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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9화 (209/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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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선. 조금의 낭비도 없이 온전히 힘을 싣고 뻗어간 창은 수인병의 드러난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땅을 박차고 덤벼들던 수인병의 몸이 일순간 덜컥거릴 정도로 위력적이고 제대로 들어간 일격.

크아아아!

보통의 수인병이었다면 이 한 방으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덩치 큰 수인병은 남다른 덩치에 걸맞은 내구성을 갖췄는지, 잠깐 움직임이 멈춘 직후 곧바로 발톱을 휘둘렀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뒤로 몸을 빼려했다. 깊숙이 틀어박힌 창은 포기할 생각이었다.

“흐읍!”

그러나 급히 물러서려던 그때, 악 다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걱!

빛살 같은 궤적이 수인병의 팔을 갈랐다. 날카로운 발톱이 내려와 어깨에 닿는 순간 피 분수가 튀어 올랐다. 끔찍한 괴성이 터지고, 아그니스 체스퍼는 수인병의 가슴을 힘껏 걷어차 창을 뽑아냈다.

크아아아악-!

“군터!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갑기는 하네만,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겐가!”

“장군께서 너무 앞서가시는 통에 뒤처리를 하느라 늦었습니…다!”

반가움을 표현할 시간도 없었다. 수인병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마자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진 것이다. 군터는 다급히 칸젤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고, 아그니스 체스퍼는 시체 뒤로 몸을 숨기며 땅에 떨어져 있던 방패를 들었다.

“크윽!”

아무리 빠르게 창을 휘두른들 동시에 날아드는 수십 발의 화살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급소와 내쉬에게 가는 화살만 최대한 쳐냈을 뿐, 대여섯 발은 어깨며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전장의 열기로 통각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음에도 후끈한 고통이 그를 자극했다.

“쓸어버려라!”

군터의 호령에 족히 삼백은 되어 보이는 수의 적을 상대로, 백 명도 되지 않는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한 발 늦게 타칸연합군의 포위망을 꿰뚫은 제국군이 그 뒤를 따랐다.

“피해라!”

타칸연합군은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칼이나 창 대신 화살로 맞아 싸웠다. 군터와 아그니스 체스퍼를 향했던 것보다 수 배는 더 많은 화살이 군터 천인대 및 제국군을 덮쳤다.

쾅!

“으아악!”

그런 와중에 묵직한 굉음과 함께 말과 사람이 동시에 훌훌 날았다. 상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던지라, 군터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괴물이군.”

“다른 놈들과는 달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도 하더군.”

한 팔이 팔꿈치 위부터 싹둑 잘려나간 수인병이 씩씩대며 흉험한 안광을 빛냈다. 확실히 아그니스 체스퍼의 말처럼 덩치부터 시작해서 평범한 수인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풍기는 기세만 봐서는 일전에 상대했던 최고전사라는 놈보다 더 윗줄인 것 같았다.

“크르르…너, 그때 그놈.”

“…날 아나?”

수인병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군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번들거리는 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수인병은 자신을 아는 듯했는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못…하나. 아무…래도 좋아. 넌…오늘 내 손에…죽는다.”

“외팔이 괴물이 나를? 그건 무리다.”

그저 눈이 돌아간 괴인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저 수인병과 그 사이에 뭔가 기억나지 않는 기구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고통을 덜어주마. 괴물.”

“내 이…름은 야녹…이다.”

수인병, 야녹의 눈이 번뜩인다. 그 안에 담긴 광기와 살의는 나름대로 험한 경험을 여럿 해본 군터조차 섬뜩하게 느낄 정도로 강렬했다. 아무래도 정말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크오오오!

야녹이 달려들었다. 두 다리로 땅을 차고 하나뿐인 앞발을 들어올렸다.

내쉬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전투마 중에서도 유난히 대가 센 내쉬였지만 동물로서의 본능적인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크게 드리운다. 위압감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던 내쉬에게 군터는 고삐를 당기는 것으로 뜻을 전했다.

