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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97화 (197/1,064)

<-- 2부 -->

최고전사라는 자리에 걸맞게, 타브시리는 강했다. 그는 다른 괴인들보다 한층 더 위협적인 발톱을 휘둘렀으며,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까지 갖췄다.

군터와 그는 숨 한 번 들이킬 때마다 두어 번의 공격을 주고받았다. 오직 그들만이 주변과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마에서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줄지어 흘렀다. 단 한 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저 흉악한 발톱이 몸 어딘가를 찢어발길 것은 자명했다. 군터는 연달아 대여섯 번 씩이나 공격을 퍼붓고 잠깐 숨을 돌리는 타브시리를 노려보았다. 지금 공격을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에게도 숨 돌릴 틈은 필요했다.

‘확실히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다.’

흘려내기도 하지만 받아치기도 했다. 받아칠 때도 어떻게든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내쉬의 강인한 다리를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브시리의 공격은 흡사 커다란 쇠망치를 휘둘러대는 것처럼 묵직했기 때문이다.

군터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남은 저릿함을 털어냈다.

‘그래도…할 만하군.’

쉽지 않은 적이나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상대에게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면 그에게는 칸젤이 있다. 무지막지한 괴력 역시 마찬가지. 힘이라면 이쪽도 뒤지지 않는다. 체감하기로, 그와 타브시리의 힘은 비등한 것 같았다. 양쪽 다 이를 악 물고 전력을 쏟아 붓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 괴물이 되어버린 건가.’

외형부터 괴물인 적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나, 멀쩡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자신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괴물이든 뭐든 상관은 없지만.’

오히려 달갑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저런 괴물이 있고, 저보다 못하지만 역시 괴물인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걸 상대하려면 이쪽 역시 괴물이 되어야 한다. 괴물이 아니면 곤란하다.

크르르르…….

타브시리가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맹수가 적을 앞에 두고 그러하듯, 원을 그리며 상대의 틈을 찾는다. 짐승의 그것처럼 변한 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피가, 시체가 소리를 내며 밟혔다. 개중에는 먼저 죽어있던 것들도 있고, 그들의 싸움이 시작된 이후 죽은 것도 있다. 타브시리의 발톱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갈고리 같은 발톱에 몸이 찢겨 죽은 전사, 혹은 괴인의 수만 해도 열에 가까웠다. 그 뒤로는 제국군도, 타칸연합군도 그들의 주변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심지어 광기에 몸을 맡긴 괴인들마저도.

‘처음에 비해서는 움직임이 둔해졌다.’

거기에 착각인지는 몰라도 낮게 으르렁거리는 저 소리마저 조금은 힘이 빠진 느낌이다. 아마도 상처 때문일 것이다. 비록 정타는 맞추지 못했지만 가볍게 스친 횟수는 꽤 됐다. 칸젤의 날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타브시리의 단단해 뵈는 가죽을 가뿐히 갈랐고, 피를 뽑아냈다. 물론 그렇게 흘러나온 피는 남김없이 칸젤에게로 스며들어갔고.

칸젤이 외친다. 빨리 저 녀석을 쓰러뜨리라고. 쓰러진 놈의 몸뚱이 정중앙에 자기를 박아달라고.

‘나도 안다.’

칸젤의 마음이 바로 군터의 마음이었다. 군터의 마음이 곧 칸젤의 마음이었다. 주인과 병기, 하나는 손에 쥐이고 하나는 쥘 뿐이지만 둘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들은 호전적이며, 탐욕스럽다. 게걸스럽게 투쟁과 피를 탐한다. 제물이 바로 앞에 있다. 절로 조급해지려는 것을 붙드는 것은 군터가 가진 전사로서의 본능과 같은 냉철함이었다.

‘서두르지 않아. 서두르면 안 된다.’

힘이 들어간 몸을 느슨하게 풀었다. 조금 여유를 찾으니 똑같은 시야에 조금은 다른 것이 비친다.

타브시리. 흉포하고 흉측한 괴물이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처음과 다른 조심성이 엿보였다.

그야말로 짐승이다. 자잘하게나마 상처를 입고 조금 힘이 빠진다 싶으니 저러는 것이다. 군터는 칸젤을 가볍게 돌리며 내쉬의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타브시리가 설쳐준 덕에 주변이 비었다. 이는 곧 내쉬가 달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마련됐다는 뜻. 신호를 주기가 무섭게 거대한 흑마가 힘차게 내달린다. 순식간에 가속하는 내쉬에 힘입어 군터는 힘껏 칸젤을 내질렀다. 타브시리가 흉포한 괴성을 터뜨리며 옆으로 뛰었다. 허나 이 또한 예상했던 바, 찔렀던 칸젤을 회수하며 다시금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내쉬가 재빨리 발을 멈추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서걱!

크허엉!

깊다. 손에 감기는 감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타브시리가 피를 뿌리며 땅을 굴렀다. 피가 터져 나오는 부위는 어깨. 이로서 잠깐이나마 한쪽 발톱이 봉인된 것이나 마찬가지.

군터는 즉시 또 한 번 질주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손의 감각에, 얼굴을 적신 피에 마음이 동했을 뿐.

푸욱!

땅을 구르고 몸을 일으킨 타브시리의 가슴에 칸젤이 틀어박혔다. 타브시리의 육중한 몸이 질질 밀려났다. 타브시리가 한 손으로 칸젤을 움켜잡은 탓에 더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내쉬가 더는 밀지 못하고 콧김을 씩씩 내뱉을 무렵에는 타브시리의 고개가 죽은 듯 아래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군터가 칸젤을 뽑아내려 힘을 주는 순간, 떨어졌던 고개가 번쩍 위로 올라왔다. 샛노랗지만, 그러면서도 묘하게 푸른 기가 살짝 감도는 눈동자가 군터의 얼굴을 담았다.

