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05화 (205/1,064)

<-- 2부 -->

생명은 죽음 위에 꽃핀다. 하늘과 땅이 썩어가는 육신을 나눠 갖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태어나고, 죽고, 사라진다. 그것은 이 땅에 나온 만물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들판처럼 넓고, 산처럼 높게 쌓인 시신 위. 까마득한 오랜 시간 동안 쓰러져 있던 고귀한 존재는 그 거부할 수 없는 흐름에서 한 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그는 한때, 하늘 아래 해와 달이 굽어보던 산천초목을 모두 다스리던 지배자였다.

그는 한때, 모든 것을 두려움에 질리게 하는 흉성(凶星)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전율의 전쟁 속에서 그의 위대한 정신과 육신은 갈가리 찢겨 그가 거하던 대지에 깊이 파묻혔으나, 초원을 떠도는 바람은 지워지지 않는 그의 체취를 깊게 머금었다.

“오…아아아…….”

타르가이 베르겐.

죽은 신을 계승하고, 초원의 가장 짙은 바람을 품에 안은 그는 괴롭게 신음했다. 그의 얼굴에 굵고 얇은 핏대가 툭! 툭! 하는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일어섰다.

“으…으…크르륵……”

그는 윗옷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창백한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며, 사냥을 나갈 때 입는 얇은 가죽 바지 하나만을 걸친 채 제국군 쪽을 바라보며 섰다.

콰득! 콰드득!

근육과 흉터로 얼룩진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햇살이 내려와 닿던 살결 아래서 거무튀튀한 가시 같은 것들이 불쑥 솟아나기 시작했다. 툭 튀어온 그것들은 꽃 봉우리가 터지듯 끄트머리에서부터 몇 갈래로 갈라지더니 빠르게 내려와 살갗을 뒤덮었다. 위에서 떨어진 진흙이 넓게 번지듯, 삽시간에 피부 전체를 뒤덮어버린 그것은 마치 갑각 같은 모양새로 변해갔다.

“크아아아아아……!”

거칠게 흩날리던 흰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었다. 동시에 전신에서 같은 색의 털들이 자라났다.

혼이 거세게 요동치매, 둘러쓴 껍질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변형됐다. 고통스런 신음 속에 갖춰가는 형상은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옛 위대한 존재를 닮아 있었다.

“대족장. 괜찮으십니까.”

육신의 변이가 끝에 다다랐을 즈음에 포라칸이 다가왔다. 그는 우려스런 눈으로 반쯤 주저앉아 있는 대족장을 보았다.

[괜찮다…문제없다.]

의식하지 않고 낸 말이었으나 자연스레 육성이 아닌 의성으로 흘러나온다. 지금 타르가이 베르겐의 존재가 인간을 벗어났다는 증거다.

“대족장에게서 정제되지 않은 사나움이 느껴집니다.”

[내 의지가 흐트러져 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도 그에게 더 가까워져가고 있다. 오래 끌 수는 없어. 준비하게. 전사들을 움직여라.]

“…예.”

바르바피들이 앞으로 나섰다. 말에 올라 있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조금 전의 타르가이 베르겐이 그러했듯, 그들 역시 모두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저 맨몸으로 적을 바라보며 섰다.

*

둥! 둥! 둥!

진군의 북이 울린다. 장교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목청껏 전투준비를 외쳤다. 제국군은 바짝 긴장하며 다가올 전투를 기다렸다.

그러나 달려오는 적의 전열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긴장한 것도 잊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뭐지? 저 짐승 같은 야만인 놈들이 싹 다 미쳐버린 건가?”

말이 없이 두 다리로 달려서 오고 있다. 그런 데다 손에 쥔 무기도 없다. 상당수 군졸들이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 뜨거나, 손으로 비벼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보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미친…….”

“무슨 꿍꿍이지?”

지휘관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달려오는 적 너머를 응시했다. 두 다리로 달려오는, 손에 무기도 들지 않은 전열 뒤에서 2파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저놈들, 모두 수인병이로군.”

당연한 추측이었다.

