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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7화 (207/1,064)

<-- 2부 -->

전투 중에 울리는 나팔이나 북 소리가 얼마나 크더라도 병사들은 듣지 못한다. 당장 그들은 코앞에 있는 적이 세상의 전부기 때문이다. 잘 훈련된 정예라고 해도 병졸들은 그런 면에 있어 오합지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런 병졸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다르다. 천인장들은 물론이고, 백인장이나 심지어 십인장만 되어도 전투를 치르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안다. 누군가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게 마련이다. 아니면 반대로 자리에 있다 보면 그런 능력이 길러지는 것일지도 모르고.

뿌우우우-!

격전의 와중에도 뿔 나팔 소리는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얼핏 들으면 뿔 나팔 소리라는 것이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 같지만, 예민하게 감각을 기른 군인들은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약속된 신호에 쏠린 그들의 눈이 고지에 솟은 깃발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뭉쳐라! 디켈리 백인대! 모두 집결하라!”

“서둘러 움직여!”

족히 수천 이상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난잡하던 전장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군터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제국군은 본래 삼군으로 나뉘어 나란히 포진해 있었다. 그랬던 것이 타칸연합군이 밀고 들어오며 중군이 조금 뒤로 물러나면서 적아가 뒤엉킨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형국에, 아그니스 체스퍼가 명령을 내림으로서 좌우의 양군 일부가 조금씩 날개를 펴갔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펼쳐 알을 끌어안듯,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타칸연합군을 감싸는 모양새가 되어갔다.

“포위하시려는 겁니까.”

“아무리 적이 강하고 수가 많다 해도 결국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수는 정해져 있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놈들은 완전히 눈이 돌아갔어. 뒤에서부터 좁혀 들어오가도 눈치 채지 못할 게야.”

“가둬놓는데 성공한다 해도, 놈들이 뚫고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타칸연합군의 수인병들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는 중이었다. 그 기세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맹렬하여 저지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저런 놈들이 천이 넘어가는데 포위를 한다 한들 제대로 가둬놓을 수 있을까? 군터는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뚫고 나가겠지. 그때는 다시 가두면 돼. 저놈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몇 번이고 다시 가둘 수 있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그가 행한 일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잠깐 전장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흐름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할 아군까지 정확히 짚어내는 그의 군재라면 말이다.

“놈들이 그물을 찢는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놈들은 지치고, 다치겠지. 놈들은 착실히 사냥 당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도 크게 날 것이라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전면전이 아닌가. 먼젓번과는 또 다르다. 이번에야말로 결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그들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버티면 되는 겁니까?”

“그래. 생각 있는 놈이 있다면 나를 치러 오겠지.”

고생길 열렸다는 말을 하면서도 호탕하게 웃는다. 할렌의 표정이 지금쯤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내심 얄미워 죽으려고 하지 않을까.

전투 중에 실시간으로 지휘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물론 지휘관이 지휘를 제대로 내려야 하며, 그 지휘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받쳐줘야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조건들이 갖춰지기만 한다면 전투에서 크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두 조건 외에 또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휘관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전장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춘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휘관이 전장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아그니스 체스퍼는 지금 이 자그마한 언덕 위에 오른 것이었다. 전장을 한 눈으로 다 보기 위해서.

그러나 고지에 오르는 행위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동시에 가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만큼 시야가 넓어지지만, 그 대신 아래에 위치한 자들이 쉽게 그를 볼 수 있게 된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힘과 맹렬함을 얻은 대신 이성을 날려버린 것 같은 수인병들은 어떨지 모른다고 쳐도 2파로 온 적의 기병들이 장님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다. 더군다나 요란하게 뿔 나팔까지 불어버렸으니, 적장의 목을 베려고 눈이 돌아가서 달려오지 않겠는가.

“많이들 몰려왔으면 좋겠군. 아! 이건 자네들에게 너무 미안한 이야기인가?”

“장군께서는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라도 정치는 못 하시겠습니다. 농담이든 거짓말이든, 표정 연기가 하나도 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하하핫! 할 생각도 없다네. 손아귀에 힘이 빠질 때 즈음이면 물러나고 한적한 곳에 장원이나 차려야지.”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데 화살 서너 대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군터는 재빨리 그것들을 쳐냈지만 미처 처리하지 못한 한 대는 그대로 아그니스 체스퍼에게 향했다.

“흥! 직접 오지는 못할망정 같잖은 수작을!”

제법 날카로운 유시였음에도 아그니스 체스퍼는 간단히 고개를 젖혀 피해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사나운 눈이 언덕 아래서 접근해오는 일단의 기마를 포착했다.

“고작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내 목을 가져가려거든 열 배는 더 몰려와야 할 것이야! 크렘보르!”

“옛! 장군!”

“시체들을 옮겨 벽을 쌓아라! 경사를 오르는 놈들은 자네가 맡는다. 알겠나?”

“명을 받잡겠습니다!”

“놈들은 절대 이 언덕을 오르지 못한다! 먼 길 달려오는 놈들은 우리가 먼저 족족 모조리 꿰어 죽여 버릴 테니까 말이다! 자! 따르라!”