크아아아아!

타브시리가 칸젤을 끌어당겼다. 칸젤의 긴 창날은 매끄럽게 그의 속살을 파고들었다. 군터와 그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군터는 타브시리를 떨쳐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대응하기도 전에 타브시리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턱!

군터는 재빨리 팔을 들어 타브시리의 팔을 막았다. 그러나 온전한 제지는 불가능했다. 군터의 몸이 크게 기울음과 동시에 털과 갑각이 뒤덮은 팔이 쭉 미끄러지며 갈고리 같은 발톱이 완갑을 갈랐다. 군터의 완갑은 두툼한 철제였지만 타브시리의 발톱은 그것을 깔끔하게 가르고 살을 긁었다.

“흐읍!”

군터는 이를 악 물고 칸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타브시리의 몸뚱이를 관통한 칸젤을 반 바퀴 돌리면서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괴력에 육중한 괴인의 몸뚱이가 허공에 떠올랐다. 군터는 허공을 베듯 냅다 칸젤을 휘둘렀다. 타브시리가 내던져진 짐처럼 칸젤에서 빠져 바닥을 굴렀다.

히히힝!

내쉬가 또 한 번 달렸다. 내던져져 꿈틀거리던 타브시리가 몸을 일으켰다. 가슴 한복판이 헤집어지다시피 했는데도 여전히 기운이 남은 듯했다.

크아아아아!내쉬의 울음이나 발굽소리를 들었을까. 타브시리는 다가오는 군터를 노려보며 흉성(凶聲)을 토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술 듯 거친 기세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상대를 보면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쿵!

타브시리가 뛰어올랐다. 그렇게 큰 몸뚱이에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이 뛰어올랐다. 피로 목욕을 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멀쩡한 어깨에 힘을 주며 발톱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내리 찍어 머리를 갈라놓으려는 생각이었겠지.

“하아!”

그러나 그의 발톱보다 먼저, 칸젤이 목표를 꿰뚫었다. 높이 치켜든 창극이 정확히 타브시리의 턱밑을 찔렀고, 그대로 관통하여 정수리 위로 삐져나왔다.

한 순간, 타브시리의 몸은 꼬챙이에 꿰인 것처럼 허공에 덜렁 멈춰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방금 전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이번엔 칸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후우…후우…….”

거친 숨이 터지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을 활처럼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이 풀리면서 왼쪽 팔뚝의 감각이 깨어났다. 그의 왼 팔뚝 아래는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을.’

실수였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됐고, 서두르는 와중에도 경솔했다. 피에 가려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는 않지만 통증으로 볼 때는 깊은 상처다. 뼈까지 상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당분간 왼 팔을 제대로 쓰기는 힘들 듯싶었다.

크르르!

강한 짐승이 죽으니 그보다 약한 짐승들이 몰려든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짙은 피 냄새를 맡은 것일까.

얕보였다는 생각이 들자 불쾌감이 들었다. 팔뚝이 파인 게 아니라 아예 팔 한 쪽이 날아갔더라도 저런 짐승들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저 흉측한 이빨을 이 목에 받아 넣으려면 몇 마리 가지고는 턱도 없다. 적어도 수십 마리는 와야 할 것이다.

“오늘 아주 포식을 하겠구나.”

그가 불쾌해하니 칸젤도 불쾌해한다. 칸젤이 들뜨니 그 역시 들뜬다.

군터는 마지막까지 칸젤이 사냥감의 피를 탐닉하도록 놔두었다. 몰려든 짐승들은 감히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기회를 살폈다.

“이놈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몸뚱이가 짐승처럼 변하면서 지능 역시 그리 되어버린 것일까. 그들은 이곳에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할렌과 병사들이 살벌한 기세를 피우며 군터에게 달려온 것이다. 상대해 싸우던 적들을 모두 해치운 모양이었다.

“대장님. 부상을…….”

“별 거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저놈들부터 처리하지.”

“대장님께서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건방떨지 마라. 이 정도 부상, 아무렇지도 않다.”

군터는 푸석해진 시체에서 칸젤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만류하는 할렌을 지나쳐 괴인들에게 돌진했다. 할렌과 병사들이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군터와 그의 수하들은 베이고 찔린 괴인들의 시신 근처에서 원진(圓陣)을 짜고 숨을 골랐다.

“커티스는?”

“뵈지 못했습니다. 아마 난전 중에 휩쓸리신 것이 아닐지.”

죽었을 거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난잡하게 흘러가는 전투 중에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을 거라는 뜻이다. 사실 그들 군터 천인대만 해도 처음 전투 시작지점에서 어느 정도는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주변에 적군과 마찬가지로 아군 병력도 다수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알 길이 없다. 기수(旗手)라도 있었으면 편하련만, 당장 눈앞에서 창칼이 오가는 와중에 태평하게 깃발을 들고 서 있을 강심장이 있을 리 없다.

“어찌하오리까.”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이냐. 적이 눈앞에 있다.”

어차피 난전. 이 상황에 목소리를 높인들 병사들에겐 닿지 않는다. 전고라든가 뿔 나팔 같은 약속된 신호가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게 아니면 최고지휘관의 고함소리도 괜찮겠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대, 대장님!”

“뭐냐.”

한 병사가 호들갑을 떨자 군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비, 비스링 요새에서…불길이!”

“뭣?”

내심 부정하며 병사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군터는 그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멀리 떨어진,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느 정도 또렷하게 보이는 비스링 요새. 그곳에서 병사의 말처럼 불길과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연참은 저도 하고 싶습니다만...여의치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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