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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2화 (202/1,064)

<-- 2부 -->

“어서 오시게. 언제쯤 오려나 피를 말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네.”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늦어 송구스럽군요.”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지 않나?”

“예.”

터블헨의 제국군과 합류한 카리비온 하야신은 반가운 기색의 아그니스 체스퍼와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천인장들에게도 눈인사를 건네던 그는 군터를 보며 이채를 띄었다.

“군터.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이제는 장군이라 불러드려야 합니까.”

“당연히.”

노장이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다. 군터도 흐릿하게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눈으로 인사한 뒤 손을 맞잡았다. 군터는 그쯤에서 반가움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카리비온 하야신은 그렇지 않았던 듯, 붙든 손을 잡아당기고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그마치 귀족 장군이 일개 천인장에게 포옹을 한 것이다. 생경한 광경에 다른 이들은 놀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그니스 체스퍼마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였으니.

가벼운 포옹 후, 카리비온 하야신은 당황한 기색인 군터를 보고 씩 웃었다.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를 또 다른 전장에서 다시 만나다니. 죽은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아닌가. 물론 후자는 경험한 적이 없지만.”

“이거 참. 두 사람의 인연이 꽤 깊었나보군.”

아그니스 체스퍼가 말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입니다. 이 친구 덕분에 말레이드에서 저와 수많은 장졸들이 살아날 수 있었지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난 내 겪은 바를 그대로 말할 뿐이네.”

말로는 과하다며 뒤로 물러섰지만 어찌 기쁘지 않을까. 군터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경탄 어린 시선에 내심, 조금은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연히 카리비온 하야신을 보는 시선도 더 유해졌다.

기회가 된다면 따로 자리를 갖고 이야기라도 하련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이야기는 들어가서 듣도록 하지.”

“예.”

막사 밖과 안의 분위기는 상이했다. 카리비온 하야신은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군의 전갈을 받자마자 군을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헌데 곧 발을 묶이고 말았지요.”

“발을 묶이다니? 혹…….”

“예. 별동대가 따로 움직인 겁니다.”

“야만인 놈들인가? 비스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군을 나눈 건가?”

“아니. 깃발은 반군의 깃발이었습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인상을 찌푸렸다.

“반군이라고?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정규병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행색도 제각각이었고, 다소 난잡한 느낌이더군요.”

“반군 놈들에게 붙었다는 도적무리인가?”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움직임은 날쌔더군요.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베이고르에 가담한 도적무리로 추측되는 군대는 철저히 교전을 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예 물러나지도 않은 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모양새를 취하며 키롤드군의 발을 묶은 것이다.

“완전히 그럴 목적으로 나선 놈들이군.”

“예.”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나? 그럼에도 여기까지 이렇게 왔다면 놈들을 처리했다는 뜻이겠지?”

“글쎄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음?”

“어느 순간 갑자기 먼저 물러나더군요. 꼬리를 붙여보았습니다만, 놈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묘한 일이군. 어째서 그랬을까.”

“알 수 없지요. 다만 혹시 몰라 요새에 병력을 조금 더 남겨두고 왔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발을 묶으려고 했다는 것은 명확한데, 갑작스레 스스로 물러나다니. 목적을 다 달성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서쪽을 버려두고 동쪽으로 갔다. 기만일 수도 있지만…아무래도 반군과 야만인 놈들은 서로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모양이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드러난 모양새만 놓고 보면 제 할 일 다 했으니 간다는 식이다.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는 해도 사이가 썩 매끄러운 편은 아닌 듯했다. 그게 아니면 위쪽 전선의 상황이 썩 여의치 않은 상황에 놓였거나.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 쪽의 상황은 따로 들은 것이 있나?”

“제가 아는 건 장군께서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당장 책임지지 않는 자리에 있는 군터조차 눈에 검은 두건을 두른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이는데 모든 것을 짊어진 아그니스 체스퍼는 얼핏 보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담담하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한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 군터 역시 이끌고 있는 부하들이 있다. 비록 그 수는 비할 수 없이 적지만, 이끄는 자로서의 고충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설령 불안해도 절대 내색해서는 안 된다. 대장이란 것은 그렇다. 항상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어야 하고, 자신만만해야 한다. 오만으로 비칠 정도의 당당함조차 수하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미덕이다.

“어쨌거나 자네가 와 주어 그나마 한 시름 덜었군.

“기대에 부응을 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래줄 것이라 믿네.”

마지막 말은 사뭇 무거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작은 차이였지만 바로 앞의 카리비온 하야신은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이 밝을 수 없는 이유였다.

*

“전선이 고착화 되고 있군.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은 반군의 대병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모양새.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고.”

