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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4화 (204/1,064)

<-- 2부 -->

열흘.

막시밀리언은 열흘 내에 제국군이 처참히 패배할 것이라 했다.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신중한 막시밀리언이 단정 짓듯 기한까지 언급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군터는 늦은 밤까지 고심에 빠졌다.

열흘 안에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알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그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그니스 체스퍼, 카리비온 하야신 두 장군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한들 그는 일개 천인장에 불과하다. 막연히 불안하다고 하며 두 장군을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시밀리언의 서신을 들이밀며 리에론의 내통을 알릴 수도 없다. 막시밀리언의 명을 거부하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어쨌든 막시밀리언의 수하였으므로.

‘사령관이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다.’

막시밀리언이 있는 위글로우와 이 터블헨 부근 전장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위글로우의 사령관저에 앉아 이곳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타칸연합군에 숨겨둔 힘이 있다고 한들 그 힘이라는 것이 백중세인 대치를 한 번에 뒤엎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기나 한가? 그런 힘이 있었다면 타칸연합국은 이전의 전쟁에서 어중간한 정전협정이 아니라 승리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넌지시 말해 군의 주의를 높이는 것이 최선이겠군.’

다음날, 살마드에서 왔던 전령들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직후에는 할렌과 몇 기병들이 정찰 명목으로 진지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온 할렌 일행의 검에서는 흐릿한 혈향이 묻어났다.

“대장님.”

“수고했다.”

군터의 막사로 들어온 할렌은 군데군데 피가 묻은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군터가 대충 써서 전령에게 들려 보냈던 것이다. 군터는 그것을 그대로 등불에 가져다 댔다. 불이 옮겨 붙은 서신은 금세 타 없어졌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구나.”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면 알려주셨겠지요.”

백인장으로 있는 다른 수하들도 그렇지만, 할렌은 특히 더 각별하다. 살라스와 더불어 가장 아끼는 부하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할렌에게만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마음을 다시 접어 가슴 한구석에 묻었다.

이기적이고, 상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군터는 그가 택한 길이 맞는 길이라고 여겼다. 군인으로서 무슨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을 앞에 둔 채 아군을 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만 해도 심한 거부감이 든다. 그런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지만, 군터는 할렌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군터.”

할렌과 짧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군터는 지휘관 막사를 찾았다. 골똘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아그니스 체스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길을 던졌다.

“장군. 정찰을 돌고 오겠습니다.”

“음? 정찰대는 이미 움직이고 있네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 감은 꽤 좋은 편입니다.”

“천인장 씩이나 되어서 꽤나 성실하군. 피곤하지는 않은가?”

“저는 아직 젊습니다. 기운이 달릴 나이는 아니지요.”

“하하. 나도 자네 같은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한창 때는 이틀 밤낮으로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열을 떠나지 않았었지.”

화려했던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커티스를 비롯해 종종 이야기를 나곤 하는 천인장들이 가끔씩 아그니스 체스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듣기로 체스퍼 가문은 황도에 근간을 둔, 제법 역사가 깊은 귀족가라고 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런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났는데, 계승권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던 그는 성인이 되던 해에 군문에 투신했다고 한다. 체스퍼 가문은 본래 무가는 아니었는데, 무가의 여식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덕인지 타고난 용력과 기개가 대단하여 곧 두각을 드러냈다던가.

그의 나이 올해로 오십 하고도 여섯. 꾸준히 단련한 덕에 기력이 크게 쇠하지는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인으로서는 조금 전성기를 지난 나이다.귀족으로 태어났으나 가문에 기대지 않고 한평생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살아온 사내. 그의 언행에는 그런 그의 삶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군터는 이 용맹한 장군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분명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에 가까운 자였기에.

그 뿐만이 아니다. 아그니스 체스퍼 휘하의 천인장들 중 몇몇도 그렇고, 카리비온 하야신도 그렇다. 진정한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 흔히 볼 수 없는 사내들이 이곳에는 여럿 있다.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함에, 군터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야말로 막시밀리언의 명을 따라 이 전장에서 등을 돌릴 수 없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

군터는 매일, 전투가 있든 없든 꼭 한 번씩은 직접 정찰을 나갔다. 그런 그를 두고 다른 이들은 너무 과민한 게 아니냐며 웃으며 농까지 건넸지만 군터는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다면서 말이다. 군터가 그렇게까지 한 것은 적의 동향을 직접 살펴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그니스 체스퍼를 비롯한 아군 지휘관들에게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일깨워주려 함도 있었다.

그러한 의도는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는 먹혀든 것 같았다. 물론 본래도 느슨하지는 않았지만, 정찰대가 보다 더 치밀하게 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 없습니다.”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잠잠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알게 되는 것은 타칸연합군에게서 특별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정찰대 병사들에게만 맡겨 놓지 않고 매일 직접 적진을 살핀 군터로서는 별 다른 변화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점차 막시밀리언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만 쌓여갔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막시밀리언이 말한 것은 열흘이다. 그가 전령이 정확히 언제 이곳에 도착할지까지 예측하여 기간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열흘 이상은 기다려봄이 옳다.