‘괜찮다.’

동요가 멎는다.

‘아무 문제없다.’

비교적 잔잔하던 군터의 기세가 치솟는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던 가느다란 풀이 한 순간에 언덕이 되고 산이 되었다. 높아진 봉우리는 그를 덮으려는 그림자에도 굴하지 않았다.

푸푹!

충돌 직전, 한 대의 화살이 야녹의 옆머리를 파고들었다. 내리치던 발톱이 주춤하고, 군터는 비틀거리는 짐승의 숨통을 끊었다.

서걱!

팔을 베었을 때와 같은 깔끔한 궤적. 하나 남은 팔이 내리치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허망하게 무릎을 꿇은 야녹이 떨리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군터의 무심한 얼굴이 짐승의 두 눈에 비치고, 다가오는 창날을 맞았다.

*

털썩!

양 팔과 목이 날아간 거대한 시체가 쓰러졌다. 각오했던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허망한 결판. 그래서인지 군터는 그의 앞에 쓰러진 적의 시신에서 잠시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할렌이 다가와 물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것입니까?”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했다.”

전투와 대결은 다르다. 전장은 군인들의 싸움터지 무인들의 싸움터가 아니다. 이제는 그도 그것을 안다. 전장에서 최고의 미덕은 승리. 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잔혹하거나 비열한 수단도 정당하다.

“따라가지 마라! 대열을 정비해!”

타칸연합군은 잔뜩 기세가 오른 제국군을 정면으로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에 아그니스 체스퍼는 추격을 중지시키고 군을 밀집시켰다.

“장군.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만 후방으로 물러나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병사들도 그렇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도 한계처럼 보였다. 자잘한 자상은 제외하더라도 그의 몸에 박힌 화살만 해도 십여 대가 넘었으니, 전투가 끝나고 나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의사가 그의 옆에 밤낮으로 붙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끄응.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이 정도면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해주겠지.”

아그니스 체스퍼가 말한 ‘그’는 카리비온 하야신이다. 지금쯤 그는 우군(右軍)을 맡아 적군을 밀어붙이고 있을 것이다.

총대장인 아그니스 체스퍼가 전면에 나서 적들을 끌어들인 덕에 현재의 전황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적이 먼저 퇴각의 북을 울리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정말로 여기서 끝장을 보던지.

“잠깐 물러나서 숨을 돌리도록 하지. 물론 그 전에…저 날파리 같은 놈들부터 어떻게 해야겠지만.”

지원군이 한 번 돌파했음에도 타칸연합군의 포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하긴,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만 베면 이 전투를 단번에 거머쥐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쉽게 놓아주겠는가.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저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

“짓밟고 가버리지요.”

“역시 자네는 나와 마음이 잘 통한단 말이야.”

피식 웃은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옅어진 포위망을 향해 나란히 말을 몰았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말은 타칸연합군의 전사가 타던 것임에 분명한 안장 없는 말이었다. 주인을 잃고 쓰러져 있던 녀석에 그가 올라탄 것이다.

“뒤쳐진다고 해서 뭐라 하지는 말게. 그건 다 이 녀석 때문일 테니까.”

“놓치지만 말고 잘 따라오십시오.”

이때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상관모독이 섞인 농담이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껄껄 웃었고, 군터는 내쉬와 함께 앞장섰다.

“짓밟아버려라!”

얕아진 포위망은 기세를 탄 제국의 기마 앞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짠 그물은 헐겁기 그지없을 수밖에 없다. 거리를 벌리며 활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그들의 주 전술일진대, 무작정 돌파하려는 적을 어찌 저지할 수 있겠는가.

“막아!”

화살이 날아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낙마한 군졸들이 말과 함께 땅을 뒹군다. 그럼에도 제국군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는다.

와아아아아!군터를 필두로 한 제국군은 한 자루 창이 되어 느슨한 타칸연합군의 포위를 단번에 꿰뚫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포위군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포위가 뚫린 적군은 곧바로 그들의 양옆과 뒤에서 따라붙으며 화살을 퍼부었고, 많은 제국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제기랄!”

