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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00화 (200/1,064)

<-- 2부 -->

아그니스 체스퍼는 신속하게 군을 정비하는 한편 정찰병을 보내 비스링의 상황을 확인케 했다.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네. 으레 있는 일이야. 각인이라는 건 본래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법이거든.”

각인이라. 궁금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묻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물어보기에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았다. 안색은 창백했으며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흘렀다. 그것이 각인이라는 것의 부담인지, 아니면 초원의 대전사에게 허용한 가슴의 일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상당히 위중해 보였다.

“잠깐 쉬시지요.”

“괜찮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장군께서 앉아계시나 누워계시나 별 차이는 없습니다.”

모여 있던 다른 천인장들이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여전히 가슴 쪽에 손을 대고 있는 아그니스 체스퍼를 지그시 응시했다.

“장군께는 휴식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의원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의원은 무슨. 칼 찬 돌팔이에 불과하네.”

“정찰병이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당장 내일부터 또 다시 싸워야할지도 모릅니다.”

군터가 그런 것처럼,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가만히 군터를 응시했다. 마뜩찮은 표정을 짓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네. 그럼 내 좀 쉬고 있지.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곧장 알리게.”

“그리 하겠습니다.”

이번의 대답은 군터뿐 아니라 모든 천인장들이 입을 모아 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뜨자 그들은 그제야 편히 자리에 앉았다.

“간도 크군. 감히 장군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이야.”

바로 옆 자리에 있던 커티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갑옷이 아닌 얇은 천 옷을 입고 있었다. 헐렁했던지라 안쪽이 비쳤는데, 허리부터 시작해 상체의 절반가량을 붕대로 싸맨 모습이 보였다. 때문인지 안색도 다소 창백했다.

“상관이라도 할 말은 해야지.”

“충언이라는 건가. 말은 좋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특히나 장군 같은 분을 앞에 두고서는 더욱 그렇고.”

군터는 가볍게 코를 찡그렸다. 낯간지러운 말은 질색이다.

“거창하게 포장할 필요 없어. 그보다 몸은 좀 괜찮나.”

“괜찮지. 잘 살아있지 않나. 팔다리도 멀쩡하고.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 빌어먹게도, 부하들을 반이나 사지에 뒹굴게 만들고 이 몸뚱이 하나만 건져왔지.”

“유감이군.”

전장에서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건 당연하다든가 하는 식의 싸구려 위로는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 돌아온 천인장들 중 대다수가 커티스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물론 군터 역시 그랬다. 그 역시 오백 중 이백이 넘는 부하들을 전투가 벌어진 그 자리에 주검으로 남기고 돌아왔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야겠지만, 그럼에도 지휘관들은 마음 한 구석에서나마 비탄에 잠기고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되겠지만,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피해가 너무나 크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자리를 비운 막사에서 천인장들은 곧 열띤 토론을 벌였다. 현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앞으로 취해야 할 방안에 대한 토의였다.

“적 역시 우리 못지않을 게야. 비관할 필요는 없네.”

“문제는 비스링이다. 비스링까지 잃었다면 문제가 커.”

회전은 제국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살아 돌아온 병력이 2만 여. 그 중에 부상자가 3천 가량. 위독하거나 당장 전투에 투입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그 중 반 정도. 한 번의 싸움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지만, 전투 결과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의외로 그렇게 나쁜 결과는 또 아니었다. 그들이 상한 만큼 타칸연합군 역시 피해를 입었음을 전장에 널브러져 있던 무수한 시신들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천인장이 말한 것처럼 관건은 비스링이다. 비스링이 함락 당했다면 문제가 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까지의 상황만 놓고 보면 비스링은 이미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왜냐하면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 비스링으로 보냈던 전령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않는 전령. 비스링에서 피어오르던 불길.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려 해도 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단은…비스링이 함락 당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해나가야겠지.”

“비스링이 함락 당했다면 최악이지. 더 말할 것이 있겠나.”

굉장히 힘 빠지는 소리지만 누구도 대꾸한 자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던 탓이다.

비스링에 거주하던 병력이 6천이다. 사실은 조금 더 될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비스링에는 군량을 비롯해 무구며 온갖 중요한 보급품들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터블헨에 주둔한 그들 역시 어느 정도의 보급품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스링 내에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보급품의 상당량을 비축해 두었다. 당연히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는 비스링이 함락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 결정이었다. 비스링이 함락 당하기 전에 차라리 전멸을 당하면 당하겠다는 필사의 의지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기치 못하게 흘렀고, 결국 이렇게 되었다.

“비스링이 넘어갔다고 해도 아직은 괜찮다고 보는데. 여차하면 비스링을 탈환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야만인들이 점령한 요새를 탈환하자?”

“안 될 건 또 뭐지? 난 로레드 엥겔님이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허무하게 당하셨을 거라 보지 않네.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했을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요새는 크게 손상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공성병기 없이도 충분히 노려봄직 하지. 게다가 놈들은 죄다 기병이야. 놈들에게 수성전의 경험이 있겠나?”

거기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군터가 끼어들었다.

“놈들이 성벽 뒤에 숨어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군.”

“뭣?”

“나와서 싸우면 그만이지 않은가. 이제껏 우리가 했던 것처럼. 놈들이 치고 빠지기를 한다면 공성이고 뭐고 하기 전에 응전이나 제대로 될 것 같은가. 글쎄…난 아니라고 보는데.”

