였다.
“검술은 어느 정도 기본을 뗐다고 봐도 되겠군. 그런데…보리스는 계속 무술을 익힐 생각인 건가?”
“네. 그런 것 같아요. 시키지 않아도 그리 열심이니. 당신도 그걸 바라지 않았어요?”
“음.”
그야 그렇다. 그러나 미래를 논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생각하기도 했고,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말하기도 전에 본인이 저렇게 열심이라면 그로서는 기꺼울 따름이다.
보리스는 집중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부모가 나누는 이야기마저 들리지 않는지,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목검을 휘두른다.
‘자질도 나쁘지 않다.’
그가 전장에 나가 있었던 시간은 제대로 무술을 연마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보리스는 그럭저럭 검술의 기본을 닦았다. 그것은 노력도 노력이지만 재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성취.
“하아…하아……. 어, 어땠어요 아버지?”
“훌륭했다. 기대 이상이구나.”
살짝 불안한 기색이 감돌던 얼굴이 화색을 띤다. 군터는 그런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