“장군! 지금은 그저 본군에 합류하는 것만을 생각하십시오!”

아그니스 체스퍼가 내뱉는 욕지거리 소리가 들린다. 그를 만류하려는 부관의 목소리도. 차라리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다가 생기는 피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새가 되니 화가 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 한 번 상대해줄까.’

군터는 신나하는 칸젤을 안장에 걸고 활을 들었다. 그리고 몸을 뒤로 젖힌 채 순식간에 세 발의 화살을 쏘았다.

히히힝!

세 발의 화살은 모두 정확하게 그들을 쫓아오던 타칸연합군의 전사들을 절명시켰다. 하나같이 목을 관통당한 전사들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주인을 잃은 말들이 대열을 이탈하며 뒤따르던 또 다른 말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오오! 훌륭하군!”

“별 것 아닙니다!”

군터는 계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았다.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그의 감각은 점점 예민해져가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몸은 녹초가 되었음에 분명한데 칸젤과 활을 쥐는 그의 손아귀는 조금도 힘을 잃지 않았다. 적의 움직임을 쫓는 시선 또한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군터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조금씩,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수한 피를 흡입하고 있는 칸젤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군! 이제 곧…….”

곧 본군과 합류한다.

군터는 그 말을 하려 했다. 눈과 마찬가지로 한껏 예민해진 그의 귀가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대로 말을 이었을 것이다.

으아아아악!

비명소리다. 이미 적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아군이 밀집한 본군의 영역으로 들어선 차다. 혹시 적이 끝까지 뒤따라 온 것일까?

아니다. 방향이 다르다. 비명소리는 뒤가 아니라 정면에서 나고 있다. 정면, 밀집한 아군 너머에서 말이다.

‘뭐지?’

순간 불길함이 뇌리를 스친다. 무언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군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으로도 무수한 아군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멀어서가 아니라 가려져서다.

오오오오오-!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던 찰나에 들려온, 귀에 익은 묵직한 소리.

소름이 돋았다.

쿠웅!

철벽처럼 늘어서 있던 아군의 벽이 뒤흔들렸다. 갈라지는 틈 사이로 일단의 기마가 다급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 중 가장 앞에서 말을 모는 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

항상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던 노장의 얼굴엔 참담함과 급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콰콰콱!

그와 함께하는 병력의 뒤편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아니, 그것은 숫제 분수가 아니라 폭포였다. 단지 아래가 아니라 위로 거칠게 올라가는 폭포였다. 그렇게 올라간 붉은 폭포의 물줄기는 그대로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비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또 다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폭포가 일어났다.

붉게 물들어가는 광경의 중심. 그곳에 역시 눈에 익은 그가 있었다.

‘포라칸!’

그야말로 선명하게 일렁이는 푸른 불꽃. 그것을 무구처럼 걸친 그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베어발기며 질주했다.

“이런!”

그는 정확히 카리비온 하야신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군터는 재빨리 활을 들고 쏘았다. 쏘고, 또 쏘았다. 그러나 그렇게 쏜 화살은 질주하는 포라칸을 멈추기는커녕 늦추지도 못했다.“하야신이여! 뒤다!”같은 광경을 본 아그니스 체스퍼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

군터와 카리비온 하야신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지막 순간. 노장의 눈은 체념한 듯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퍼걱!

창극이 갑주를 뚫고 나왔다. 노장의 몸이 허공으로 들리고, 그를 태운 말은 주인을 버려둔 채 앞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오오오오-!

승자의 포효였을까. 기쁨의 노래였을까.

포라칸은 그의 창에 꿰여 숨을 헐떡이는 카리비온 하야신을 바닥에 내리 꽂았다. 그리고 연달아, 앞발을 높이 치켜든 거대한 군마가 땅에 떨어진 장군의 머리를 짓밟았다.

콰직!

========== 작품 후기 ==========

수정작업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군요. 이북이 나가기 전까지는 마무리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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