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15화 (215/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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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는 눈물을 흘리는 모자(母子)와 해후했다. 벨리사는 그의 품에서, 보리스는 그의 허리춤에 눈물을 적셨다.

그들을 그저 말없이 안아주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슴이 울리기는 했지만 눈물만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엉망이 된 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새 훈장이 느셨습니다.”

“살라스.”

위글로우에 군터를 대신해 남아있었던 살라스는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군터처럼 얼굴에 ‘훈장’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처럼 ‘그새’ 한 일 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 얼굴에 그늘이 지고 피부도 푸석해졌다. 그간 고생이 많았음을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열 중 여덟, 아홉이 죽었다.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하고 온 놈들도 많아.”

“군인의 삶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평온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고, 얌전한 죽음을 맞기도 더욱 쉽지 않지요.”

“합동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사령관께서 도시 중앙 광장을 내어주기로 하셨지. 오늘 밤이다.”

“먼저 간 자들이 기뻐하겠군요. 준비하겠습니다.”

그날 밤. 위글로우의 중앙 광장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격식 있는 엄숙한 장례식이 열렸다. 막시밀리언은 신관까지 불러 전사한 군터 천인대 병사들의 장례 의식을 주관케 했다.

눈을 감고 경건하게 기도문을 읊는 신관을 보면서 군터는 내심 헛웃음 지었다.

저 신관은 알까? 이제 곧 이 도시는 공개적으로 제국을 등질 것이고, 신전에 머무는 성직자들은 모두 쫓겨나리라는 것을?

하기야 어디 저 신관뿐이겠는가. 지금 광장에 나와 있는 자들을 포함해 위글로우의 시민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들은 앞으로 며칠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미리 안다고 해도 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거나, 혹은 그들의 미래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껏 쌓은 장작을 태우며 불은 어둠을 환히 밝혔다. 피어오른 연기는 어두운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올라갔다. 저 안에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은 없겠지만, 군터는 까만 연기 속에서 기억나는 얼굴들을 떠올렸다.

“…….”

이끌었던 자로서, 어찌 보면 그들을 죽게 한 자로서 어찌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살라스의 말처럼 군인의 숙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제고, 그 또한 먼저 간 자들을 따라가리라.

‘편히 잠들어라.’

허벅지를 꼭 끌어안는 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군터는 눈을 감았다.

*

전장에서 막 돌아온 참이지만 휴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에 바크렌의 정세가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급박한 정세 속에서 위글로우는, 막시밀리언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벌이는 중이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끝내 아그니스 체스퍼를 놓쳤다. 패잔병이라고는 해도 그 수가 수천. 거기에 막판에는 푸른 사자까지 잡아내면서 체면치레까지 했으니 기세도 나쁘지 않을 터. 일단은 그들의 움직임이 가장 큰 변수다.”

휘하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막시밀리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군터, 위벨, 미트라스, 미겔 등을 비롯해 기존에 막시밀리언을 따르던 이들 전부였다. 애초 막시밀리언은 수하를 들일 때 우직하게 제국에 충성하는 자들은 배제하였기에 그들은 제국에서 베이고르로 변절하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문제로군요. 병량이 부족할 테니 멀리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전시 상황이니만큼 급한 대로 징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병량의 제약은 덜겠지요.”

그들에게 있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패잔병들이었다. 그들이 내일이나, 아니면 오늘 당장 베이고르의 깃발을 바꿔단다고 해도 아그니스 체스퍼의 패잔병들이 들이치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니까 말이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미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도시며 요새들이 한 둘이 아닌데, 아그니스 체스퍼가 한가하게 이곳까지 내려올 이유가 없지요. 그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아니라 베이고르와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이 해야 할 겁니다.”

몇몇 이들이 불안한 목소리를 내자 위벨이 나서서 그러한 우려들을 일축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막시밀리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아그니스 체스퍼와 잔존병력들이 아무래도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보다 희소식이 있다네. 베이고르와 파비우스 리에론이 이끄는 군대가 본다인의 6천 군사를 격퇴했다는군. 피해도 거의 없는 수준의 대승이었다 하네.”“오오!”

“이렇게 되면 이제 타라냐드만 신경 쓰면 되겠군요.”

“아니. 혹시 모르니 리바스트라도 예의주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거운 이야기 다음에는 바로 희소식이 나왔다. 분위기 또한 화제를 따라 움직였다.

“본다인의 군대는…모르고 당한 것입니까?”

군터의 물음에 막시밀리언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맞네. 파비우스 리에론은 제국군의 깃발을 달고 그들과 합류했지. 그들이 합류한 그날 밤에 베이고르가 야습을 가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바크렌의 최고 명문이자 군부의 수장인 리에론 가문이 제국을 등질 거라고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는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소식이 퍼지기 전까지, 파비우스 리에론과 그의 군대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다.

“타라냐드의 원군도 곧 당도한다 하네. 그들까지 쓸어버릴 계획인 것 같은데…잘 됐으면 좋겠군.”

드러난 상황만 놓고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타라냐드의 원군 또한 곧 격퇴될 것을 낙관적으로 이야기 했다.

그러나 군터는 그 일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아그니스 체스퍼가 파비우스 리에론의 변절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막시밀리언의 서신을 군터 자신이 직접 그에게 보여주었거늘.

