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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13화 (213/1,064)

<-- 2부 -->

콰앙!

‘아직이다. 이놈의 목만 베면 모든 것이 해결 된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포라칸은 포기하지 않았다.

눈앞의 거인, 아그니스 체스퍼만 죽이면 꽉 막힌 길이 열린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돌아간 전사들이 합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를 잃은 제국군은 저항하지 못하고 짓밟히리라. 이전번의 전투처럼.

콰앙!

발톱에 닿는 감각이 묵직하다.

몇 차례나 겪어 보았기에 저 술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몸이 커지고, 단단해지며, 무거워지며, 그에 걸맞은 힘까지 생긴다. 그러나 강력한 만큼 오래 가지는 못하고, 또한 강력하다한들 변이한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수준이다.

“쓰러져라!”

있는 힘껏 휘두른 발톱에 거인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큼지막한 양 손으로 쥔 철창(鐵槍)은 흉하게 찌그러졌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너와 네 병사들 모두, 여기서 끝장을 내주마.”

“무슨 개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컷 떠들어라. 어차피 잠시 후면 떠들고 싶어도 할 수 없을 테니!”

서로의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두 사람은 맹렬히 부딪쳤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점차 몸에 쌓여갔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크허엉!

예리한 발톱이 기어이 두터운 창대를 잘랐다. 발톱은 그러고서도 힘을 잃지 않고 거인이 된 아그니스 체스퍼의 가슴에도 한 줄기 혈선을 남겼다.

“흐아압!”

제법 굵은 핏줄기가 튀었으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아랑곳 않고 주먹을 날렸다. 반 토막 난 창대를 움켜쥔 채 날린 주먹이 포라칸의 얼굴을 강타했다. 포라칸의 거대한 몸이 크게 나가떨어졌다.

“으음!”

아그니스 체스퍼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굵은 핏물이 흘렀다.

통짜 쇠로 된 두꺼운 창대를 가르고도 이렇게까지 깊은 상처를 냈다.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금속처럼 단단해진 그의 몸이라 해도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일어나라 비루먹은 짐승 녀석. 뼈마디를 모조리 분질러주마.”

그는 잘린 창을 양 손으로 단봉처럼 고쳐 쥐었다. 본래 창의 길이가 어지간히도 길었던지라 그렇게 쥐어도 짧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크르르르…….

몸을 일으키는 포라칸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짙푸른 빛이 일렁이는 눈에는 한층 더 진해진 살기가 번뜩였다.

‘이성이 날아간 건가.’

이제는 아그니스 체스퍼도 이 수인병이라는 놈들에 대해 알 만큼은 알았다. 수인이 된 녀석들은 어지간한 강체술보다 월등한 효과를 내지만, 그 대가로 이성이 흐려진다. 저 푸른 사자는 확실히 특별하지만, 그런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거친 와중에도 날이 서 있던 기세가 그저 사납게 바뀌었으니, 붙들고 있던 이성이 날아갔다는 뜻.

크허엉!

잠시 웅크리는 듯싶더니 네 발로 땅을 찍고 달려든다. 네 발 짐승이 사냥감에게 달려드는 모습, 그 자체다. 이성은 없고 야성(野性)만이 역동한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마른침을 삼키며 양 손에 쥔 반 토막 난 창에 힘을 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멀리서 빛나던 푸른 안광이 숨 한 번 채 다 내쉬기도 전에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히히힝!그 순간, 거대한 형체가 포라칸을 옆에서 들이받았다. 길게 내뻗은 창은 거대한 괴인의 옆구리에 틀어박혔고, 포라칸은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며 쭉쭉 밀려났다.

“군터!”

군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에 힘을 줬다.

한 쪽 눈밖에 없는 포라칸이다. 완벽하게 사각에서 달려와 그대로 들이받았다. 칸젤의 예리한 창극은 단단한 갑각을 어렵지 않게 꿰뚫었다. 기습이 성공하는 순간, 이 한 방으로 끝장을 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런데 생각보다 반발이 심하다. 단단한 쇠붙이도 잘라낼 수 있는 칸젤이건만 피륙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한다. 군터는 이를 악 물었다.

포라칸의 거대한 몸이 번쩍 들렸다. 어지간한 장정의 허리보다 두꺼운 팔이 쭉 뻗어왔다.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긋는다. 칸젤의 길이가 조금만 더 짧았더라면 그대로 얼굴을 할퀴었으리라.

