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습하고 서늘한 밤바람이 상처입고 지친 몸을 쓸어내린다.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는 질척해진 땅을 밟는 군홧발소리와 뒤섞여 고요한 메아리를 자아낸다.
“군터.”
천인장 커티스가 다가왔다.
“음?”
“병사들이 한계에 다다랐어. 어디서 잠깐이라도 쉬어야 할 것 같네.”
그 말에 군터는 뒤를 돌아보았다. 커티스의 말처럼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고개를 든 병사들이 드물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적의 창칼이 아니라 피로 때문에 쓰러질 판이다.
“쉬어야겠군.”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겠네.”
같은 천인장인데도 불구하고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군터였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부상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말 참담하군.’
지금 그들의 몰골은 완벽하게 패잔병의 그것이다. 행색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패했고,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그나마 이런 상황조차도 아그니스 체스퍼와 그의 친위대가 목숨을 내던져 분전한 결과다. 덕분에 지금의 이 병력이 어떻게든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아그니스 체스퍼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이고, 그의 친위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뿌득!
대전사 포라칸. 모두 그 자 때문이다. 그 자 개인의 맹위도 대단했지만, 각자 마구잡이로 흩어져 눈에 보이는 대로 싸우던 수인병들이 그 자의 곁으로 집결한 것이 컸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수인병들이 갑자기 잘 조련된 군마처럼 움직이니 그들의 돌격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리비온 하야신을 쓰러뜨리고 아군을 완전히 궤멸로 몰아넣으려던 포라칸과 수인병들을 아그니스 체스퍼가 막아섰다. 군터 역시 전력을 다해 그를 도왔으나 역부족이었다. 포라칸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와 둘이서 상대했음에도 수세에 몰린 채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수백에 달하는 수인병들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패퇴했다. 마지막까지 아그니스 체스퍼와 그의 친위대가 후방에서 적의 추격을 막았지만, 지금의 이 오천 남짓한 패잔병을 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찰병들은 곧 쉴 만한 곳을 찾아왔다. 언덕 아래 그늘진 곳이었는데, 나무도 그럭저럭 나 있어 잠깐 쉬어가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자그마한 나무등치에 무거운 몸을 기대는데 할렌이 다가와 물었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할렌도 몰골이 썩 멀쩡하지는 않았다. 당장에 얼굴에도 못 보던 자잘한 생채기가 나 있었고 한쪽 팔에는 아예 어깨와 연결해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부목도 보이지 않는 것이 급한 대로 응급처치만 한 듯했다.
“괜찮다. 나보다는 오히려 네가 더 심각해 보이는구나.”
“낙마하면서 팔이 틀어졌나 봅니다.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다는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더군요.”
“그래. 무리하지 마라.”
걱정스런 마음에 하기는 했지만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군터나 할렌이나 잘 알았다. 당장 적의 추격이 다가오면 외팔이든 외다리든 손에 잡히는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제…어찌 되는 것입니까?”
군터의 주변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인 할렌은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글쎄. 우선은 장군께서 의식을 찾으시기를 기다려야겠지. 그동안에는 최대한 적과 거리를 벌려야 할 테고.”
“그렇군요.”
어지간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할렌이었는데, 어지간히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겁쟁이라 타박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할렌의 성격상, 그나마 참다 참다 온 것일 거다. 부하들의 불안을 다스리다가 결국 어렵사리 그에게 다가와 입을 연 것이겠지. 그래도 오래 참은 셈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불안하지 않겠는가. 누가 두렵지 않겠는가. 아그니스 체스퍼를 따라 오랜 세월을 복무했다던 천인장들마저도 얼굴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판국이다. 군터 그 자신조차 부상이 주는 고통보다 앞일에 대한 막막함이 더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퍼져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군터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시체 같은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졸들을 돌아보았다.
“군터.”
“앉아있게.”
병사들 틈에 섞여 쉬고 있던 몇몇 천인장들이 그를 알아보고 일어서려 했다. 백인장들 중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자들은 앉은 채로 가볍게 군례를 취했다. 전장에서 군터가 싸우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들은 아그니스 체스퍼와 함께 적과 가장 치열히 싸웠던 군터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쓰러진 상황에서 군터가 대장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대장으로서의 통솔력과 일신의 무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말이다. 지금 패퇴한 제국군에게 필요한 것은 통솔력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 조건에 가장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군터였다.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나 군터는 자신을 향한 과도한 기대, 혹은 의지를 피하지 않았다. 그가 피한다면 이 초라한 패잔병 군대는 더욱 초라해질 뿐이기에.
군터는 진영을 크게 한 바퀴 돈 후에 마지막으로 급조한 진지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간이 막사로 향했다. 막사라고 해봐야 얇은 나무 몇 개를 베어 얼기설기 엮은 움막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장군님의 상태는?”
그 초라한 간이 막사 안에는 아그니스 체스퍼와 그를 살피는 의무병이 있었다. 의무병은 군터를 보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제지하는 손짓에 다시 엉거주춤 앉았다.
“좋지 않습니다. 일단 급한 상처는 소독을 하고 약을 발랐습니다만…….”
“문제가 있나?”
“기력이 너무 쇠하셨습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도 부상과 피로, 그리고 각인된 술법의 사용으로 인한 기력의 감소가 겹친 탓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대전사 포라칸의 추격은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를 막아서기 위해 그의 몸에 각인한 ‘강철의 축복’이라 불리는 술법을 장시간 사용했다. 지금 이곳에 살아남아 있는 병력뿐 아니라 군터 역시 그 덕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다. 그만큼 포라칸과 그가 지휘하는 수인병들은 집요하고, 강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혹시 장군의 상태에 변화가 있다면 즉시 알리도록.”
“예. 그리하겠습니다.”
