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푸욱!
창끝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섬뜩한 쇠붙이가 살을 헤집는 감촉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적신다. 재빨리 몸을 기울이며 주먹을 후려쳐 창대를 박살냈지만 이미 끝부분만 남은 창날은 제법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큭!”
그가 휘청거리니 내쉬도 덩달아 휘청거린다. 이 강인한 전투마도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어쩌면 이 전장에서 또 한 번 동반자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같이 가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채앵!
발톱과 칸젤이 부딪치며 불똥이 튄다. 또 한 명. 아니, 또 한 마리의 짐승이 목 줄기를 물어뜯겠다고 달려든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군터는 몸을 부딪쳐 오는 커다란 수인병에게 밀려 낙마하고 말았다.
히히힝!내쉬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련했다.
등 뒤에 닿는 충격에 마른기침을 내뱉으면서도, 군터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려 수인병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박살난 이빨이 피와 섞여 튀었다. 수인병이 비틀대는 사이 군터는 짧게 쥔 칸젤을 재빨리 찔러 넣었다. 칸젤의 예리한 날은 그저 힘주어 미는 것만으로도 수인병의 두터운 가죽과 근육을 꿰뚫었다.
크허엉!
가까스로 숨을 돌리는가 싶었더니 다시금 위기가 찾아왔다. 또 한 마리의 수인병이 네 발로 땅을 차며 맹수처럼 덮쳐온 것이다. 칸젤을 회수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 군터는 이를 악 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퍼걱!
그 순간 우측에서 날아온 창 한 자루가 수인병의 허리를 꿰뚫었다. 투창의 힘을 이기지 못한 수인병은 허리가 꿰인 채 옆으로 나뒹굴었다.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피 칠갑을 하고서 달려온 할렌이 손을 내밀었다. 군터는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보이십니까? 아주 개판입니다.”
할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말대로다. 정말 개판이 따로 없다.
이제껏 겪었던 전장들 중 최악이다. 아무런 흐름이라는 것도 없이 그저 부딪치며, 죽어나간다. 흡사 투기장의 투사, 그보다 더 심한 처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병사들은?”
“백도 남지 않았습니다.”
내뱉듯 중얼거리는 말에 허탈함 외에 다른 감정은 없다. 할렌의 말을 들은 군터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시체. 시체. 시체.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어디에 눈을 두어도 보이는 것은 온통 시체와 시체가 되어가는 자들뿐이다. 사람과 말, 그리고 괴인의 식어가는 몸뚱이들이 무질서하게 쌓여가고 있다.
뿌우우우-!
또 한 번 뿔 나팔이 울린다.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심한 몰골이었다. 지금 그의 꼴을 보고 누가 그를 그 이름 높은 흑포장군이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비루해진 외관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았다. 베일 것 같은 살벌함과 짓눌릴 것 같은 위엄은 아직까지도 꺾이지 않은 그의 장군기와 같이 건재했다.
‘저 자는 이런 전장을 얼마나 겪어봤을까.’
빛나는 무공은 처절한 전장 속에서 세워진다. 그렇다면 아그니스 체스퍼가 황제로부터 흑포를 하사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장을 전전했을 것인가.
귀족가의 자제라고는 해도 그는 스스로 출세가도를 연 사내다. 이런 전장도 적지 않게 경험했을 터.
그래서일까? 그는 똑같이 지치고 상처 입었음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다. 그의 정신력은 극도로 단련한 그의 육체 못지않다.
“병사들을 모아라.”
“옛.”
남은 병사들이 백도 되지 않는다 한 할렌의 말은 정확했다. 백인장은 할렌 외에 한 명이 살았을 뿐이고, 병사들은 백인대 하나를 딱 꾸릴 수 있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부상을 입고 합류하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오백으로 왔던 군터 천인대 중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이제 이 구십 여 명이 전부다.
‘그때, 그냥 돌아섰더라면 이리 되지는 않았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흐레 전 자신이 한 선택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불러온 것이라는.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때 돌아섰더라면, 야밤에 쥐새끼처럼 탈영하여 위글로우로 달려갔다면 여전히 그날 밤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을 테니까. 피로 물든, 시체가 된 아그니스 체스퍼 및 제장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할렌이 꺼림칙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중얼거린다. 다른 병사들도 모두 마찬가지. 그들은 어쩌면 용기를 북돋는 격려의 한 마디를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도 마냥 두려움에 젖은 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자리에 남은 그의 모든 수하들은 능히 용사라 할만 했다. 하여 군터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라. 언제나 앞길에는 내가 설 테니.”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이미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나 짤막한 찰나의 상념 뒤에 개운한 마음이 들며 힘이 차오르니, 이게 무슨 기현상인지 그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다. 아무려면 어떤가.
