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전투가 일어났다? 비스링에서?’
비스링에서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를 본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니 어떤 멍청한 놈이 성내에 불을 질렀을 리는 없으니, 남는 것은 전투의 가능성뿐. 하지만 투석 공격이 불길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양동(陽動)인가.”
침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찌해야 하는가. 비스링이 공격 받고 있다면. 아니, 만에 하나 이미 함락이라도 당했다면? 갑작스레 눈앞에 닥친 난국은 군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어려웠다. 이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는 그가 아니었다.
입술이 마른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아니.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머리만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빠른 판단과 행동이 최우선.
“이동한다.”
“옛?”
“총사령관을 찾는다.”
“아! 그렇다면 주변의 아군에게도…….”
“아니.”
군터는 할렌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단호한 부정에 할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리를 내고 많은 수가 움직이면 소란이 인다. 우리도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용히 움직인다면 적들도 크게 반응하지 않을 거다.”
적아가 뒤섞인 난전 상황. 아군이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적군도 움직인다. 그러면 발목을 잡히고 만다. 다소 냉정한 말일 수도 있으나 다른 아군은 필요 없다. 함께 움직이는 머릿수가 많아지면 곤란해진다.
“그렇지만 대장님. 총사령관님은 어찌 찾으시려고 하십니까? 헤매게 된다면 계속 길을 뚫는 것도 일일 겁니다.”
“총사령관은 중군의 선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감이다.”
할렌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보기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딱히 더할 설명도 없다. 실제로 군터가 믿는 것은 그의 감이었으므로.
아그니스 체스퍼라는 사내를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그의 곁에서 그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다. 그라면,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었을 것이라는 믿음에 가까운 추측이 있다. 딱히 달리 방도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의 감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콰앙!
두 자루 창이 붙었다 떨어졌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뒷걸음질을 치고, 숨을 몇 번이나 헐떡이고 나서도 그들의 창은 계속해서 몸을 떨었다. 그런 창을 쥔 두 사람의 팔 역시 경련을 유지했다.
‘끔찍한 힘이군.’
흔히 보통 사람들보다 유난히 힘이 더 센 장사들을 가리켜 괴력을 지녔다고들 한다. 보통과는 다른, 괴이하다 할 정도로 센 힘이라는 뜻이다.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게 쓰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눈앞에 버티고 있는 적. 그와 부딪치고 있자니 진정 괴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에 비하면 괴력을 지녔다 떠들어 대는 모든 이들이 다 범부로…아니, 약골로 변하리라. 거기다.
‘숨겨 둔 한 수가 더 있겠지.’
넘실거리는 푸른빛은 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아주 흐릿하게,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린다. 야만인 대전사는 저런 모습 덕분에 푸른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군주 줄카에게 맞섰다는, 목격자들이 전한 그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르다. 소문 속 푸른 사자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짐승, 혹은 괴물이었다. 아마 다른 괴인들처럼 변신을 한 거겠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놈에게 숨겨진 한 수일 터.
‘언제 꺼낼 테냐.’
쉬지 않고 부딪치지만 피차 여유를 두고 있다. 대치한 야만인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는 되도록 빠르게 결착을 내고 싶었다. 그가 다른 대장의 밑에서 종군하는 일개 무장이었다면 마음 놓고 상대했겠으나, 이곳에서 그는 전군을 이끌어야 하는 대장의 위치다. 아군의 기세가 떨어질 위기였기에 어절 수 없이 앞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한가하게 붙들려 있을 여유가 없다.
빠르게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그러나 무리를 할 수도 없다. 이런 싸움에서는 조급함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적. 급한 상황일수록 억지로라도 여유를 갖고 침착함을 유지해야 함을 그는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guiaradena(꽤 하는군).”
“사람의 말을 써라. 야만인.”
적의 입매가 비틀렸다. 앞의 말에서는 덤덤하다가 ‘야만인’이라는 말에서 반응했다. 확실히 모르는 말로 해도 욕은 알아듣는 법인가 보다. 아니면 어디선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지.