막사를 나서기 전, 군터는 수척해진 얼굴로 누워 있는 아그니스 체스퍼를 보았다. 핏기가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가슴 속의 암담함이 더 커지는 듯했다.
*
위글로우의 사령관저.
넓은 식당에서는 이른 저녁식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끝났겠군요.”
“그렇겠지.”
위벨의 말에 상석의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터님으로부터 소식이 올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조금 늦어질 수도 있지. 따로 사람을 보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지도 모르고.”
“다른 생각은 전혀 없으십니까?”
“돌려 말할 필요 없네.”
“군터님이 사령관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 말입니다.”
고기를 썰던 나이프가 움직임을 멈췄다. 막시밀리언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군터 그 친구는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거든. 고집도 있는 편이고. 어떻게든 얼버무리고 추후에 대충 둘러댈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베이고르의 정보에 의하면 그 대족장이라는 자의 힘은…….”
“말 안 해도 알고 있네. 그래. 위험하지. 어쩌면 지금쯤 군터와 오백 병사들 모두 짐승의 밥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난 분명히 경고를 했어. 따르지 않아 화를 피하지 못했다면 그건 녀석의 책임이지.”
막시밀리언의 목소리가 다소 열기를 띠자 위벨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심기를 거슬렀다면 송구합니다.”
“아니. 괜찮네. 그보다 살마드에서 소식이 왔어.”
“살마드에서 말입니까? 혹시…….”
“짐작하는 바가 맞아. 관재중신이 성주와 아란딜 페레모어를 도모했다고 하는군. 리에론 가와 함께 살마드의 장악에 성공한 모양이야. 그들 둘에 총독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의 수급이 내(內)성문 앞에 효수되었다고 하네.”
“비참한 최후로군요.”
“그래. 성주도 그렇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제국의 흑포장군의 말로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극적이지.”
사람이 이름을 떨치는 것은 생전의 일일 뿐이다. 죽을 때는 모두가 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조용히 가기 마련. 그러나 그것을 고려해도 아란딜 페레모어의 최후는 그의 위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바크렌의 수호신으로까지 불리던 사내가 아닌가.
“살마드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소란은 없었다고 합니까?”
“서신으로 전하는 내용만 보면 그럭저럭 순조로웠다더군. 몇몇 소란을 일으킨 무리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모두 조기에 진압한 모양이야.”
“관재중신의 수완이 상상이상이군요. 제가 그를 잘못 보았던 모양입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네. 하지만 이것이 모두 그의 능력이라고는 보지 않아. 내 생각엔…그 자의 곁에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가 있는 것 같아. 내게 자네가 있는 것처럼 말이지.”
“과분한 말씀을…….”
“뭐 아무튼, 파비우스 리에론은 애초에 처음 제의를 한 것이 아샤즈 테오모렌이라 했어. 굳이 그런 것을 가지고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 그의 말은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베이고르와의 끈은 아샤즈 테오모렌이 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살마드 내에 베이고르의 검들이 숨어들어있을지도 몰라. 이번 일에도 그들이 도움을 줬을 수 있고.”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지요.”
“흐음.”
막시밀리언이 다시 나이프를 집었다.
“베이고르의 왕은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대영주의 자리를 약속했다. 그의 군대에 대한 온전한 통솔권 역시. 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기에는 그가 약속한 것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데.”
“십중팔구 이러저러한 협상을 통해 줄일 만큼 줄이지 않겠습니까. 듣기로 베이고르 왕의 장녀가 열여섯이라 하더군요.”
“리에론의 가주가 늦장가를 갈 거라 이 말인가?”
“서로 간의 신뢰를 쌓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딸을 내줌으로써 베이고르 왕은 제국 출신 투항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파비우스 리에론은 투항자들의 대표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간에 얻는 게 많지요.”
“아샤즈 테오모렌은?”
“그 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정계의 거두라는 것도 바크렌 지방 정부에서나 통하던 것. 소인이 보기에 그 자는 지금 짙은 안대를 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 앞에 구덩이가 있는지, 불길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걷고 있다 이 말인가.”
“안대를 벗으면 비로소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언제쯤 벗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혼자서는 벗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약속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치를 가질 때만이 효력을 갖는다. 달콤한 약속일수록 특히 그렇다. 그러나 노욕에 눈이 먼 정치가가 그것을 알고 있을까?
“비참한 말로가 하나 더 추가되겠군.”
“그 자가 작은 것에 만족한다면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숱한 당여들을 이끄는 당파의 수장인데 말이지. 애석하군.”
“베이고르에도 한 자리 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썩어 넘칠 터인데, 전향자들에게까지 순서가 갈 일은 없겠지요.”
“그도 그렇군. 하하하.”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느긋한 식사도 거의 끝나갔다.
“마님께서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위벨이 카트리나 리에론의 이야기를 꺼내자 막시밀리언은 웃는 낯을 지웠다.
“예배당에 갔네. 아이를 달라 기도하려고 말이야.”
“주제넘은 말이라는 것은 압니다만…그래도 마님께 신경 써주십시오. 사령관께서 베이고르의 영주가 되신다 해도 리에론 가문과의 연은 중요합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그걸 머리로는 잘 알아도 마음으로는 잘 안 되는구만.”
위벨은 찌푸려진 막시밀리언의 얼굴을 보곤 더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예배당에 가 있을 카트리나 리에론만큼이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디 부부간의 일이라는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던가.
‘그 아쿼러즈 계집에게 쏟는 시간을 부인께 쏟으시면 좋으련만.’
속으로야 그런 생각이지만 입 밖에 내는 것은 물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령관의 역린을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한 조언이라 할지라도 막시밀리언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할 생각 따위, 위벨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이제는 30분만 의자에 앉아도 허리가 아프네요...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