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쾅!
팔이 떨어질 것 같은 충격. 그리고 왼쪽 팔뚝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둘 모두 예상했다. 달려들기 전부터, 상대를 눈으로 직접 보기 전부터 피부로 그의 존재감을 느꼈기에. 이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친 팔까지 써가며 양 손으로 칸젤을 쥔 것이었고.
“웬 놈이냐!”
강대한 적이 불쾌하다는 듯 외친다. 그는 빛을 뿜고 있었다. 눈으로, 몸으로. 그것은 존재감의 표현이고 힘의 증거일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뛰어넘은 괴물이다. 그러고 보니 타칸연합국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이 떠오른다. 대족장 바로 밑의, 듣기로 초원의 대전사라 하는 자.
‘푸른 사자라는 별명이었던가?’
워낙에 유명한 소문이라 기억에 남았다. 살마드 공성전 당시 군주에게 맞섰던 두 야만인. 그 중 하나는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고, 또 다른 하나가 푸른 사자다. 푸른빛을 내는 괴물로 변한 그의 모습을 표현한 별명.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소문이 부족하군.’
아무래도 제국 측에서 돈 소문이다 보니 중점은 군주에게 맞춰져 있었다. ‘군주께서 사이한 술수를 부리는 두 야만인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물리치셨다고 하더라.’ 하는 것이 소문의 요지였다. 말하자면 군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제물이랄까.
하지만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임에도 단번에 알겠다. 이 ‘푸른 사자’라 불리는 전사는 강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하다. 몸이 정상일 때를 가정해도 쓰러뜨릴 자신은 그다지 없었다.
‘혼자라면 말이지.’
군터는 그를 노려보는 푸른 사자를 외면하고 시선을 돌렸다. 기이한 모습으로 변한 탓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아그니스 체스퍼임은 알 수 있었다. 입은 갑옷이나 다른 외관을 보기 전에 그 특유의 기세가 느껴졌다.
“군터인가? 자네가 여긴 어떻게.”동굴 속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다소 울리는 목소리였지만 역시 아그니스 체스퍼의 그것이었다.
“장군.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커티스는 어찌 되었나?”
“…….”
군터는 답하기 전에 슬쩍 푸른 사자 쪽을 보는 척했다. 그러자 아그니스 체스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야만인 놈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비스링이 공격받았습니다. 아마도…함락당한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안 그래도 돌덩이 같던 얼굴이 더욱 굳는다. 다행히 고개를 돌린다거나 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쓸어버려라!”
“qeubqiueiyec!”
군터 천인대 병사들과 타칸연합군이 맞붙었다.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휴전 지대는 이제 사라졌다. 양 측 군사들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치열한 살육전을 벌였다. 포라칸을 지키는 전사들은 최정예였으나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도 강군이라 할만 했고, 무엇보다 숫자가 많았다.
“앞으로의 일은, 저 자부터 해결하고 말씀하시지요.”
“…그래. 그러지.”
지금 당장 말머리를 돌리려고 해도(아그니스 체스퍼의 말은 이미 쓰러져 있었지만) 저 초원의 대전사가 놓아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대전사의 수급을 딸 수 있다면 요새를 잃은 손해도 일부나마 만회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대전사는 타칸연합국의 2인자이거나, 그 비슷한 위치일 테니 말이다.
“대장을 구하러 왔나. 충직한 부하로군.”
포라칸이 으르렁거렸다. 살기가 피부를 따가울 정도로 찔렀다. 의념을 담은 기세가 물리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하게 피어오른다.
군터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칸젤을 고쳐 쥐었다.
“오래는 버티지 못하네.”
“술법입니까?”
“맞네. 아니, 반쯤만 그렇다고 해두지. 빠르게 끝내도록 하세!”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그니스 체스퍼가 포라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한 발씩 크게 뻗을 때마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쾅!
흡사 덩치 큰, 곰 같은 짐승이 선 채로 덮쳐오는 것 같은 모습. 허나 포라칸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공격을 피하지 받아냈다. 두 사람의 창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둘 모두 비틀거리며 튕겨났다. 차이는 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단 한 걸음을 밀려난 반면에, 포라칸은 말과 함께 몇 번이나 뒷걸음질 쳤다.