푸르륵!
쓰러졌다 일어선 내쉬가 다가왔다. 본래 윤기 넘치는 검은 털을 자랑했던 내쉬는 끈적거리는 붉은 얼룩을 군데군데 크게 달고 있었다.
와아아아!
여전히 살기 넘치는 함성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벌써 몇 번이나 싸웠는지, 얼마나 적을 죽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끝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자, 가자. 일직선으로 쭉 나아가는 거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잊는다. 무시한다. 베어 가르는 칼이 멈칫하면 상하는 건 칼날뿐이니.
콰직!
붉은 피가 다시금 얼굴을 적신다. 군터는 부릅뜬 눈에 아직도 가득한 적들을 담았다.
*
“으음!”
아그니스 체스퍼는 식어가는 그의 애마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까지 엉겨 붙던 수인병이 기어이 그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이다.
“…흐흐.”
살기 넘치는 시선이 그를 둘러싼 적들을 훑었다. 한쪽 무릎을 꿇었을지라도 서릿발 같은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기에, 적들은 감히 그에게 먼저 다가오지 못했다.
“한심한 쓰레기 놈들. 차라리 저 짐승들이 낫구나.”
짐승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두려워하지만 물러서거나 달려들기를 늦추지 않는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난 용기가 아니라 이성을 잠식한 광기였으나, 그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것이 더 나았다.
이 시끄러운 전장을 보라. 이곳에 어울리는 건 용감한 군인이 아니라 이성을 잃은 광전사다. 미치지 않은 자는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오오! 원신이여. 이곳에서 이 몸을 거두시겠다면 기쁘게 당신을 맞이하겠나이다. 하지만 부디…마지막으로 당신의 후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후들거리는 왼쪽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장인이 근 한 달 여 동안 망치를 두들겨 만든 단단한 갑주가 흘러나오는 피에 절어 너덜거렸다.
쿵!
창대 끝을 땅에 박아 넣으니 둘러싼 적들이 움찔 거린다. 그 꼴이 꼭 사자를 둘러싼 개새끼들과 같지 않은가. 아그니스 체스퍼는 보란 듯 씩 웃었다.
‘적어도 이 미천한 종을 둘러싼 잡놈들은 모두 길동무로 당신의 앞에 끌고 갈 수 있기를.’
돌진해 들어가는 병력의 옆구리를 절묘하게도 끊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야만인 놈들 중 병사를 부릴 줄 아는 놈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덕분에 그는 소수의 친위대와 함께 고립되고 말았고, 아군 병력은 저 뒤편에서 가로막는 적에게 발이 붙들려 있다. 이 포위를 풀어줄 지원 병력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비관적인 상황.
‘너무 지나쳤는가.’
허리를 끊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다. 계산이 어그러진 것은 수십의 수인병이 들이닥치면서부터였다. 거센 말발굽에도 움츠러들지 않는 괴물들은 그들의 돌격을 무식하게도 정면에서 들이 받았다. 힘이 빠진 병력으로는 괴물들의 두터운 피부인지 갑각인지 모를 것을 뚫어낼 수가 없었고.
크허엉!일반적인 수인병들의 그것보다 월등히 크고 거친 포효. 아그니스 체스퍼의 올라갔던 입 꼬리가 섬뜩하게 비틀렸다.
‘그래. 네놈. 다른 건 몰라도 네놈만큼은 원신의 앞까지 끌고 가주마.’
본래는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수십 수인병이라 해도 가속이 붙은 그와 친위대를 완전히 멈춰 세우기에는 부족했으니.
그러나 단 하나. 일반적인 수인병과는 덩치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특이한 수인병 하나가 그를 가로막았다. 지금 차갑게 식어가는 애마의 목에 발톱을 깊숙이 박아 넣은 것 또한 그 특이한 수인병이었다.
“reoisure(물러서라).”
전사들이 길을 연다. 그 사이로 흉악한 얼굴에 큼지막한 상처가 난 수인병이 섬뜩한 울음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직접 선물해 준 훈장이었다.
“더 깊게 그어줬어야 했거늘.”
삐걱거리는 몸에 힘이 스며든다. 그 힘의 이름은 분노였다. 저따위 추악한 괴물 녀석 따위에게 가로막혀 오랜 부하들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노회한 군인으로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네놈 따위에게 쓰려고 아껴둔 힘은 아니다만, 어쩔 수 없구나.”