“흐아앗!”

크게 휘두른 칸젤에서 포라칸이 쑥 빠져나갔다. 두어 번의 굉음을 내며 땅을 구른 그가 곧장 몸을 일으키는데, 기다리고 있던 아그니스 체스퍼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막 일어난 포라칸을 어깨로 들이 받았다.

군터와 아그니스 체스퍼는 한 번 탄 기세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포라칸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으나 군터에게 허용한 옆구리의 부상이 컸다. 그는 이따금씩 비틀거리며 움직임이 멎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는 작지 않은 상처가 늘어갔다.

크르르…….

굶주린 맹수처럼 흉포하게 빛나던 눈도 점차 빛을 잃었다. 포라칸은 크게 헤집어진 옆구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지독한 녀석.”

아그니스 체스퍼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가 쥐고 있던 어느새 창대들은 더 휘두를 수 없을 만큼 상해 내던진 지 오래였다. 그는 조금 전부터 맨주먹으로 박투를 벌이던 차였다.

그의 돌덩이 같은 주먹은 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 피의 대부분을 제공한 포라칸은 처참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몰골을 하고서도 여전히 두 다리를 굽히지 않고 있다.

끝났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포라칸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그는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수차례씩이나 말이다.

독기와 근성이라면 이골이 난 아그니스 체스퍼였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포라칸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찌푸린 얼굴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발악도 여기까지다. 그만 포기하지 그러나.”

군터 역시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전세가 기울었는데도 악을 쓰며 버티는 포라칸이 대단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은 항전이 아니다. 그저 의미 없는 발악일 뿐.

“흐…하하. 답답한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피 끓는 목소리에 힘은 없다. 그의 말은 항변이 아닌 조롱이다.

군터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알았다. 지금 싸우고 있는 적에게는 이미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은 없다. 그는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분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에게 좌절을 안긴 상대에 대한.

“딱하군.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질 낮은 도발뿐이라니.”

“…….”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토록 무리한 추격이라니. 전공에 눈이 멀었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로…뭔가에 홀렸던 것일지도.”

그의 눈에, 꺼졌던 불길이 다시금 일렁였다.

군터는 불안해하는 내쉬를 쓰다듬으며 포라칸을 응시했다.

“너 때문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네게 눈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핑계는 댈 수 없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은 나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는 옆구리에서 손을 뗐다. 큼직한 상처에서는 말라붙지도 않는 피가 여전히 새어나왔다.

‘면목이 없군. 대족장에게도, 전사들에게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다 놓아버리니 이성이 돌아오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를 지배하고 있던, 눈 먼 사나움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남는 것은 아쉬움과 자책뿐이다.

자신은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바르바피들은 이제 거의 다 쓰러졌다. 몇 남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사납게 날뛰고 있지만 그들 또한 우회한 병력이 뒤를 치기도 전에 모두 쓰러지리라.

‘내 마지막이야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만, 나 때문에 흘린 전사들의 피는 어찌한단 말인가.’

잘 다스렸다고 생각했다. 먹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신의 흉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오만의 대가는 이렇듯 크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초라하게 쓰러지지는 않겠다.’

아무런 기미도 없이, 기습적으로 뛰쳐나갔다.

노리는 것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 건재한 도망자 놈을 노리는 것보다는 위태로운 상대가 낫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본능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가치가 높은 것은 단연 장군의 목.

크허엉!

마지막 포효를 터뜨리고 뛰어오른다. 발아래 보이는 적에게 발톱을 내리그었다. 돌처럼 변한 적장의 얼굴을 갈라놓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푸욱!

하지만 발톱이 채 다 내려가기도 전에, 그의 몸은 육중한 충격을 받으며 옆으로 밀려났다. 아찔한 고통이 전신을 울리고서야 포라칸은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한 한 자루 창을 보았다.

‘아…쉽구나.’

허공에 뜬 몸이 힘없이 밀려나고, 곧 땅에 내려앉는다.

감각이 사라져가는 몸에 닿는 자그마한 충격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

전투가 끝났다.

우두머리를 잃은 수인병들은 지리멸렬 했고, 상황을 모른 채 우회하여 온 병력 역시 제국군의 거센 반격에 밀려 말머리를 돌렸다.

승리. 그것도 백 여 명에 달하는 수인병들을 모두 목 베고, 무엇보다 군주 줄카에 맞서 싸우기도 했던 타칸연합국의 2인자를 처단했다. 전투 자체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대승이라 할 만한 성과였다.

