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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6화 (206/1,064)

<-- 2부 -->

“대족장.”

[…….]

타르가이 베르겐은 말이 없다. 그는 전사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길게 한 번 울부짖은 후로 눈을 감은 채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포라칸은 제법 떨어져 있었음에도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불길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을 굳게 만드는 꺼림칙함. 그의 몸에 내린 축복의 영향인 것일까.

[크르…….]

“……!”

숙인 고개 아래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흠칫한 포라칸은 대뜸 허리춤의 월도를 빼들고 타르가이 베르겐에게 달려들었다.

콰앙!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그는 그보다 더 빠르게 튕겨져 나갔다. 꾹 다문 입술에서는 못 다 누른 신음이 삐져나오고 두터운 짐승의 뼈도 너끈히 갈라내는 월도는 강풍을 만난 들풀마냥 불안하게 흔들렸다.

“대족장! 정신을 차리십시오!”

포라칸이 다급히 외쳤으나 그 말을 들어야 할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고 다섯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포라칸의 월도가 빛줄기들을 갈랐지만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추스른 몸이 다시금 허공을 날았다.

“크윽!”

“대전사님!”

“가만히 있어라! 내가 해결하겠다!”

포라칸은 전사들이 다가오려 하는 것을 제지시켰다. 그들이 끼어들어봐야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어설프게 대족장의 흉성을 돋울 뿐이다.

“창을 다오!”

호위 전사 한 명이 그의 창을 던졌다. 포라칸은 금이 간 월도를 바닥에 내던지고 날아온 창을 받아들었다.

“아무도 끼어들지 마라!”

그의 시선은 비틀거리는 타르가이 베르겐에게 고정 되었다. 실체화 된 영력이 안개와 같은 형상으로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폭주의 전조. 포라칸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포라칸은 타르가이 베르겐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단지 타르가이 베르겐이 포라칸을 굳게 신뢰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직 그만이,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을 멈춰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했건만.’

타르가이 베르겐은 옛 신의 유해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포라칸이나 바르바피들이 받은 축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인간인 그의 육신과 영혼에 신이 스며든 것이니,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를 따르는 초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온전한 신은 아닐지언정 반신(半神)정도는 된다 할 수 있다.

치켜세우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유해일지언정 신이다. 인간으로서 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터무니없는 일이다. 마치 자그마한 잔 안에다 커다란 양동이 분량의 물을 들이붓는 것과 비슷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하니 자연 내용물이 흘러넘치게 되고, 뒤덮이게 되는 것이다.

타르가이 베르겐 역시 그러했다. 그는 그야말로 범인을 월등히 뛰어넘는 의지로 그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때때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은 그가 가진 신의 힘을 발휘할 때마다 두드러지곤 했다. 특히 지난번 살마드 공성전에서 힘을 썼을 때가 기점이었다. 그 후로 그는 이전보다도 더 힘쓰기를 자제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몰두했다. 그러지 않으면 신의 흉성이 그의 인격을 침범하려 이빨을 드러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오늘, 타르가이 베르겐은 또 다시 신의 힘을 사용했다. 그 대가로, 위태롭게 유지하던 균형이 깨어지고 말았다.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평범한 전사들은 안 된다. 그들의 죽음은 신의 갈증을 일깨운다. 흉성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키울 뿐이다.

바르바피들도 안 된다. 그들의 힘은 모두 타르가이 베르겐이 받아들인 옛 신에게서 온 것. 신의 힘으로 신에 대행하려 하는 행위 자체가 신을 자극하고 말 것이다.

결국은 그뿐이다. 그는 바르바피들과 마찬가지로 축복을 받았지만, 그 힘이 없이도 신에게 맞설 만큼 강하다. 오직 그만이 신의 흉성이 가라앉을 때까지, 타르가이 베르겐이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음이다.

“속히 무자들을 불러와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 끼어들지 말도록!”

“옛!”호위 전사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크으으…….]

포라칸의 굳은 시선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타르가이 베르겐. 아니, 신의 망령에게 가 닿았다.

*

피잉!

화살이 날아들었다.

뒤로 휘돌린 창대 끝이 화살을 쳐내고, 칼을 찔러온 적의 머리통을 반으로 갈랐다.

영리한 적들은 그가 아니라 그가 타고 있는 내쉬를 노리기도 했다. 직접 그의 목을 노리는 것보다 더 성가신 공격이었다.

“내가 제국의 장군, 아그니스 체스퍼다! 이 야만인 놈들아! 내 목을 가져가라!”

“곤란하군요 정말.”

할렌이 다가와 말했다. 피로 세수를 한 것 같은 몰골이다. 숨을 돌리며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가끔씩 목청껏 소리치며 날뛰고 있는 흑포장군을 향했다.

“적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 효율적인 방법이지.”

“그렇지요. 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눈에 띄는 복장을 한, 누가 봐도 신분이 높아 보이는 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으면 설령 최고 사령관임은 모른다고 해도 적의 주의가 끌릴 수밖에 없다. 적의 공세가 한쪽에 쏠린다면 자연히 다른 쪽은 느슨해지기 마련. 숨을 돌린 아군이 힘을 내어 반격할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할렌의 말처럼 공격을 끌어오는 쪽이 버틸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총대장인 아그니스 체스퍼가 당한다면 다른 쪽에서 여유가 생기든 힘이 생기든 다 소용 없는 일이 된다.

“그러지 않게끔 우리가 힘을 내야겠지.”

“피해가 큽니다.”

“총대장이 죽으면 군 전체가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피해를 논할 필요도 없어지겠지.”

할렌의 마음을 그도 안다. 총대장 호위 임무를 맡고 있는 상황에서 호위 대상이 저렇게 날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호위를 맡은 그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이다. 여기서 ‘우리’란 없다. 굳이 있다면 수만 제국군 전체가 ‘우리’일 것이다.