“으음!”

무심한 투로 던진 말은 말투부터 시작해서 경험 많은 반백의 천인장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꽤나 건방진 느낌이 묻어나는 것이었으나 그 내용만은 날카로웠다. 확실히 말을 꺼낸 그는 타칸연합군이 요새를 점유하고 수성전을 펼칠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높은 성벽 위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같은 높이의 야지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니까. 그게 일반적이니까.

군터는 그에게 그런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부터가 착각이며 오산이라고 짚은 것이다. 타칸연합군은 성벽 위보다 성 밖에서 더 강하는 것을. 그런 그들이 결코 수성전으로 싸움을 이끌어가지는 않을 것임을.

“병력은 비등. 병과는 열세. 보급도…이제는 열세인 건가.”

막사 안의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져 갈 즈음이었다.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막사 바깥을 지키던 백인장 한 명이 크게 외치며 들어왔다. 말수를 잃어가던 이들이 반색하며 일어섰다.

*

“비스링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제국기는 사라졌으며, 동쪽 성문을 통해 야만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끄응!”

짐작은 했지만 혹시나 했다. 하지만 전령이 전한 소식으로 그 희미한 희망마저 박살이 났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틀림 없으렸다?”

“옛!”

아그니스 체스퍼는 쉬기 전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전령의 보고를 들었다. 그는 혈색도 혈색이거니와, 이제 가슴에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최악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로군.”

“장군. 다행이라 하심은?”

“처음 비스링의 이상을 알아채고 정찰병을 보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연기가 솟고 있다는 것은 비스링의 군대가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버텨줬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보급고에 불이라도 놓았을지도 모르지.”

“설마…….”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서도 일말의 기대가 서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심 비스링의 장졸들을 원망했을 터인 그들은 이제 패사했을 아군이 마지막까지 분투해줬었기를 기대했다.

“장군. 이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비스링이 넘어간 이상 야만인 놈들을 제어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일단은…철군을 고려해보시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설령 우리가 물러나고 싶다고 한들 놈들이 순순히 놓아줄 것 같은가.”

아그니스 체스퍼는 한 천인장의 말을 일축했다.

“변한 것은 없다. 우리는 놈들의 발목을 최대한 붙드는 데 주력하면 된다. 곧 원군이 당도한다.”

“원군이라…열흘 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원군. 전투가 시작되고 한참이나 흘렀건만 이놈의 원군은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오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타라냐드나 본다인…어쩌면 리바스트라까지. 혹 복잡한 사정에 휘말린 것은 아닐런지요.”

애써 ‘복잡한 사정’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실상은 황도의 환란에 휩쓸린 건 아니냐는 말이다. 그 세 주 역시 제국 전체를 놓고 보면 변경에 지나지 않으나, 그래도 바크렌에 비하면 어느 정도 대접 받는 편인만큼, 바크렌보다는 황위 쟁탈전에 얽힐 확률이 더 높다.

“쓸 데 없는 생각은 접어둬라. 그리고 내가 기다리는 원군은 타 주에서 건너오는 잡병들이 아니야.”

“예? 그렇다면…….”

“타라냐드나 본다인이나, 리바스트라나…기대하기엔 너무 멀지. 키롤드가 있지 않나. 그곳엔 구 말레이드의 정예들이 고스란히 주둔하고 있어. 또한 카리비온 하야신도 있지.”

“알고 있습니다만, 말씀처럼 키롤드는 멀지 않으나 그들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빠르게 움직인다면 이틀 안에도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분명 소식을 들었을 터인데도 이제껏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다른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를 믿는다. 그는 강직한 사람이야. 대적을 앞둔 비상시국에 잔머리나 굴릴 자는 아니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녹각을 늘리고, 경비를 강화하라.”

“옛!”

========== 작품 후기 ==========

후기를 적기 전에... 오늘 하루 지진으로 아주 난리네요. 혹 포항에 거주하시는 분들, 혹은 지진으로 피해보신 분들 계신가요? 부디 별 일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혹여 계시다면 짤막한 글로나마 위로 말씀 드립니다. 힘 내시길 바랍니다.

*여기부터 후기입니다*

이걸로 딱 200회네요. 100회에서 후기에 무슨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거겠지요.

미리 축하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딱히 뭐 해냈다든가, 감회가 새롭다든가 하지는 않네요.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감사합니다. 봐주시는,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죠. 앞으로도 어떻게든 힘 내서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후원쿠폰 쏴주신 깜정천사님, 난누군가님, 가식적썩소님, 슈퍼테크닉님, presentlee님, 크리든님, 광SSIN도님, Mortis님, 한강물따뜻하냐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쿠폰 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자주(?) 보는데 후원쿠폰은 클릭을 한 번 해야 보여서 확인이 늦었습니다. 쿠폰만 해도 감사한데 따로 쿠폰을 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쿠폰, 추천, 댓글 남겨주신 분들께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너무 자주 언급하면 왠지 부끄러워서 말씀드리지 않지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200회 이벤트?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냥 소소하게나마 독자분들과 QnA를 해보려고 합니다. 전에도 한 번인가? 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200회이고 하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스포가 되지 않겠다 싶으면 최대한 답해드리겠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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