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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3화 (203/1,064)

<-- 2부 -->

몇 차례 자잘한 교전이 있었다. 타칸연합군이 비스링을 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비스링을 함락시킨 그들은 다시금 신중해지기로 한 모양이었다. 비스링에서 탈출한 병사들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국군 입장에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런 긴장이 무색할 만큼 타칸연합군은 잠잠했다. 마치 처음 맞닥뜨렸던 초기로 돌아간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그니스 체스퍼는 군을 뒤로 물렸다. 후방으로 빼냈던 공병들이 진채를 완성했다는 보고가 닿은 직후였다.

“성채에 가까운 진채라. 물러나실 생각은 없으시다는 거군요.”

“당연히. 여기서 물러서면 파국이야. 물러서느니 차라리 여기서 뼈를 묻고 말겠네.”

아그니스 체스퍼는 제국 군부에서 용장으로 알려져 있다. 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우직한 뚝심으로 전장에 서는 사내로 유명했다.

지금도 그는 그러한 세간의 평을 행동으로써 증명했다. 카리비온 하야신의 원군이 합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기세가 높은 적을 앞두고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든, 대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서든 쉽지 않은 일.

“어쩌면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지도 몰라. 끌어들여 미안하군.”

“재미있는 농이군요. 제법 웃겼습니다.”

카리비온 하야신이 허연 수염을 쓸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보다도 나이와 경험이 더 많은 노장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옆, 그 뒤의 제장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표정은 다양했다. 카리비온 하야신과 비슷하게 웃는 자들도 있었고,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 농담이었네. 이곳이 우리의 무덤은 아니지. 저 놈들이라면 모를까.”

늘어선 군대. 불쑥 솟아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이 보인다. 늠름하고 장엄하기 그지없는 제국기와 비교하면 조잡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초라하고 쓰레기 같은 것들.

“미개한 야만인 놈들이 잔머리를 굴려서 비슬링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보라! 그렇게 우세를 점했음에도 놈들은 여전히 저기서 머물 뿐이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일갈.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소리가 주변의 제장들을, 그 아래의 군졸들을 휩쓸었다. 수천의 시선이 쏟아졌다. 뒤이어 그 배 이상의 시선이 더 몰렸다.

“어째서겠는가! 왜이겠는가! 적들이 우리를 가벼이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와아아아아아!

야밤의 고요를 틈타 후방의 진채로 옮겨온 직후, 수만의 군졸들은 은근히 기세가 죽어있었다. 마치 도망쳐 나온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비스링이 함락되고 뒤로 물러났으니 아주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전장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적과 대치하고만 있어도 몸과 정신이 피로해지게 마련이다. 하물며 자잘하게나마 계속해서 교전이 이어진다면, 제 아무리 정예 군대라 해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가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얼마이던가. 그는 눈을 감고 있어도 귀에 들리는 소리, 코를 스치는 냄새만으로도 군대의 군기의 헤아릴 수 있었다.

대장의 일장연설은 병사들을 위무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남발하는 고함은 병사들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시기를 제대로 맞춘 한 번의 울림은 지친 병사들을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모두의 시체를 밟지 못하는 한 저 야만인 놈들에게 길은 열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 보기에 저놈들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으리라 보이지는 않는구나! 제군들! 아니 그러한가!”

우아아아아아!

우렁차게 내뱉은 일갈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뒤따른다.

“뛰어난 장군은 뛰어난 선동가이기도 한 경우가 많지.”

“본인께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까.”

“난 뛰어난 장군이 아니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애송이 장군이 아닌가.”

카리비온 하야신이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군터도 슬쩍 입 꼬리를 말았다.

*

“어깨를 맞대라! 밀리지 마라!”

누군가의 관점에는 자잘한 교전이라 불리는 산발적인 전투가 하루건너 하루 꼴로 벌어졌다. 높게 친 녹각과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지형에 의존하는 제국군과 어떻게든 그들을 자극하고, 나아가 밖으로 끌어내려 하는 타칸연합군의 치열한 기 싸움이었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밤. 밤새들만이 지저귀는 야심한 시각에 한 사내가 군터의 막사를 찾았다. 그날 정오 무렵에 살마드로부터 당도한 전령들 중 한 명이었다. 막사 밖을 지키던 백인장 한 명과 함께였다.

“따로 날 찾은 이유가 뭐냐.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소인은 그저 명을 받은 대로 따를 뿐입니다.”

“어딜!”

전령이 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자 날카로운 눈을 유지하던 백인장이 대뜸 검을 뽑아 전령의 목에 가져다 댔다. 시퍼런 칼날이 목 바로 앞에서 멈추니 전령의 움직임이 멎고 얼굴이 굳었다.

“됐다.”

군터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백인장은 검을 거뒀다.

“여기…위글로우 사령관께서 전하시라 한 서신입니다.”

“…….”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군터의 눈매가 순간 꿈틀거렸다. 그는 전령이 조심스럽게 건네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누구의 명을 받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전령의 시선이 슬쩍 옆에 선 백인장을 살폈다. 믿을 수 있겠냐는 의미다. 이야기가 퍼지길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고.

“괜찮다.”

군터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지체 없이 답했다. 전령은 잠깐 망설이는 듯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리에론 가문입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서신은 막시밀리언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나 그가 서신을 보내게 된 배경에는 리에론 가문이 있다는 뜻이다.