수십 년 여정의 끝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래도 아쉬움은 없다. 칼날 위를 걷는 인생에 끝이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zeri…lu adenahayan(우두머리가 내 몫이 되는구나).”
수인병이 얼굴의 상처를 긁으며 말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의외라는 듯 눈을 치떴다. 이제껏 그는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이성을 유지하는 수인병도 보지 못했었다.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라 이거로군. 아까운 건 여전하다만, 그래도 조금은 낫구나.”
말도 통하지 않건만 의미 없는 말들을 던진다. 틈을 보는 것이다. 특히 아그니스 체스퍼는 눈앞의 거대한 수인병뿐 아니라 더 멀리서 자신을 둘러싼 적들까지 살폈다.
‘한 번이다. 최대한 많이 데려가주마.’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숨을 고르던 차였다.
크아아악!
히히힝!
그때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침착하게 가라앉았던 아그니스 체스퍼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주한 수인병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발톱을 드러냈다. 무언가 이상을 느낀 거겠지. 막다른 구석에 몰아넣은 먹이가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을 것이다.
커허엉!
결국 수인병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내심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짐승 같은 상판에 가린 인간으로서의 얼굴은 모르지만, 마흔도 안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경솔하고, 그런 주제에 쓸 데 없는 고집만 산 녀석.
‘어설픈 애송이 자식!’
하나 남은 적을 상대로 이 많은 인원이 시간을 잡아먹히다니, 이런 촌극이 어디 있는가. 만약 그였다면 포위한 병력으로 하여금 화살을 쏴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1대1로 적장의 목을 벤다? 멋지긴 하지만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이 아닌가.
“장군!”
‘군터!’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굳은 입 꼬리를 다시금 올라가게 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떨어지는 앞발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피하면서 훤히 드러난 가슴에 창을 찔러 넣었다.
크아아아아-!
귀를 멍하게 만드는 우렁찬 괴성이 기분 좋게 터져 나왔다.
*
“관재중신. 설명 좀 해주겠소?”
살마드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싸늘한 눈으로 계단 위에 선 자를 노려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여기서 굳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영민하신 성주는 능히 짐작하실 텐데요.”
관재중신 아샤즈 테오모렌. 그는 열 네 개의 계단 위에서 성주와 전(前) 흑포장군을 내려다보았다. 예의를 차린 말투와는 달리 그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모인가. 관재중신께서 생각보다 대담한 구석이 있으셨구려.”
아란딜 페레모어가 담담히 중얼거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이 아샤즈 테오모렌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달관한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자신을 소인으로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내 심장은 지금도 불안하게 벌렁거리고 있소. 평생 글줄이나 읽고 쓴 내가 무슨 배짱이 있어 제국의 성주와 장군을 도모했겠소. 나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건 바로 그대들이오. 그대들의 무능함과 제국의 차별 때문에 이 땅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기에 내가 나선 것이오.”
“역적이 늘어놓는 궤변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어설픈 합리화는 집어치우고 죽이려면 죽여라.”
바스카드 일레이저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과연.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이건가?”
“아무렴. 단지 네놈 같은 간신배에게 최후를 맞는 것이 어이없고 애석할 따름이다.”
수중에 칼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스스로 목을 그어버리기라도 했을 것 같은 결연함. 아샤즈 테오모렌은 불편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대는 어떻소, 장군? 마지막 한 마디 정도는 들어드리지.”
아란딜 페레모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벌한 눈빛을 하고서 그들을 포위한 병사들의 수가 족히 이백은 넘어 보였다. 거기에 이들 외에도 또 다른 안배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전하. 당신의 말을 따를 것을 그랬군요.’
반쯤 폐인이 된 몸으로 무슨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신임 성주의 초빙은 구실에 불과했다. 단지 이 땅에 남아, 남은 적들과 맞서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이다.
“거인(巨人)은 소인(小人)에게 죽는다. 거인의 눈높이는 소인이 있는 아래를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거인이고, 내가 소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가?”
“탓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저 살피지 못한 불찰이 있었을 뿐이니.”
아란딜 페레모어는 검을 들었다. 소싯적에 비하면 힘줄이 잘린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아귀다. 그러나 평생을 싸워온 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평화로이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여라!”
다가오는 무수한 창칼을 마주하며, 아란딜 페레모어는 앞으로 나아갔다.
========== 작품 후기 ==========
칸젤이 부러진다니, 흥미로운 추측이네요.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죠?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