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임시로 야영지를 꾸리고 휴식을 취한 지 하루가 지났을 때 아그니스 체스퍼가 의식을 회복했다. 그의 옆에 교대로 종일 붙어 있던 의무병이 부리나케 소식을 알렸다.
“장군.”
의무병이 가장 먼저 달려가 알린 사람은 군터였다. 덕분에 군터는 가장 먼저 쥐 죽은 듯 조용한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는가.”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가 누워 있던 초라한 침상 위에 앉아 그를 맞았다. 의식을 회복했기 때문인지, 창백했던 안색은 이제 평상시에 가깝게 돌아와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네. 허기가 지긴 하지만 달리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있는데 의무병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받은 천인장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장군!”
“몸은 좀 어떠신지……”
“괜찮네. 염려하게 만들었군. 부끄럽네.”
“무슨 그런 말씀을.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병사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계속 앓다가 방금 일어난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게 구는군.”
며칠 동안 종일 음울함을 풍기던 이들이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병사들이 불안해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그니스 체스퍼의 존재감은 그가 이끄는 군대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병사들도 장군께서 깨어나신 것을 알면 힘을 얻을 것입니다.”
“흐흐. 과연 그럴까? 나는 패장이다. 죄인이지. 내 그릇된 지휘 때문에 제국의 무수한 장졸들이 목숨을 잃었어.”
“장군…….”
“내게 이 흑포를 하사해주신 황제폐하를 뵐 면목이 없구나…….”
격전의 와중에도 윤기 나는 흑포는 온전했다. 언젠가 듣기로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 화살은 물론, 창칼에도 쉬이 상하지 않는다 했던가.
그러나 그때 그리도 자랑스럽게 어루만지던 흑포를, 지금의 아그니스 체스퍼는 더없이 무거운 얼굴을 한 채 바라보았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침묵 속에서, 밝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몰려들었던 이들이 다시 막사를 나섰다. 의식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그니스 체스퍼이니만큼 소란보다는 휴식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그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물러났다.
군터도 그들 틈에 섞여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다시 아그니스 체스퍼의 막사로 들어갔다.
“군터. 무슨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따로 말이군?”
“예.”
“…앉게.”
군터는 적당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 이렇게 따로 찾아왔는가?”
“적의 추격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눈이 일순 사납게 번뜩였다.
“추격이라고?”
“예.”
“우리는 꽤나 멀리 왔네. 여전히 꼬리가 붙어 있을 것으로 보는가?”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왜 다른 자들은 그 말을 하지 않았지?”
“제 개인적인 추측이기 때문입니다.”
“추측?”
“감…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감이라고?”
침묵이 흘렀다.
군터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래도 대뜸 웃음이나, 노성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침묵 역시 어쨌거나 들어는 주겠다는 신호일 테니.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어차피 쉴 것이라면 만일의 일에 대해 준비를 해놓는다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다른 자들은 유난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아, 그래서 날 찾은 게로군?”
“…….”
아그니스 체스퍼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대표 격으로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군터는 그들과 같은 천인장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입장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그니스 체스퍼라면 다르다. 그는 어떠한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다. 또한 같은 지시라도 그가 하는 지시는 제장들에게 신뢰를 얻는다.
“좋아. 자네의 터무니없는 추측이 맞든, 틀리든 손해 볼 것은 없지. 아니, 정말로 자네의 그 감이라는 놈이 제대로 된 것이었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작게나마 지금의 이 치욕을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만에 하나에 대비한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럼에도 병석에 누운 장군의 눈에서는 매서운 안광이 번뜩였다.
‘역시.’
처절하게 패했지만, 실제로 조금 전에는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그니스 체스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복수전을 갈망하고 있다. 다시금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가 뽑아든 칼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퍼렇게 날이 갈려 있으리라.
*
척후로 나선 전사들이 차례차례 정보를 얻어왔다.
“대전사여. 흔적을 찾았습니다.”
“흔적의 거리가 잦아졌습니다. 속도를 줄인 모양입니다.”
“더 이상 쫓기지 않는다고 안심한 것 같군요.”
포라칸이 입매를 비틀었다.
“안일하군. 거의 따라잡았다. 모두들 힘을 내라!”
다소 막막하던 추격에 힘이 실렸다. 지쳐있던 전사들도 다시금 힘을 내어 말을 달렸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 정찰을 나갔던 전사가 기다리던 소식을 가져왔다.
“대전사여!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어디냐!”
“반나절 거리입니다! 놈들은 야영지를 꾸려놓고 본격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마음껏 쉬라고 해라. 이제 곧 영원히 쉬게 될 터이니. 길은 봐 두었겠지?”
“예. 헌데…놈들이 머물고 있는 곳까지 가는 지형이 굉장히 협소합니다. 돌아가려면 갈 수는 있지만 길이 험해 말들이 속도를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포라칸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격을 따돌렸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숨을 돌릴 수 있지만…그렇다고 해도 그런 들어가기도 힘든 곳에 진을 친다? 이건 마치…….
“나름대로 대비를 하기는 했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시일이 걸리더라도 은밀히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 그랬다가는 기껏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치게 될 수도 있음이야.”
“허면?”
“내가 바르바피들과 함께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겠다. 필시 놈들은 도망치려 할 것이니 미리 우회하여 대기하던 전사들이 퇴로를 틀어막는다.”
“하지만…그러면 대전사께서 이끄시는 병력이 너무 적습니다.”