“…….”

군터는 포라칸의 시신 앞에 앉아 있었다. 상처 입고 지친 내쉬는 그의 옆에 앉아 이따금씩 비명 같은 울음을 흘렸다.

포라칸의 시신은 목이 없었다. 쓰러뜨리자마자 곧바로 목부터 베어낸 탓이다. 칸젤이 한 번 지긋하게 피를 탐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아나는 곳이 없기에 행한 조치다. 전리품이 상하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않은가.

‘다르군.’

바르바피라 불리는 수인병들 역시 평범한 인간에 비하면 월등한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그런 수인병들과 포라칸은 또 비할 수 없이 차이가 났다. 칸젤이 빨아들이는 생기도 그렇고, 생기가 빠져나감으로써 고개를 드는 사기 역시 일반적인 수인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난적이었지.’

전투가 끝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운 빠진 몸은 여전하다. 홀로 대적한 것도 아니고, 아그니스 체스퍼와 장시간 동안 협공하여 잡아낸 것임에도 몸이 삐걱거렸다. 확실히 대전사 포라칸은 이제껏 그가 상대해본 적들 중 단연 최고의 난적이었다.

얼마 후. 군터는 비쩍 마른 시신에서 칸젤을 뽑아들었다. 지나가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하긴, 피를 빨아먹는 병기는 아무래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으리라.

“대장님.”

“준비는?”

“말씀하신 대로 다 일러두었습니다. 들뜨지 않고 다들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승리의 기쁨은 쌓일 대로 쌓인 피로마저 잊히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에 그 악명 높은 푸른 사자의 수급을 취했으니 기쁨은 배 이상이리라. 덕분에 없는 사정에서도 조촐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물론 연회라고는 하지만 술도 없고,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조금 넉넉한 식사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군터는 전투가 종료된 후, 할렌에게 일러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끔 했다.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게끔 한 것이다.

“이유는 묻지 마라. 오늘 밤, 우리는 위글로우로 떠난다.”

“…예.”

할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떠들썩한 연회가 끝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군터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막사를 찾았다.

“군터. 무슨 일인가?”

“장군. 이만 떠나려 합니다.”

“음……?”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아그니스 체스퍼가 인상을 찌푸렸다.

군터는 품속에서 가죽에 싸여 둘둘 말린 서신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보면 아실 겁니다.”

“…….”

아그니스 체스퍼는 말린 서신을 펴 읽었다. 천천히 서신을 읽는 그의 표정이 점점 돌덩이처럼 굳어갔다.

“이……!”

“위글로우 사령관은 리에론 가의 당여. 북동 전선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요한 막사 안에 흉포한 살기가 가득 찼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군터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걸 이제와 내게 보인 이유는?”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지?”

“장군도, 이곳의 군졸들도……. 그냥 허망하게 죽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

“파비우스 리에론의 군대와 합류해도, 살마드로 돌아가도 장군은 죽습니다.”

“그렇다고 치지. 헌데,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떠나겠다는 이유는 뭔가?”

“저는 위글로우에 묶인 몸입니다.”

“가족들 때문에 그러는가?”“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허면?”

“위글로우 사령관에게는 빚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한미한 시절부터 저를 후대해주었습니다. 그가 제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등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자는 범부에 불과해. 권력이나 쫓는 장사치일 뿐이야. 자네를 담을 그릇이 아닐세.”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시절에, 그는 저를 이끌어줬습니다. 이제와 제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그때의 빚을 모른 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배신이니까요.”

“내게 이 서신을 보인 것은? 이건 배신이 아닌가?”

“실수라고 치지요.”

굳은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아그니스 체스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음에 볼 때는 적이겠군.”

“다시 만난다면 아마도…그렇겠지요.”

“눈앞에 역적을 두고도 베지 못하다니, 검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녹슬었나보군.”

“녹슨 검은 다시 기름칠을 하고 갈면 됩니다. 장군께서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래야지. 아무튼 난 이만 자야겠네. 피곤해서 말이야. 자네도 나가서 볼 일 보게.”

“…보중하십시오.”

답하지 않고 드러눕는 아그니스 체스퍼를 뒤로 하고, 군터는 그의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깊은 밤이 찾아왔을 때, 수십 기의 기마가 급히 제국군의 야영지를 떠났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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