“허나 저렇게 대놓고 앞에 둔 채 들어오다니.”

비스링이 함락 당했던 날 벌어진 회전에서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인병이었다. 난전에서 발휘되는 그들의 괴력은 중무장한 보병들로도 막아낼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평범한 전사와 같이 무장하여 존재를 감췄다. 그러다가 한 번 부딪쳐 싸우기 시작하면 즉시 변이하여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접근하기 전에 정체가 드러나면 수인병들은 그리 무서운 적은 아니다. 타칸연합군도 그것을 알았기에 일단 가까이 붙어 싸우기 전까지는 평범한 전사인양 위장을 한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갑자기 적장이 백치가 된 게 아니고서는 저렇게 대놓고 달려들 이유가 없다.

“필시 노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주의하라!”

아그니스 체스퍼의 호령에 제국군은 크게 당황하는 바 없이 기존의 대형을 유지하며 적을 기다렸다.

어떤 얄팍한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다. 정공으로 맞서면 그만이다. 그것이 아그니스 체스퍼가 수십 년 동안 군인으로 살아오며 체득한 지혜였다.

“제장들은 맡은 자리에서 명령을 기다려라!”

군터와 그의 수하들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곁에 머물렀다. 독립부대로 활동하기에는 그간의 전투로 인해 인원이 너무 줄기도 했고, 최고 사령관의 호위 겸 유사시를 위한 창의 역할이다.

“한 번 견디고 2파(波)로 밀겠다는 것인가?”

기세 좋게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는 쉼 없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어떻게든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발악이라면 발악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중인 것이다.

군터는 그의 희미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내심 감탄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용장으로 이름이 높은 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군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용맹만으로는 장군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과감함과 신중함. 좀처럼 섞이지 못할 것 같은 자질을 동시에 갖춘 자만이 일군을 이끌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나저나…이건가.’

막시밀리언이 서신으로 이야기한 열흘.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적의 행동. 바보가 아닌 이상 연관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달려오는 저들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추측대로 수인병. 초원인들이 바르바피라 부르는 전사들이 분명하다. 특유의 희미한 노린내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미친 놈 취급이나 받겠지만, 군터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인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당연히 두렵지도 않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싶을 뿐.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끌려나온 전장이 아니다. 피할 수도 있었던 싸움에 굳이 발을 담갔다. 어찌 자그마한 각오도 없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군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오는 적을 응시했다.

1파가 기병이 아닌 보군. 때문에 적이 가까워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무기도 없이 그저 앞으로 달려오기만 하는 그들의 모습이 적잖이 괴이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온다! 중수-! 사격준비!”

“사격준비!”

적이 점점 사거리의 끄트머리에 가까워졌다.아그니스 체스퍼가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발…….”

그의 입이 열리고, 채 한 마디가 흘러나오기도 전.

쿠웅!

있을 수 없는 충격이 모든 이들을 휩쓸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과 같았다. 어디선가 갑작스레 달려들어 몸을 그대로 꿰뚫고 지나갔다. 거센 바람이 한 순간에 육신 안팎, 그리고 정신마저 차갑게 식혔다.

“…뭐지?”

아그니스 체스퍼가 발사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군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청명하던 하늘에 기미도 보이지 않던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희던 구름이 검게 물들어가는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누군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군터는 그제야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역풍.’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은 정면에서부터 밀려왔다. 풍압이 상당했다. 이대로라면 화살을 날려봐야 얼마 가지 못하고 꺾이고 말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지금 이 순간, 그뿐 아니라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군터는 칸젤을 쥔 손에 땀이 참을 느꼈다.

“장군! 사격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직이다! 기다려라!”

아그니스 체스퍼도 바람의 변화를 느꼈다. 이대로 쏴봐야 소용이 없다. 갑작스레 성이 난 바람이 꺾이거나, 아니면 적이 더 가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게 무슨 해괴한 조화란 말인가.’

갑작스레 어두워진 하늘과 역풍. 그저 공교롭다 말하기에는 섬뜩하게 전신을 훑고 지나갔던 정체모를 감각이 걸린다. 지금의 이 상황, 믿기지는 않지만 적의 한 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군.’