군터는 전령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서신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 가장 위 한 두 줄에, 나머지 너덧 줄이 본론이었다.

“…….”

무표정하게 서신을 읽어내려 가던 군터의 표정은, 서두를 넘어 본론에 이르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시선이 마지막 줄까지 이르렀을 때, 그의 전신에서 살기에 가까운 흉포한 기운이 일렁였다. 절제 없이 흘러나온 기세는 그대로 전령과 그 옆의 백인장을 압박했다.

“크음!”

억눌린 신음소리가 터져 나옴에도 군터는 평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서신을 거칠게 구겨 쥐었다. 전령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서신, 틀림없이 위글로우 사령관께서 보내신 것이냐?”

“물론입니다. 제 말에 거짓이 있다면 제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저 분풀이였을 뿐이다. 서신이, 서신의 내용이 거짓일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서신의 봉인도, 서신에 쓰인 필체도 모두 틀림없이 막시밀리언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서신에 쓰인 내용 중에는 그와 막시밀리언만이 아는 내용도 몇 가지 흘려가듯 적혀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혹 군터가 서신을 받고서도 서신이 거짓이 아닐지 의심할 것을 우려했음이리라.

“너는 이 서신의 내용에 대해 아느냐?”

“알지 못합니다. 그저 서신을 전하고 답신을 받아오라는 명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알겠다. 답신은 곧 주마. 일단은 물러가라.”

“옛.”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진 전령이 도망치듯 막사를 나갔다. 군터는 그제야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막사 안을 죄다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처럼 사납게 날뛰던 기세도 가라앉는 호흡을 따라 잠잠해져갔다.

“서신에…무슨 안 좋은 내용이라도 쓰여 있었습니까?”

뛰쳐나가듯 물러간 전령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얼굴이 좋지 않게 변한 휘하 백인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백인장들을 모두 불러 모을 것을 명했다. 명을 받은 백인장은 곧장 뛰듯이 막사를 나갔고, 군터는 구겨진 서신을 쥔 채 생각에 잠겼다.

“…….”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기회를 틈타 탈영하여 위글로우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해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서신에 담긴 내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신에는 이곳의 제국군이 앞으로 열흘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했다. 타칸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패하여 전멸에 가까운 꼴을 당할 것이라는, 추측도 아니고 확언이 담겨 있었다.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서신을 쓰고, 보낸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막시밀리언이었다. 그를 잘 안다. 그는 확실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놓고 농지거리를 할 인물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이건 숫제 적의 움직임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 같은 내용이다. 현장에서 부딪치고 있는 제국군조차 알지 못하는 적의 전력을, 며칠이나 말을 달려야 닿을 먼 곳에서 내다보았다는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내통.’

당장 이곳의 제국군을 지휘하는 아그니스 체스퍼만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바크렌 군부를 넘어 관료 전체 중에서도 네 손 가락 안에 드는 그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을 군사도시의 일개 사령관에 불과한 막시밀리언이 알 수는 없을 터. 전령도 말했듯, 결국 선이 닿는 것은 리에론 가문이고 파비우스 리에론이다.

‘파비우스 리에론이 적과 내통을 했다’

타칸 연합국? 아니면 베이고르와? 어쩌면 둘 모두일 수도 있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단지 목적을 위한 내통일 뿐이라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실각, 혹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것일까?

또한, 만약 이것이 내통이 아닌 본격적인 제국에 대한 배반이라면?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대체 언제부터?’

막시밀리언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위글로우를 떠날 때만 해도 그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과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시밀리언이 자신에게 비밀을 둘 이유는 없다.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막시밀리언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장님. 찾으셨습니까.”

부름을 받은 휘하 백인장들이 막사로 들어왔다. 올 때는 다섯이었건만, 이제는 셋 밖에 남지 않았다. 군터는 손에 쥔 서신을 한 번 더 구겼다.

‘말을 해야 하는가.’

부하들에게 비밀을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나 심각하다. 멋대로 추측한, 확신에 가까운 내용을 제해도 그렇다.

‘나는 어찌해야 하지?’

막시밀리언의 명령에 따르면 간단하다. 딱 한 번 눈을 감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막시밀리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이곳은 열흘 안에 사지로 변할 테니까. 그러니 늦기 전에 떠나면 된다. 하지만…그걸로 괜찮은가?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곳이 사지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수하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둘을 부르러 갔던 하나를 빼고는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내가 하기에 따라 이 녀석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건가.’

새삼 부담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새삼스러울 뿐이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늘 천 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천인장이었다.

“멍청한 얼굴들을 하고 있구나.”

아그니스 체스퍼, 카리비온 하야신, 커티스, 등등…이곳에 머물고 있는 아는 자들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지나갔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다.”

“예? 어떤…….”

“우리는 군인이다. 그렇지?”

“물론이지요. 하온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비밀이다.”

“옛?”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다. 군터는 흐리게 웃으며 작게 구긴 서신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내키지 않는군.’

기억하기로는 아마도 첫 항명이다. 막시밀리언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를 수는 없다. 이제껏 그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명령이라도 다 따라왔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할렌.”

“예.”

“오늘 온 전령들이 돌아갈 때…은밀히 따라붙어라. 그리고 모두 죽여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예?”

“할 수 있겠느냐.”

“…….”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할렌을 향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입을 벌렸던 할렌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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