벌어진 틈. 거기에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는 한 순간. 군터는 바로 그 사이를 치고 들어갔다. 처음 난입하며 그랬던 것처럼 내쉬와 함께 높이 뛰어올라 그대로 칸젤을 도끼처럼 내리쳤다. 포라칸은 이번에도 그 공격을 받아냈다.
“이놈!”
처음과 달리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증명하는 꼴, 군터는 곧 그를 밀어내며 반격을 가해오는 포라칸에 맞섰다.
채채챙!순식간에 3합이 오갔다. 매섭게 찔러오다가 뱀처럼 휘어 후려치고, 반격을 할라치면 단번에 밀어낸다. 맹세컨대 군터가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한 바 없는 수준 높은 창술이었다.
“하압!”
짧은 순간에 현란하게 펼쳐지는 창술에 군터가 곤란함을 겪는 사이 아그니스 체스퍼가 다시금 달려왔다. 역공을 가하려던 포라칸은 쿵! 하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곤 방향을 틀었다. 다시 한 번 쾅! 소리와 함께 그와 그의 말이 튕겨져 나갔다. 그의 현란한 창술도 아그니스 체스퍼의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했다.
‘힘.’
그것을 보며 군터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차피 저 대전사의 창술은 그보다 최소 한 수는 위. 당장에 그것을 정공으로 어찌할 수 없다면, 저런 방법도 나쁘지 않다. 제 아무리 대단한 기술이라도 결국 맹렬한 힘 앞에서는 뚫리게 되어 있으니.
‘가능한가.’
자신과 저 대전사의 힘을 비교해보았다. 첫 합을 겨루며, 그리고 방금 전 세 합을 부딪치며 느낀 바로 자신과 그의 힘 자체는 조금 밀리는 정도다. 우세를 점하기도 힘들고 대등하게 맞서기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붙을 수는 있을 정도는 된다고 할까. 하지만 왼쪽 팔뚝의 부상 때문에 제 힘을 내기가 힘들어 지금처럼 형편없이 밀려나고 있다.
우우우!
그런 생각이 이어질 때쯤 칸젤이 울었다.
녀석은 노했다. 녀석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칸젤은 곧 거울에 비친 군터 그 자신이었으니.
‘할 수 있다. 잠깐이라면.’
사령술을 익히며 자연스레 깨친 바가 있다.
사령술이란 사기, 즉 죽음의 기운을 다루는 것. 일반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고, 그렇기에 죽음의 기운이란 항시 존재와 함께 한다. 이 말 뜻은, 생기와 사기는 대부분의 경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기와 생기의 관계는 말하자면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대부분의 경우 같은 곳에 함께 존재하나 그렇다고 섞이지는 않는다. 하나가 드러나면 다른 하나는 가려진다.
사람을 두고 논하자면,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하면 사기가 옅은 사람을 말한다. 사기가 희미하다는 것은 생기가 만연함을 뜻하고 생기가 만연함은 곧 죽음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생기와 사기의 위치가 서로 바뀌는 것이고.
둘은 다르지만, 완전히 멀리 있지도 않다.
모페이브에게 들은 바가 있다. 본래 사령술을 연구하던 술자들은 영생(永生), 즉 불사(不死)를 추구하던 자들이라고 했다.
유한한 삶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다한들 결국 대다수는 끝내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소수의 뜻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언젠가 닥쳐올 종언(終焉)의 운명을 회피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실로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 되었으며, 사령술 역시 그렇게 나온 갈래 중 하나다.
죽음.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운명의 이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안겨주는 개념에 대한 연구.
혹자는 말했다. 죽음을 육신에 가두고 영적 자유를 얻자고.
혹자는 말했다. 죽음 그 자체를 거부하여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혹자는 말했다. 세월에 시들어가는 생기를 자극하여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자고.