‘차라리 헛짚은 것이었으면 좋겠군.’

다소 낯 뜨거운 일이 될지라도, 위험을 맞느니 그냥 혼자서 유난을 떤 것으로 끝나는 것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군터는 불 꺼진 그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어렴풋이 보이는 적진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날. 막시밀리언의 서신이 당도하고 난 후, 여드레 째 아침이 밝았다.

*

군대가 움직였다. 수차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지부진한 교전이 벌어질 거라 모두가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작부터가 달랐다. 수만 대군이 앞으로 나오는 대신 백기를 든 기마 한 기만이 너른 땅을 달렸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터는 백기를 든 자의 모습이 눈에 익다는 것을 곧장 알아챘다.

“푸른 사자. 전령으로 오기에는 너무 비싼 몸이 아닌가.”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전령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백기를 든 전령, 포라칸이 점차 속도를 줄이자 그는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말을 멈춰 세웠을 때. 그들은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pasawe qeubuiqsihi(대족장의 전언이다)!”

포라칸이 먼저 입을 열어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입을 다문 자들의 귀를 때렸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귀를 후비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군터! 이리 와서 이놈이 하는 말 좀 해석해주게나!”

느닷없는 부름에 군터는 즉시 내쉬의 배를 찼다. 곧 그가 아그니스 체스퍼의 곁에 도착하니 기다리던 포라칸이 다시 입을 떼었다.

“대족장의 전언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내가 아닌 초원의 대족장께서 전하는 말씀이다!”

군터는 포라칸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제국어로 바꾸어 들려주었다.

“그대, 아그니스 체스퍼 이하 제국군들은 이제껏 초원의 전사들에 맞서 훌륭히 싸워왔다. 그대들의 그 분전, 용맹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적이지만 인정할 만하다. 허나 이제 나는 이 의미 없는 싸움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니, 그대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하건대…더 이상 우리의 앞을 가로막지 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이 물러난다면 나는 그대들을 쫓지 않으리라. 그러나 끝끝내 남아 초원의 전사들에게 대적하겠다면, 약속하건대 그대들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리라.”

거기까지 말을 전했을 때, 아그니스 체스퍼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에 군터는 더 이상 통역하지 않았다.

“뭔 소리를 지껄일까 궁금하여 한 번 들어나 보려 했건만, 이건 뭐 귀가 썩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구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포라칸을 노려보았다. 포라칸은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겨먹은 것이 사람이라 하여 다 같은 사람인 줄 아느냐! 보잘것없는 야만인 놈들 주제에 감히 제국의 군대를 앞에 두고 그 따위 망발을 지껄여! 물러나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네놈들이다!”

분노에 차 일갈한 아그니스 체스퍼는 즉각 안장에 매달아 놓은 활을 들어 쐈다. 순식간에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는 그 솜씨는 어지간한 기사의 달인들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챙!

날카롭게 날아간 화살. 그러나 포라칸은 들고 있던 백기를 휘둘러 대수롭지 않게 쳐냈다.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저버리는군. 하지만 바라던 바다.”

포라칸이 들고 있던 백기를 땅에 내리 꽂았다. 그리고 아그니스 체스퍼가 그랬듯, 안장에서 활을 빼내어 들었다. 보통의 활과는 확연한 크기 차이를 보이는 강궁이 그의 손에서 한껏 휘어졌다.

“어리석은 제국의 장군이여! 너는 이제 곧 차라리 이 화살에 죽는 것이 나았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뭉툭한 소리를 내며 화살이 쏘아졌다. 거의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아그니스 체스퍼에게 닿기도 전에 군터가 내지른 칸젤에 의해 반으로 갈려 튕겨졌다.

“…이건.”

군터가 눈을 부릅떴다. 창날부터 시작해 팔 전체를 울리는 묵직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흡사 작은 창과도 같이, 터무니없는 크기의 화살을 전에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화살은 이전에 그의 몸을 관통한 적이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던 수하의 목숨을 끊어놓은 적이 있었다.

‘네놈이었던가.’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무식하기 짝이 없는 화살을 날려대는 자가 초원의 전사들 중 또 있을 거라 생각 되지는 않았다.

“흥! 무식한 야만인 놈 같으니.”

군터는 돌아가자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말에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그의 시선은 멀어져가는 포라칸의 등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래. 결국 거절인가.”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대는 했었다. 흘릴 피는 되도록 줄이고 싶었으니.”

타르가이 베르겐은 몸을 일으켰다.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길게 자란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오늘, 저 너른 땅이 온통 붉게 물들겠구나.”

은은한 자줏빛이 그의 몸에서 묽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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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춥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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