밀리느냐, 밀어내느냐. 패하느냐 승리하느냐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길을 열어라!”

“장군! 위험합니다!”

“전장에서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적의 칼을 피하는 것보다는 칼을 쥔 적을 죽이는 것이 더 쉽다! 적을 앞에 두고 내 어찌 홀로 몸을 사리겠는가! 모두 따르라!”

아그니스 체스퍼는 만류하는 부하들을 물리치고 직접 선두로 나왔다. 그는 양손에 든 창칼을 휘두르며 꽉 틀어 막히다시피 한 전장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사납게 날뛰는 수인병들조차 그의 맹렬한 기세는 막지 못했다. 적들은 덤벼드는 족족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어디까지 가시렵니까.”

군터 역시 지지 않고 칸젤을 휘둘렀다. 금세 아그니스 체스퍼의 옆까지 따라붙어 또 한 명, 거친 수인병의 목을 베어내고서 숨을 헐떡이는 그에게 말을 붙였다.

“글쎄. 걱정 되나?”

피가 튀어 번들거리는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군터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옆머리로 날아든 화살을 쳐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호위로서 신경을 써야 하니까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풀어주시지요.”

“그럴 수야 있나. 언제 또 그 사자 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말이야. 놈이 오면 자네와 내가 함께 사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그니스 체스퍼가 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우선 저기까지만 가보려 하네. 경치가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않나?”

“길은 제가 열어드리지요.”

주변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는지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야 어쨌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꽤나 상쾌한 얼굴들이다. 놀러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실제로, 지금 군터는 그 비슷한 마음이었다.

“느리다 싶으면 바로 앞지를 걸세!”

“잘 따라오기나 하십시오.”

전장의 한복판이다.

혼란, 긴장, 두려움,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은 당연히 군터에게도 있다. 그 역시 그러한 감정들을 크든 작든 느끼고 있다. 특히나 조금 전 하늘 위로 치솟은 빛기둥은, 그로 하여금 그것을 보는 순간부터 왠지 모를 답답함과 여타 복잡한 감정들에 사로잡히게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껏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유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하들에게서 느끼는 신뢰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그 자신과 동격이라 할 만한 이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아그니스 체스퍼.

그는 완전하다.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이 없다. 거기에 평범한 사내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호탕함마저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도 마음에 드는 사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크게 와 닿는 것은 그와 함께 싸우며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든든함이다. 군터는 그와 함께, 그의 옆에서 전장에 나서며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발자국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따스한 등불이 나타난 것과 같은, 감동 아닌 감동이었다.

크허엉!

울부짖는 수인병의 큼지막한 입에 칸젤을 쑤셔 박았다. 수월하게 입 안을 찢어발기며 들어간 칸젤의 창극이 목 뒤로 튀어 나왔다. 힘을 잃은 발톱이 그의 팔뚝을 할퀴었으나 군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생기를 잃어가는 적을 떨쳐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이래, 내쉬는 멈추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거나, 뛰어넘기 위해 발돋움을 한 적은 있을지언정 한 자리에서 멈춰서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군터는 칸젤의 기형적으로 긴 창날을 십분 활용했다. 한 번 크게 휘두르면 그 궤적에 걸린 적들은 모두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간간이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순간에 날아드는 화살은 몸을 틀어 최대한 갑옷이 감싼 부위로 받아냈다. 그러면서 내쉬가 계속해서 달릴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하아압!”

아그니스 체스퍼와 그의 친위대, 그리고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은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한 번 뚫린 길을 넓게 헤집었다. 군터가 멈추지 않은 만큼, 그들도 멈추지 않았다. 삼방(三方)에서 짐승들의 이빨이, 적의 창칼이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힘으로 부딪치며 버텨내거나 오히려 물리쳤다.

히히힝!

내쉬가 거친 콧김을 뿜었다. 승자가 내지르는 함성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앞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

군터는 잔뜩 힘이 들어간 녀석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눈앞의 경치를 감상했다.

와아아아아!

둥! 둥!

실로 장관이었다. 수만의 병력이 처절히 생사의 혈전을 벌이고 있건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장엄하게만 보였다. 신경 써서 보면 피아와 소속 부대까지 구별이야 가겠다마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눈에 보는 광경이란 그저 쉼 없이 부딪치고 죽어나가는 전쟁 그 자체였다.

“뭐가 보이는가?”

아그니스 체스퍼가 피 묻은 무기들을 털며 말을 몰아왔다. 군터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의 갑옷 곳곳에도 화살들이 박혀 있었다. 개중에는 깨져서 상처가 드러난 곳도 몇 있었다.

“장군께서 바라시는 것은 아닐 겁니다.”

“솔직하군.”피식 웃은 그는 곧 날카로운 눈을 한 채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기수!”

“옛!”

“적기 둘, 흑기 하나를 좌측에 들어 올려라!”

해당하는 색의 기를 지닌 기수들이 명령받은 대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준비가 완료되자 아그니스 체스퍼는 직접 큼지막한 뿔 나팔을 입에 물었다.

뿌-우우우우우!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듣고도 남음직한 길고 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응원의 말씀들 모두 감사합니다.

수정은 전회에 걸쳐서 이루어질 겁니다.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표지 타이틀 작업이 늦어진다고 하네요. 12월 중순? 즈음에야 완료가 된다고 하니... 일단은 순정 이미지 파일로라도 표지를 교체해놨습니다.

고화질 이미지는 https://twitter.com/highmoon07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만든 개인 트위터입니다. 작품설정에는 2M이상 이미지가 업로드가 안 되는 관계로... 큰 화면, 고화질로 보고프신 분들만 찾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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