“veskadeuro(명을 재촉하는군)!”
일순 푸른빛이 진해진다.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며 인마가 하나가 되어 달려든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성공적인 도발이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안색을 굳힌 채 맞서 싸워갔다.
창과 창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수차례 굉음이 터졌다. 어디에 내놔도 명마로 평가 받을 말들이 주인들의 사투에 연신 비틀거리며 몸을 틀었다. 태운 주인들의 기세에 함께 하려는지, 두 마리 말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한 말들 위에서 주인들은 연신 살벌한 공격들을 주고받았다.
‘제국의 전사…저 놈도 어지간히 괴물이군.’
둘의 사투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포라칸에게 부관 형식으로 붙은 타칸연합국의 젊은 전사였다. 그는 대전사의 위용을 눈앞에서 보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또한 그런 대전사에 맞서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제국의 전사(초원의 젊은 전사에게는 아직 장군이라는 직위가 영 익숙지 않았다)를 보며 감탄했다.
이번 전쟁에 나서기 전에 대전사가 이르길, 세상은 넓다고 했다. 젊은 전사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대전사는 위대한 전사였다. 신의 후계자 그 자체인 대족장을 예외로 치면, 그야말로 초원 최고이자 최강의 전사다. 수 년 전의 전쟁에서 제국의 군주라는 자에게 실질적으로 패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 전투에서 직접 목격한 전사들이 전하기로, 제국의 군주라는 자는 대족장과 비슷한 인물이라 했으니까 말이다.
신을 품은 자. 그런 자들은 엄밀히 따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으로서 신에 맞서 눈 한쪽 잃고 끝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때문에 인간으로서, 초원의 전사로서 눈에 담고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이는 대전사다. 모든 초원의 전사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런데.
‘대전사의 말씀대로 세상은 넓군.’
저 자는 뭔데 대전사에 치열히 맞서는가? 혹시 저 자는 제국에서 대전사 같은 존재일까?
‘그래도 역시 대전사께는 안 되는군.’
팽팽하게 맞서던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대전사가 ‘힘’을 이끌어내기 시작하자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젊은 전사는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이십 합. 그 안에 끝난다.’
제국 대전사(로 추측하는)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틈을 공격도 없다. 그저 받아낼 뿐. 물론 저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푸른빛은 더 이상 진해질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빛나고 있다. 수인화를 하지 않는 한, 저것이야말로 인간의 육신으로 낼 수 있는 힘의 한계다. 즉, 대전사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뜻.
무난하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리 낙관한 순간, 갑자기 제국 대전사의 기세가 일변했다. 외형에서부터 변화가 일었다. 걸친 갑옷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를 태운 말이 휘청거리고, 몰아치던 대전사의 창이 크게 튕겨나갔다.
‘뭐지?’
젊은 전사는 눈을 크게 떴다. 착각이 아니다. 정말로 제국 대전사의 몸이 커졌다. 갑옷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다가 기어이 옆구리와 어깨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전마(戰馬)는 점점 다리가 굽어갔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피부색이 달라졌다. 본래 하얀 피부에서 피가 쏠리며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마치 청동처럼.
히히히힝!기어이 말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제국 대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싸워나갔다. 두 다리로 땅을 밟고 말을 탄 대전사와 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점점 더 커졌다. 그의 키는 거의 말에 탄 대전사의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 모습은 숫제 이야기 속 거인과 같았다.
콰앙!
대전사가 그의 말과 함께 밀려났다. 살짝 떠오르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수준의 괴력.
“아…그렇군. 일전에 아란딜 페레모어라는 놈도 이랬지. 네놈 역시 숨겨둔 술수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zisiewbui.”
대전사가 중얼거리고, 제국 대전사가 짤막하게 말을 받았다. 그리고서 그들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쉬지 않고 맞붙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그들의 싸움은 주변의 접근조차 불허할 정도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멀었군. 멀었어.’