아그니스 체스퍼는 어느 정도 적이 다가오자 직접 선두로 나서서 올라오는 적을 요격했다. 오르막을 타느라 속도가 줄어든 적에게 가속이 붙은 그들이 역공을 가하니 적은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휩쓸렸다.

*

“으음!”

포라칸은 기어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 손에 쥔 창은 지팡이처럼 땅을 짚었다. 입가에서 흐른 피가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

피는 입에서만 흐르지 않았다. 명치 바로 위의 가슴에서도 굵은 핏줄기가 흘렀다. 한 손으로 붙들며 억누르지만 붉은 핏물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와 땅을 적셨다.

“내가……. 이런 바보 같은.”

허탈함이 감도는, 힘 빠진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 덕에 제법 깊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포라칸은 안도할 수 있었다.

“대족장. 그 힘은 위험합니다.”

“포라칸.”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빛에 휩싸인 채 서 있다. 그 빛은 격전의 현장 밖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무자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자네를 해하였군.”

목소리에서부터 괴로운 심정이 묻어났다. 자신의 손으로 가장 총애하는 부하이자 지기를 공격하고 피를 보게 하였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할까.

“이까짓 부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포라칸은 조심스럽게 다가온 무자에게 상처를 내보였다. 포라칸이 넝마가 된 갑옷을 뜯어내듯 벗어던지자 무자가 약수로 상처를 적시고 치료를 시작했다.

“전황이 시급한데 대족장이라는 자가 이 꼴이라니. 한심하군.”

“여기서 그게 다 보이십니까?”

“아직은. 조금 더 안정화가 되면 신안(神眼)도 감기겠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보인다네. 바르바피들이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어. 전사들은 유인당하여 낭패를 치르고 있고. 아그니스 체스퍼도 제법이지만, 역시 우리의 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군.”

짧은 순간에 저런 판단을 내린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재는 물론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저곳에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타칸연합국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초원민족들은 본래 부족 단위로 잘게 나뉘어 살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한 울타리에 가두어 이끄는 것이 바로 타르가이 베르겐이다.

그는 압도적인 힘과 권위로 야생마 같은 자들을 억눌렀으나, 그러한 통제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다툼이 있는지는 타르가이 베르겐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끝없이 목 베고 처벌하며 공포로써 다스릴 수도 있었다. 허나 그것은 또 다른 일시적인 처방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필요한 건 공포정치나 다른 방편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남이었던 자들이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고, 한 민족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타르가이 베르겐일지라도 그것만큼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시간을 억지로 당기는 일 따위는 진짜 신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때문에 그는 피를 택했다. 이번 전쟁은 베이고르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과 공조하며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타칸연합국이라는 이름으로 초원 밖의 적들과 싸우면서 피를 흘리기 위함이다. 그렇게 흐른 전사들의 피는 새로운 타칸연합국을 탄생시킬 거름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한들, 너무 말리는군.”

수십 명의 무자들이 안간힘을 쓰며 신을 잠재우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잠들지 않은 신의 눈을 통해 타르가이 베르겐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고전 중인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르바피들은 점점 조여 오는 제국군의 포위망 속에서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고, 바르바피가 아닌 전사들은 사냥꾼의 덫을 향해 열심히들 달려들고 있었다.

“좋지 않다.”

힘의 균형 자체만을 놓고 보면 아직까지는 괜찮다. 오히려 제국군보다는 이쪽이 더 유리하다. ‘가호’를 등에 업은 바르바피들이 대활약을 해준 덕분이다. 실제로 지금도 포위망을 형성한 것은 제국군이지만 피해는 비등하게 가져가고 있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의 흐름은 꽤나 좋지 않다.

“이끌 자가 없군. 모두가 따로 움직이고 있어.”

지휘관의 부재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슷비슷한 지위의 지휘관들이 각기 따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대로 다 따로 움직이는 그들을 묶어줄 최고 지휘관 한 명만 있었던들, 저렇게 적장의 의도대로 휘둘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전사들을 이끌고 있는 최고전사들은 대부분 그 출신 부족이 다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어우러질 수 없는 자들로, 대족장인 타르가이 베르겐이 아니라면 포라칸 정도는 되어야 그들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그 둘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이 후방에 남았고, 그리하여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내 실책이군. 힘으로 너끈히 밀어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적의 능력이 예상보다 뛰어났을 뿐입니다.”

“그걸 헤아리지 못한 것이 내 실책이지. 통감하고 있으니 애써 감싸줄 필요 없네.”

하늘을 올려다보던 타르가이 베르겐이 고개를 내려 포라칸을 보았다.

그를 속박하는 빛 속에서,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진한 자줏빛 무리가 손끝에 일었다.

“지금 내가 이 꼴이니, 미안하지만 자네가 나서줘야겠다.”

빛 무리는 나비가 날갯짓하듯 천천히 날아 포라칸의 몸에 스며들었다. 무자가 손을 보던 상처가 아무는가 싶더니, 피로가 드러나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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