전날의 깊은 대화에서도 군터는 그 사실만큼은 막시밀리언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막시밀리언은 그저 야밤을 틈타 탈영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면, 막시밀리언은 그가 배신했다 여길지도 모른다. 군터 역시 조금은 마음 한구석에 가책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털어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베이고르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파비우스 리에론이 아니라 막시밀리언이었다면 당연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그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옹졸한 마음일지는 모르나, 군터는 파비우스 리에론도 베이고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그들과 한패가 되어버렸지만, 그렇다 해도 내키지 않는 건 내키지 않는 거다. 특히나 베이고르 같은 경우에는 먼젓번의 전쟁 당시 말레이드에서 치열하게 맞붙은 경험도 있지 않은가. 그들이 곤란을 겪는 것은 솔직히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전쟁은 베이고르와 타칸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타라냐드와 리바스트라는 바크렌으로 원군을 보낸다 해도 작정하고 개입하지는 못한다. 전날 막시밀리언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현시점, 제국의 상황이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두 주의 권력자들은 스스로의 보신에만 열중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바크렌의 상황 따위는 강 건너 불구경에 지나지 않는다. 금번의 원군 파병 역시도 결국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다. 바크렌에 도사린 적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날카로운 칼을 빼드는 대신 두꺼운 방패를 치켜들게 될 것이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아무리 동분서주한들, 바크렌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단지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베이고르와 파비우스 리에론, 그리고 타칸연합국이 얼마나 더 피를 흘리게 되느냐가 문제일 뿐.

그리고 그런 문제 따위, 군터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아그니스 체스퍼라는 좋은 군인이 허망하게 죽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럼…두 가문에 대한 처우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초 계획대로 간다.”

화제가 바뀌었다. 위벨이 말을 꺼냈고 막시밀리언은 담담히 대꾸했다.

“이로써 구 위글로우 3대 가문이 모두 멸족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군요. 그래도 오랫동안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기분이 묘합니다.”

미트라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서 자네는 빼주지.”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저야 그 작자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단지 속이 시원하면서도 뭐랄까, 허무하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과거 위글로우의 3대 가문이라 일컬어지던 이들 중 트라벤 가문은 이미 멸족 당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두 가문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딱히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다. 한때 막시밀리언과 대립각을 세웠던 그들은 막시밀리언이 리에론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그의 아래로 들어왔고, 나름대로 모나지 않게 처신해왔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과거 베이고르의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베이고르를 버리고 제국으로 돌아선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후에 잡음이 일어날 게 분명하니,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정리해두는 수밖에.”

새로이 베이고르에 몸담게 되는 막시밀리언이다. 베이고르의 왕이 얼마나 자비심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령 그가 어느 정도 후한 자라고 해도 과거의 배신자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 없이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비록 사령관인 막시밀리언의 밑에 몸담은 자들이기는 하지만, 막시밀리언으로서는 그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는 최대한 사전에 배제하고 싶었다.

“두 가문을 멸하고 얻게 될 재물에 대해서는…….”

누군가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슬쩍 말을 꺼낸 자에게 시선을 준 막시밀리언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반은 관금(官金)으로. 그러고 나서 남은 것들 중 반은 시민들을 달래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그동안 고생한 이들에 대한 포상으로 내도록 할 것이다.”

질문한 자는 물론, 앉은 자들 중 대다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4분지 1이라지만, 두 가문이 가진 재물이 얼마나 막대한지 아는 그들이다. 벌써부터 입 꼬리가 씰룩이고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장내에 흥분이 감도는 와중에, 이제껏 잠잠히 있던 미겔이 입을 열었다.

“내일입니까?”

“늦출 이유가 없지. 그 일은 미겔 자네와 미트라스가 해주어야겠다.”

“맡겨주십시오.”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을 불린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며 군례를 취했다.

*

“아아. 이게 뭔 꼴이냐.”

“뭐가?”

“미트라스 천인대랑 치안대 녀석들은 신나게 재미보고 있을 거 아냐. 그에 비해서 우리는 이게 뭐냐고.”

오늘. 미트라스 천인대와 치안대의 병력이 일시에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 가문을 들이쳤다. 두 가문은 이렇다 할 반항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들에게 쓰인 죄목은 사령관 암살 미수.

두 가문은 극렬하게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직계 혈족은 모두 목이 베였고 방계들은 노예가 되어 작업장으로 보내졌다.

두 가문의 재물은 모두 몰수 되어 사령관저로 옮겨졌다. 막시밀리언은 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중 절반을 관금으로, 나머지 절반을 시민들과 수하들에게 풀었다.

“얼마나 챙겼을까 그 자식들?”

하지만 설마하니 모든 재물이 그렇게 투명하게 옮겨갔겠는가. 두 가문을 쳤던 병사들도 얼마씩은 현장에서 몰래몰래 챙겼을 것이다.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의 입이 튀어나온 이유다.

“우리 대장님은 확실히 대단한 분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어이, 어이. 너무 나가는 거 아냐?”

“그렇잖아. 항상 궂은일은 우리 몫인데, 그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없잖아. 이번에 대장님을 따라나섰던 녀석들을 봐. 오백 명이 갔는데 돌아온 건 70명이 채 안 되잖아.”

“우리는 군인이야. 용병이 아니라고.”

“알지. 알아. 하지만 다른 녀석들이 한 것도 없이 계집 끼고 술 마시고 하는 걸 보면 좀…그래.”

“투덜거리는 건 지금 한 걸로 끝내. 괜히 높으신 분들 귀에 들어가면 큰 일 치른다고.”

“그래. 알았어.”

========== 작품 후기 ==========

2107년의 마지막 달. 12월의 시작입니다. 모두 건강히 한 해를 마무리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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