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대승입니다.”
“제국 놈들,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더군요.”
대승을 거둔 타칸연합군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수중에 술만 있었다면 지금의 이 무수한 시체 위에서라도 거리낌 없이 잔치판을 벌였을 만큼 그들의 분위기는 크게 고조되어 있었다.
“지독한 놈들. 졌으면 목만 내놓으면 될 것이지, 먹을 것까지 싹 다 태워버릴 건 또 뭔지.”
비스링을 점령했지만 얻은 것은 다 타버린 요새 하나다. 그 안에 있던 것은 식량이건 무구건 모조리 불타 쓸모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게 제국의 전쟁 방식이다. 우리와는 다르지.”
최고전사 한 명이 툴툴대는 전사에게 말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어려운 상대였다. 저 불타버린 요새도,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대도. 모두 쉽지 않았지.”
들떠 있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대족장. 이제 대전사를 불러들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추격도 이쯤 했으면 더 시간을 들여 봐야 별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포라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애초, 나는 그에게 재량권을 주었어. 이쯤에서 멈추든, 더 쫓아가든…뭐가 되었든 알아서 하겠지.”
“대전사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을 베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바라는 대로 적장의 목을 베어 오면 그만이지 않은가.”
“허나…….”
“포라칸은 초원 제일의 전사다. 또한 제일의 사냥꾼이기도 하지. 패주하고 있는 제국군이 그를 당해낼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전사의 우려를 일축했다.
그는 포라칸을 신뢰했다. 어느 정도냐면, 그 자신보다도 더 신뢰했다. 불안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와 달리, 포라칸은 그야말로 완성된 전사다. 따라서 그를 신뢰하는 만큼 그의 판단 역시 신뢰한다.
“계속해서 쫓는다면 포라칸은 기어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을 들고 돌아올 것이다. 무리라고 생각했다면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릴 테고.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예?”
타르가이 베르겐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 얼굴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불쾌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앙 칼 고르에게 전령을 보낸다. 우리가 비스링을 함락시켰고,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대는 패퇴되었으며, 키롤드 역시 함락될 것이라고 전해라. 더 이상 어영부영 시간 끌지 말라는 말도 함께.”
“옛!”
*
“대전사여. 슬슬 돌아가심이 어떻습니까? 벌써 이틀째 적의 꽁무니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망갈 놈들은 다 멀리 도망 가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패퇴한 제국군은 살기 위해서 밤낮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포라칸이 이끄는 부대는 추격을 하면서 제국군의 잔당들을 몇 처리했지만, 덕분에 시간을 적잖이 잡아먹히고 말았다. 더 이상 추격을 해본들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니 이쯤에서 추격을 접고 돌아가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아니. 계속 쫓는다.”
“예? 그러나…….”
“지금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을 벨 적기다. 앞으로의 전쟁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옛.”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 휘하 전사에게는 그리 둘러댔으나 정작 포라칸의 마음속에 찝찝하게 남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흑포장군의 목도 중하지만, 그로 하여금 아직 말머리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놈.’
그놈. 그 도망자 녀석. 전투에서 몇 번씩이나 맞붙었고, 끝내 목을 베지 못한 성가신 녀석. 그 놈만 아니었던들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은 진즉 그의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그렇게 몇 번 그의 앞을 막아서서가 아니다.
놈에게서 느꼈던 무언가 이질적이면서도 불쾌한 감각.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으나 두 번째로 맞붙었을 때부터 그 이후까지, 갈수록 거슬리는 정체불명의 꺼림칙함.
‘놈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때문에 그를 따르는 전사들에게도 떳떳이 말할 수가 없다. 그저 정체 모를 불쾌한 감각 때문에 계속 쫓는다고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포라칸 스스로도 그게 추격을 계속 이어가야하는 이유로는 가당찮다는 것을 안다. 알지만, 그럼에도 단념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그는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쫓아서, 따라잡아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다.
‘이유를 모르겠군.’
머릿속을 비우려 해도 놈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살의가 들끓는다. 이는 호적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것보다도 더 강한 충동이었다.
‘분노? 이것은 분노인가?’
얼마나 멀어졌을까. 처음부터 부지런히 도망쳤다면 조금 전 휘하 전사의 말대로 상당히 거리가 벌려졌을 터. 그러나 어쩐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또한 그저 아무런 근거 없는 느낌일 뿐이었지만.
*
“군터. 이제 이만하면 충분히 멀리 오지 않았는가. 적도 여기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게야. 이제 좀 쉬는 게 어떤가? 병사들은 이제 한계야. 아니, 이미 꽤 오래 전에 한계를 넘었어. 더 이상 움직이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라.”
“큰일이라…….”
커티스의 말처럼 대부분의 병사들의 몰골은 반 시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계속 움직이다가는 머지않아 반절이 쓰러지고, 또 다시 머지않아 나머지 반절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후우.”
그런데도 군터는 쉬자는 말을 시원하게 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여기서 머뭇대면 더 큰일이 생길 거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그래. 하루 정도 멈춰서 쉬도록 하지.”
“내 병사들에게 일러 야영지를 꾸리도록 하겠네.”
하루를 쉬어간다는 말이 나오니 뻣뻣하기 그지없던 병사들의 움직임에도 생기가 돌았다. 급조한 야영지가 꾸려지는 사이, 군터는 고지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의 곁에는 할렌이 홀로 따라붙었다.