단순히 사령술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정의내리기에는 너무도 방대하고 위대한 노력과 시도들이 있었다. 군터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페이브로부터(그가 구해 읽은 서적들로부터) 전해 들었고, 선대의 사령술사들의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삶과 죽음은 모두 이 안에 있다.’
모든 생명은 자그마한 씨앗으로 싹을 피운다. 그 씨앗은 잉태 된 순간부터 꾸준하게 자신을 소모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껍질을 깨지 않는다. 보다 오래 버티기 위함이다. 많이 움직이면 힘이 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씨앗의 본질인 것이다.
그 씨앗을 깨운다. 씨앗과는 전혀 다른, 언젠가는 씨앗을 삼키게 될 검은 아지랑이로써.
두근!
영감을 얻은 것은 살마드 공성전으로부터다. 정확히는 아란딜 페레모어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들었을 때다. 그가 금술을 써서 자신의 수명을 바쳐가며 적을 막아냈다는 이야기는 대놓고 도는 소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병사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며칠 사이에 검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던 얼굴이 노인처럼 변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같지는 않아도, 결국은 비슷한 것이었을 거다.
인간이 끌어낼 수 있는 힘이란 결국 하나 가진 육신을 근본으로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안에서 끌어올리는 막대한 힘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수법이라 해도 원리는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흐읍!”
매개는 칸젤이다. 사기의 결정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막대한 사기를 꽁꽁 품고 있는 칸젤은 그의 뜻에 따라 기운을 전했고, 군터는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안에 자리잡은 씨앗은 즉각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씨앗은 반응하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껍질이 흐물흐물해지고, 응어리져 있던 기운이 조금씩 풀어져 나왔다.
두근!
몸에 힘이 충만하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든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눈앞의 적이 더 이상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히히힝!
내쉬가 땅을 박찬다. 고삐 한 번 당기지 않았지만 영특한 명마는 주인의 뜻을 읽었다. 주인처럼 자신감에 찬 녀석은 망설임도 없이 힘을 다해 내달렸다.
쾅!
아그니스 체스퍼와 정신없이 맞붙던 포라칸은 또 다시 덤벼드는 군터를 일그러진 얼굴로 맞았다. 그리고 충돌 후,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이럴 수가. 어떻게?’
조금 전과는 충격의 정도가 달랐다. 이건 거의 거인처럼 변한 아그니스 체스퍼와 비슷한 수준이다.
‘설마 이 녀석도?’
신경도 쓰지 않았던 얼굴에 눈이 간다. 얼핏 보기에 외관상 특별히 변한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 평범했던 눈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면서도 강렬하다. 더불어 느껴지는 기운 또한 한층 더 강해진 느낌이다.
“제국…정말 대단하군.”
조금은 맥이 풀린 것 같은 목소리. 포라칸은 다소 허탈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두 적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결국 대족장의 말씀이 옳았다. 너희 제국은 강하구나. 일전에도 느꼈다만, 이제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푹!
포라칸이 창을 땅에 내리꽂았다. 적에게 대항할 유일한 무기를 손에서 놓은 그였으나 눈빛과 기세는 더욱 형형해지고 사나워졌다.
“드디어 발톱을 꺼내려나보군!”
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군터도, 아그니스 체스퍼도 느꼈다. 그들은 포라칸이 창을 놓고 중얼거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변화는 시작되고, 동시에 끝났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사람의 머리보다도 더 큰 앞발이 칼날을 후려쳤다. 거인처럼 변한 아그니스 체스퍼가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 군터가 내지른 칸젤은 푸른 안광의 코앞까지 다가갔으나 역시 또 다른 발톱과 마주쳐 힘을 잃었다.
콰앙!흡사 투석기가 날린 돌덩이가 성벽을 때릴 때 나는 굉음과 같았다. 군터는 전신이 진탕되는 느낌을 받았다.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정말이지 흉악하기 그지없는 거력.
크르르르…….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그들만은 아니었는지, 거대한 짐승으로 변한 포라칸은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양 앞발(손이라고 하기에 그것은 너무도 이질적인 형태였으므로)을 번갈아 내려 보았다.
“정말이지…끔찍하군.”