인간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그들의 싸움을 보며, 젊은 전사는 무력함을 느꼈다. ‘축복’을 받고나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렸을 적 사냥 나가는 어른들을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 그것을 저 둘을 보며 또 다시 느꼈다.
‘가능할까.’
전사는 사투 속에서 성장한다. 위대한 전사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며, 저기서 싸우고 있는 당대의 대전사 역시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로 몸을 씻어야 할 것인가.
‘그 야녹처럼, 또 한 번 축복을 받는다면…그러면 가능할까?’
축복은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엄선된 전사들만이 자격을 부여받고 우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 중 온전히 축복을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은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반은 비참하게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성공적으로 축복을 받은 그조차 아직까지 우리 속에서 느꼈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물며 두 번의 축복? 도전했던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꽤 많았다. 초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도전했던 자들이 예외 없이 모두 실패하여 죽거나 폐인이 되고나자 도전하는 자들도 거의 없어졌고, 무엇보다 대족장이 직접 두 번째 도전을 금하면서 두 번의 축복이라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유일한 성공자, 야녹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녀석도 해냈다. 어쩌면 나 역시…….’
견디기만 하면, 성공하기만 하면 막대한 힘을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다. 두 번째 축복을 받기 전에 야녹이라는 전사는 출신을 제외하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개 전사에 불과했다. 그랬던 자가 두 번째 축복을 받고서는 최고 전사를 뛰어넘는 힘을 거머쥐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어쩌면 대전사 만큼은 아니라도, 그 근접하는 수준까지는 될 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별로 진지하지는 않은, 우스갯소리와 다르지 않은 수준의 것이기는 했지만.
‘나라면…어쩌면.’
젊은 전사들 중에서는 이름깨나 떨치는 그다. 아무나 대전사의 호위로 붙지는 않는 것이다. 한 명 밖에 해내지 못한 두 번째 축복이라도,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달콤한 상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젊은 전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두 대전사 너머, 역시나 혈전을 벌이고 있던 양 측 군사들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빗방울을 맞은 물웅덩이처럼 작은 파문이 인다 싶더니 곧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들이 보였다.
‘기마?’
아군인가? 아니다. 거칠게 길을 여는 자의 행색은 초원 전사의 것과는 다르다. 형체가 가까워지면서 구분할 수 있었다.
“적이다!”
젊은 전사는 칼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전사 주변을 에워싸고 대기하던 동료들이 즉각 반응했다.
적 기병부대는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은 끝내 길을 뚫어냈고, 그들 중 선두에 있던 자는 눈앞에 펼쳐진 널찍한 공간과, 그 중앙에서 맞붙고 있는 두 대전사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칠게 말을 몰아 두 대전사의 싸움에 달려 들어갔다.
“어리석은 놈! 놔둘 것 같으냐!”
젊은 전사와 그의 동료들이 마찬가지로 달려들었다. 허나 어리석은 제국군은 그들보다 빨랐다. 제국 대전사를 거칠게 떨쳐낸 대전사는 곧이어 날아드는 기형(奇形)의 창을 받아냈다.
========== 작품 후기 ==========
퍄퍄퍄퍄 / 퍄
가식적썩소 / 오늘도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John_Doe / 음. 장면 전환 시 짧게나마 서술을 추가하는 방식을 고려해보겠습니다.
통통한곰 / 감사합니다^^
Gomple / 수급들을 투석기에 채워 날리는 장면은 반지의제왕 영화 속 공성전에 대한 오마주가 맞습니다 ㅎㅎ
nerostail / 이제 거의 200화인데 성장해야지요 ㅎㅎ
잘되기를 / 감사합니다^^
case / 감사합니다. 전쟁씬은 정말 어렵네요...
광SSIN도 / 추천 항상 감사합니다^^
presentlee / 짧고 강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