기후를 주무르는 술법은 다른 말로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이름 높은 대주술사들도 혼자서는 구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야만인들 따위가?

‘아니지. 일전에 줄카 전하의 군대를 발 묶었던 결계. 이 또한 그때 그것과 비슷한 것이라면…….’

“장군.”

아그니스 체스퍼의 상념은 그를 부르는 짤막한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그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군터가 다가오는 적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군터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무언가…옵니다.”

“온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번쩍!

일순, 멀리 떨어진 적진 한복판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하늘까지 닿은 자주색 빛의 기둥은 짙은 먹구름에까지 올라가 닿았다.

“저게 무슨…….”

놀라운 광경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렸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개의 물결, 혹은 바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빛기둥으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 나왔다. 그 속도는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도 더 빨랐다.

그 눈부시면서도 불길한 기적은 타칸연합군을 휩쓸었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뻗어나가, 제국군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우아악!”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밀려온 자주색 안개의 물결은 제국군의 바로 앞에서 흩어졌다.

오오오오오오-!

그리고, 흩어지는 자주색 안개 속에서 무수한 괴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은은한 자색 연기를 몸에 두른 채, 제국군 병사들을 향해 갈고리 발톱을 휘둘렀다.

“찔러어엇!”

느닷없는 기현상의 연속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제국의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기다란 창이 괴인들을 찌르고,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으아악!”

크아아아아-!

모양만 놓고 보면 이전의 전투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달랐다. 몸 이곳저곳이 자주색 연기에 잠긴 괴인들은 중무장한 병사들의 벽을 거칠게 무너뜨렸다. 그들은 몸에 창이 꽂히든, 화살이 박히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국의 대부분의 공격은 그들의 갑각을 뚫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간간이 깊은 상처를 입더라도 고통스러워하며 움츠러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흉성을 터뜨리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콰직!

한 괴인이 훌쩍 뛰어 올라 제국 병사들 사이에 뚝 떨어졌다. 재빨리 검을 휘두르려던 병사의 머리가 뜯겨져 나가고 물러나던 병사의 목에 큼지막한 이빨이 파고들었다.

크허엉!

한 번 거칠게 고갯짓하니 이빨이 박힌 목이 단번에 너덜너덜해졌다. 괴인은 병사를 내동댕이치고 또 한 번 포효했다.

========== 작품 후기 ==========

다름이 아니라... 오늘 조아라 담당자 분과 만나 이북 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실 연락은 저번주에 받았습니다만, 계약을 하기 전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설레발처럼 느껴질까 싶어

도장을 찍은 오늘(20일)에서야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튼 이렇듯 이북 계약을 맺게 됨에 따라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정확히 어느 플랫폼들에 들어가게 될지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나, 네이버북스와 리디북스? 등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편당결제 시스템이 될 텐데, 노블레스도 동시 연재로 가게 되니 기존 독자분들께서는 따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째.

새로운 플랫폼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그간 꾸준히 들어왔던 지적에 대해 기존 연재분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자 합니다. 현재 고려하고 있는 수정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군터의 출신(아쿼러즈)로 인한 차별 부분 추가.

2. 벨리사의 신분 변경. 노예 매춘부-〉 청기(노래와 재주를 파는 여인).

3. 군터와 벨리사의 연애(?) 내용 수정.

4. 전체적인 호흡 단축(이건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5. 오테론에서 벨리사가 탈출할 때 할렌의 활약부분 추가.

일단 구상하고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더 추가가 되거나, 아니면 위에 적은 사항 중 일부가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변하지 않으니 기존독자분들께서는 꼭 다시 보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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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완성본이 나왔습니다. 다만 타이틀작업(제목, 저자 이름, 조아라 마크)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당장 표지를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스포를 하자면... 굉장히 멋있게, 제 마음에도 쏙 들게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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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소다님, 멋쟁이미르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원고료 쿠폰을 주신 분들, 오늘도 함께 해 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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