살마드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가 말했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지도에는 색이 칠해진 나무 조각들이 지도 위에 몇 개씩 놓여 있었다.

그가 말을 건네고 있는 이는 옆자리에 선 아샤즈 테오모렌이 아니었다. 사실 아샤즈 테오모렌은 아까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그가 군사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향력 때문이지,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성주께서는 이미 예견하고 계셨던 바가 아닙니까.”

“그렇소.”

“그럼에도 표정이 굳으신 이유는?”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간다고 해서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 어줍지 않게 군인 행세를 하는 나보다는 장군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엄밀히 말해 그는 장군이 아니다. 책임을 지기 위함이었다지만, 어쨌거나 스스로 군문을 나왔으니까 말이다. 현재 그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굳이 분류하자면 민간인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벼이 볼 수 있는 이는 적어도 이 바크렌에는 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것은 살마드의 성주인 바스카드 일레이저도 예외는 아니다. 애초 그를 이 자리에 청한 이가 바로 바스카드 일레이저 본인이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

그, 아란딜 페레모어는 즉답 대신 나무 조각들이 늘어서 있는 지도를 눈에 담았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신중히 말을 냈다.

“확실히 의문스럽기는 하군요.”

“역시 그렇군.”

바스카드 일레이저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아직 아란딜 페레모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무도 순조롭게 고착되어 가는 전선보다, 저는 이번의 전쟁 자체가 의문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전협상은 아국에도 그렇지만, 저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피차 혼란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지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기에 의표를 찔린 아국이 먼저 정전을 제의하기는 했지만, 사실 어느 쪽이 더 절실했는지를 따져보면 저들 역시 아국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억지 명분을 들이밀며 정전을 일방적으로 파토내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치고, 저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심심합니다.”

“심심하다니요 장군. 지금도 이름 모를 야지에서 제국의 장졸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겁니다.”

아샤즈 테오모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쓸 데 없는 트집이라 여겼던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 즉각 사과했다.

“장졸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으음.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을 한 것 같습니다.”

약간의 잡음이 있은 이후로도 회의는 계속되었다. 사실 회의라고 한들 성주와 아란딜 페레모어간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대부분이었고, 아샤즈 테오모렌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끔씩 기침소리라도 내면서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아샤즈 테오모렌은 시종과 호위들을 이끌고 그의 자택으로 향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크기만 놓고 보면 살마드 전체의 저택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저택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그가 가장 총애하는 측근, 시세로가 그를 맞았다.

“회의는 어떠셨는지.”

“어땠겠느냐.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시간만 죽였느니라. 바스카드 일레이저, 그 자가 내게 수치를 주려고 불렀음에 분명하다. 딴에는 마음 써준다는 핑계로 말이다.”

시세로는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단박에 그의 상관이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인 것을 알아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 답답한 회의실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상관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려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지금은 같은 때는 그저 있는 분을 다 풀어내도록 가만히 들어주고, 적절히 맞장구나 쳐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배운 그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뭐라 했는지 아느냐? 심심하다고 하더구나. 바크렌의 젊은이들이 지금도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지 모르거늘, 저는 그저 이 도시에 앉아 여유롭게 있다고 아무 말이나 다 지껄여대는 게지.”

“아무래도 그 분께서는 외지인이니까 말입니다. 이 바크렌의 전란이 좀 더 멀리 보이신 거겠지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니라. 바스카드 일레이저도, 아란딜 페레모어도, 그 자들에게는 이 땅이 그저 발판에 지나지 않아. 모두 다 하나 같이 공 세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릴 뿐, 백성들이나 장졸들이 얼마나 피를 흘리건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내가 너무 과하게 보고 있는 것이냐?”

“…소인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말씀하신 두 분께서는 아무래도 본래 황도에 계시던 분들이니…아무래도 그분들께 바크렌은 임지일 뿐이겠지요. 그나마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께서는 이제 그것도 아니시지만 말입니다.”

“장군은 무슨. 황도까지 가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 발 빠르게 물러난 자가 아니더냐. 줄카 전하께서 챙겨주시지 않았던들, 그 자가 지금 이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들 수나 있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지.”

아샤즈 테오모렌은 시세로가 따르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바깥에서는 항시 침착한 모습만을 보이던 그가 자택에서는 이리도 거칠게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그의 측근이라고 불리는 이들조차 대놓고 성주와 명망 높은 (전직)장군을 씹어대는 줄은 모를 것이다.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세로 정도만이 질투심 많은 늙은 관리의 본모습을 온전히 다 알 뿐이다.

========== 작품 후기 ==========

제 속옷 색은 국가기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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