“대장님.”
“음?”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군터의 무뚝뚝한 얼굴은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할렌은 군터의 곁에서 보낸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었던 만큼, 그의 얼굴이 평소 때보다 더 굳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하구나.”
“불안……? 적의 추격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할렌이기에, 군터는 그의 속을 가림 없이 털어놓았다. 커티스를 비롯한 다른 천인장들에게는 말 못할 것도 할렌에게만큼은 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 초원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 부족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는 사냥을 나설 수 없었지. 그런데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나이는 되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있었거든.”
오래 된 이야기다. 초원에서의 안 좋았던 시절은 대부분 잊었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묻히지 않고 여전히 기억에 남은 몇몇 순간들이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건 또한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난 활과 창, 단도 하나를 가지고 몰래 사냥을 나섰다. 첫날에 토끼 두 마리를 잡았지. 그리고 이틀째 되던 날, 흑표(黑豹)를 만났다.”
아마도 그날의 기억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운이 좋았다. 맞바람이 불고 있었고, 거리도 제법 떨어져 있었기에 놈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놈을 발견할 수 있었지.”
정말로,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놈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지. 그런데 얼마나 달렸을까, 바람의 방향이 바뀌더구나. 그걸 느낀 순간, 나는 이미 지쳐있었는데도 처음보다 더 힘껏 달렸다. 이러다 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어.”
“흑표가 쫓아올까 두려우셨군요.”
“그래.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달렸는데도 난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나 오래 달렸는데도 계속해서 뒷머리가 서늘했기 때문이야. 놈이 날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
흑표의 영역으로 짐작되는 곳을 벗어났는데도 그랬다. 그때의 그는 기어이 당시 부족이 머물고 있던 야영지가 눈에 보일 때까지 달렸다.
“부족이 있는 곳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때 무엇을 봤는지 아느냐?”
“…….”
“수풀 속에서 노랗게 번뜩이는 눈을 봤다. 아쉬움, 갈등이 섞여 있는 눈이었지. 놈은 그 순간에 더 쫓아가서 나를 잡을지, 아니면 그냥 돌아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이제껏 살면서 몇 없던, 가슴 철렁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헌데 그 이야기는 어이하여…….”
“지금이 그때와 비슷하다.”
“예?”
“그때처럼…뒷머리가 서늘하다는 말이다. 더해서 이 가슴의 두근거림도 멈추질 않고.”
피가 다 씻기지 않은 손으로 왼쪽 가슴 위를 짚었다. 거칠고, 빠른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저 과민, 아니면 착각인 것 같으냐?”
“으음.”
할렌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침음을 흘렸다. 군터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만약 대장님께서 그 느낌이 정말로 신경이 쓰이신다고 하면,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준비?”
“따라오는 놈도 흑표가 아니지만, 대장님께서도 뭣 모르던 어린 아이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여기까지 따라올 추격대라고 해봐야 그렇게 많지는 않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우리도 덫을 놓을 수 있지 않을지.”
표정 없던 군터의 얼굴에 이채가 돌았다.
“덫이라? 함정을 파자?”
“제가 괜히 어리석은 말을 했다면…….”
“아니. 아니다. 좋은 말을 해주었어. 확실히 그런 방법도 있지.”
할렌이 갑자기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얻어 책략에 통달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그저 우연히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할렌의 말은 일리가 있다. 확실히 지금 쫓아오는, 혹은 쫓아오고 있을지 모를 자들은 그 옛날의 흑표가 아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쫓기고 있는 이쪽도 그 옛날의 뭣 모르던 꼬마 아이가 아니다.
‘덫이라. 안 될 것 없지 않은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는 군터의 눈이 깊어졌다.
*
“타르가이 베르겐으로부터 서신이 당도했네. 무슨 내용인지 알겠는가?”
“혹시 틀려서 무안을 사느니, 전하께서 말씀해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파비우스 리에론의 말에 주앙 칼 고르는 피식 웃었다.
“현명하군.”
“신중하거나, 겁이 많은 게지요.”
“무엇이 됐든 그 또한 현명함이야. 자고로 큰 무리를 이끄는 자의 처신은 항상 그래야 하지.”
누가 이와 같은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전쟁을 치르는 두 군대의 총사령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차분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말이다.
“비스링을 함락시켰다는군.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추격대가 그들을 추격하는 중이라 하네.”
“아그니스 체스퍼는 어찌 되었다 합니까.”
“중상을 입은 채로 도주 중이라 하는군. 푸른 사자가 그 뒤를 쫓고 있는 모양이고. 아마도 그는 살건 죽건 비참한 꼴을 보게 되겠지.”
“안 됐군요.”
“시류를 타지 못한 자는 쓸려갈 뿐.”
“다행스러운 말씀입니다.”
“타라냐드와 본다인은?”
“타라냐드는 사흘. 본다인은 닷새 뒤에 당도한다는군요.”
어지간히도 늘쩡거린다. 하긴, 그들은 전번의 전쟁에서도 그랬다. 늦게 도착하여 처참히 무너졌었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겠지요.”
“자네의 군대는?”
“천인장부터 그 밑의 장교들까지 모두 장악한 지 오래입니다. 애초 그러지 못할 자들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편으로 다 보냈지요.”
“기대하겠네. 쓸 데 없는 데다 전력을 낭비하기는 싫거든.”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파비우스 리에론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주앙 칼 고르는 흐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의 인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