질렸다는 듯 아그니스 체스퍼가 작게 중얼거렸다. 군터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군주께서는 저런 놈을…….”
짐승처럼 변하면서 포라칸의 기세는 일변했다. 인간의 형태였을 때의 그가 잘 갈린 칼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초원에 몰아친 폭풍과 같았다. 날카롭지는 않지만 더 거대하고, 더 사납다.
“자네와 나, 모두 목숨을 걸어야겠어.”
“전장에 나서며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핫!”
아그니스 체스퍼가 크게 웃었다. 유쾌함이 묻어나는 웃음이다.
“그거 멋지군.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지.”
“예.”
그들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크아아아아아-!
초목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다시금 그들은 맞붙었다.
붙었다 떨어졌다가를 반복하는 세 사람의 주변으로 연신 광풍이 몰아쳤다. 창과 발톱이 허공을 찢을 때마다 경로 끝의 땅이 파이고 풀이 흔들리고 베여 휘날렸다. 둘이 부딪칠 때는 어김없이 굉음이 터졌으며, 이따금씩 나오는 광분에 찬 맹수의 포효는 주변 전장의 열기마저 쓸어버렸다.
10합…20합…….
반 정도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음에도 격돌의 횟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럴수록 투쟁하는 셋의 움직임은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더 격렬해졌다.
반 정도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음에도 격돌의 횟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전력으로 부딪치는 공방의 연속. 지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세 사람의 움직임은 점점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더 격렬해졌다.
터엉!
털과 갑각으로 뒤덮인 앞발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피를 토하는 그 와중에도 아그니스 체스퍼는 기어이 포라칸의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무시할 수 없는 충격과 고통에 포라칸이 주춤하는 사이 군터가 칸젤을 휘둘렀다.
스윽!별다른 마찰음도 없이, 칸젤의 예리하다 못해 서늘한 날이 포라칸의 목을 긁고 지나갔다. 마지막 순간에 포라칸이 황급히 목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혹은 그 움직임이 조금만 느렸더라면 틀림없이 피 분수가 치솟았을 것이다.
크르르르…….
뒷걸음질 친 포라칸이 목을 움켜쥐었다. 밀려난 아그니스 체스퍼가 무릎을 꿇은 채 가슴을 부여잡았다. 군터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포라칸을 쫓았으나, 느닷없이 끼어든 한 전사로 인해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하앗!”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달려든 전사의 심장에 칸젤이 꽂혔다. 전사는 부러진 칼날을 믿을 수 없이 바라보면서 곧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 짧은 순간 후, 포라칸은 목에서 손을 떼고 예의 그 흉포한 기세를 회복해 있었다.
“지독한 놈…….”
아그니스 체스퍼도 굽혔던 무릎을 다시 폈다. 허나 충격이 어지간히도 컸던 모양인지, 그는 여전히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면목 없습니다.”
“그런 소리 말게. 끄응!”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다만…시간이 다 되어가는군.”
“…….”
그것 참 절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초원의 대전사는 아직까지도 흉흉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아군의 전력이 감소해서야…….
군터의 고심이 깊어가는 순간. 멀리서 웅장한 북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사납게 이를 드러내던 포라칸이 움찔했다.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과 접전을 이어가던 타칸연합군 역시 일순 기세가 흔들렸다.
크르르르…….
포라칸은 갈등하듯 몇 번이나 발톱을 쥐락펴락했다.
“오늘은…여기까지 하지. 하지만 다음번엔 이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소 무거웠지만, 그래도 짐승과도 같은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한 음성.
“물러나려나보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겐 나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정비할 시간이 필요해.”
전사들은 곧 포라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멀쩡한 사람 형태인 이들도 있었고, 짐승처럼 변한 자들도 있었다. 허나 그들 모두 포라칸의 곁에서는 얌전한 양과 같았다.
오오오오오오-!
포라칸이 하늘을 보며 길게 울부짖었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타칸연합군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그런 그들을 쫓지 않았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직접 뿔 나팔을 불며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뿌우우우우우-!
끝장을 볼 때까지 이어질 것 같았던, 치열했던 전투에 일시적인 종막이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