“나를 걱정하는가? 적은 어차피 몇 번이고 패하여 꼬리를 만 놈들이다. 나와 바르바피들이 정면으로 들어간다면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으음. 알겠습니다. 허면 바로 움직이오리까?”
“그래.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옛.”
*
어둠이 내렸다.
포라칸과 바르바피들은 무릎 높이로 수풀이 자란 기슭을 지났다. 양 옆으로는 비스듬히 경사 진 지대가 늘어서 있었고, 그로 인해 생긴 그늘이 그들의 움직임을 검게 가려주었다.
“저기가 끝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제법 길게 이어진 길이었다. 사전에 정찰을 나갔던 전사로부터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정말 천혜의 지형이 아닌가.
‘무덤자리 하나는 잘 골랐군.’
듣기로 야영지의 규모가 제법 된다 했다. 이제껏 맞닥뜨린 패잔병들과는 규모 자체가 비할 수 없다 했으니, 필시 저곳에 아그니스 체스퍼가 있으리라.
‘그놈도 말이지.’
무섭도록 날카로운, 괴이한 형태의 창을 쓰던 녀석. 그 녀석이 왜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단순히 창끝이 매서워서만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반쯤 홀린 듯 뒤를 쫓지 않았을 것이다.
‘죽여야 한다.’
그의 몸이,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놈을 죽여 없앨 것을 말하고 있다. 포라칸은 자신의 의지에 그 알 수 없는 요구가 스며듦을 알았다. 하지만 놔두었고, 순응했다. 그 은밀하고도 진득한 요구가 그의 이성적 판단에 크게 반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화근이다. 그놈도, 아그니스 체스퍼도……. 기회가 온 지금 모두 쳐 없애야 한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일말의 의구심도, 망설임도 없다. 포라칸은 말도 타지 않은 채 바르바피들을 이끌고 어둑한 땅을 걸었다. 좁은 길의 마지막은 그의 시선 끝에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그 너머에 있을 적들을 그리며 전의를 불태우던 바로 그때.
피이잉!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포라칸은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러 날아온 물체를 쳐냈다. 자그마한 불길이 일며 어둑한 시야에 빛을 드리웠다.
‘불화살?’
순간 뜨끈하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함정인가!”
포라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금방 쳐낸 것과 가튼 몇 대의 불화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들이 보였다.
*
“쏴라! 쏴! 불이 밝혀진 곳을 향해 집중 사격하라!”
기슭 위.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제국군 병사들이 지휘관들의 호령에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그 수가 족히 천에 가까웠으니, 한 번에 수백 발씩의 화살이 끊이지 않고 아래로 쏘아졌다.
슈슈슝!
적들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적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크허엉!
“앞으로 간다! 계속 쏴라!”
적들은 수인화 하여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좁다란 길목의 끝에서 방패를 든 중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뒤에는 화살비에 앞에는 창과 방패를 든 보병들의 방진. 그야말로 앞뒤로 길이 꽉 막힌 적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돌아가거나, 뚫고 가거나.
크아아아아-!
적들의 선택은 전자였다.
“멍청한 놈.”
“우회한 적들이 합류하면 일이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닙니까?”
할렌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물었다. 굳건하게 대형까지 짜고 적들을 맞이한 중보병들이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것이 보인 탓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괜찮다. 그 전에 끝날 테니까.”
적의 돌파가 멈췄다. 어둠 속에 묻혔지만 그럼에도 유난히 돋보이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서너 개는 더 커 보이는 거인이 보였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참전이다. 그가 포라칸과 바르바피들을 막아선 것이다. 제장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영지에 남았던 그가 기어이 앞으로 나서버렸다. 그게 그답기는 하지만.
“내려가시렵니까?”
“여기서 화살을 날려봐야 제대로 효과도 보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지 않느냐.”
물론 얼마 되지 않는 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포라칸이 이끄는 수인병들이라면 수백 병사보다 더 위협적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호기가 아닌가.
‘빚은 갚아야지.’
아그니스 체스퍼의 말대로다. 지난번의 전투부터 시작해 추격을 피해 도망쳤던 날들은 군터에게도 치욕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빚을 갚아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찌 놓칠 수 있겠으며, 손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내 손으로 놈의 목을 치겠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할렌을 비롯해 얼마 남지 않은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이 작게 한숨 쉬면서도 뒤를 따랐다.
군터는 그들을 이끌고 경사를 내려갔다. 거친 말발굽소리가 적의 귀에도 전해졌는지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보병대와 치열하게 맞붙던 수인병들 중 몇몇이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크허엉!
가장 뒤에 있다가 가장 먼저 뒤를 돌아본 수인병 하나가 달려들었다. 군터는 날아드는 발톱은 무시하고 칸젤을 쭉 뻗었다.
쿵!
발톱을 지나 사람으로 치면 손목에 해당하는 부위가 군터의 팔뚝을 때렸다. 묵직한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군터는 아랑곳 않고 찔러 넣은 칸젤에 힘을 줬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수인병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생각보다 가볍군.’
이 추격자들이 다가오는 동안, 제국군은 한 자리에 머물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군터 역시 기운을 거의 다 회복한 상태였다. 덕분에 지금의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콰앙!
주변의 사투를 자잘하게 만드는 굉음이 들렸다.
군터의 시선이 돌아간 그곳에서는 청동의 피부를 가진 거인과 그보다는 살짝 작지만, 그에 버금가게 거대한 괴인이 맞붙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