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전투와 싸움은 다르다. 전투는 진지하지만 싸움은 보다 가볍다. 아니라고 할 자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둘을 가르는 기준이 그러했다.
전투는 끝없이 생각해야 한다. 궁리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을지, 어떻게 하면 더 피해를 적게 보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죽음과 삶이 바삐 뒤집히는, 이성적이기 힘든 무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이성적이다.
반면에 싸움은 본능적이다. 가쁘게 호흡을 달싹이는 찰나의 연속에 전투와는 달리 머리가 주가 되지 않는다. 생각은 필요 없다.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계속해서 이어갈 뿐. 반응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이다.
크허엉!
울부짖는다. 위협인가, 비명인가. 추위나 더위에 하도 시달려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피부를 바늘처럼 매섭게 찌르는 살의마저도 이제는 무디게 느끼고 있다.
푸학!힘주어 칸젤을 찍어내리니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며 피 분수가 터진다. 짐승의 머리다. 본래 인간이었을 때보다 반 배 이상 커진 머리지만 칸젤의 예기와 군터의 힘 앞에서는 조금 딱딱한 과일 껍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짐승 같군.’
외형은 짐승이거나 괴물이다. 그러나 그 속의 알맹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아닌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일까? 확실히 하나같이 흉측하게 번들거리는 노란 눈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상관없지.’
칸젤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동안 옆으로 슬쩍 빠져 있던 괴인이 개구리처럼 뛰어올랐다. 쭉 뻗은 팔 끝의 발톱은 스치기만 해도 살가죽은 물론, 뼈까지 갈라놓을 듯 위협적이다.
콰직!
짐승처럼 변한 괴인의 팔은 사람의 팔보다 확실히 길다. 그렇지만 창보다 긴 건 아니었다. 군터는 양 손에 쥔 칸젤을 쭉 밀어 젖히며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보통의 창이었다면 밋밋한 창대가 있어야 할 부분이겠으나 칸젤의 기형적으로 긴 창날은 괴인에게 있어 큰 불행이었다. 칸젤은 도끼처럼 우악스럽게 괴인의 어깨부터 가슴까지를 파고들었다. 광기도 고통을 다 가려주지는 못했는지 괴인은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꺽꺽 거리기만 했다.
그르르…….
심장 가까운 곳까지 파고 든 칸젤은 게걸스럽게 괴인의 피를 탐했다. 땅에 쓰러진 괴인의 몸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군터는 칸젤의 탐닉을 기다려주었다.
“cuirousalra(괴물)!”
괴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의 형태를 한 타칸연합군의 전사가 발작하듯 외치며 칼을 휘둘렀다. 군터는 칸젤을 쥐지 않은 손으로 베어오는 칼날을 붙들었다. 두터운 강철 장갑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칼날을 만질 수 있게 해주었다.
챙강!
손에 힘 한 번 주니 칼날이 뚝 부러졌다. 군터는 부러진 칼날을 쥐고 그대로 전사의 정수리에 쑤셔 박았다. 그의 손 안에서 부러진 연약한 칼날은 전사의 두개골은 손쉽게 파고들었다. 머리에 칼날이 박힌 전사의 몸이 썩은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쓰러졌다.
와아아아!
아아악!문득 막혔던 귀가 열렸다. 파리의 날갯짓 소리처럼 작고 거슬리기만 하던 함성과 비명이 세상을 뒤엎는다. 군터는 푸석푸석해진 괴인의 사체에서 칸젤을 뽑아들었다. 제법 깊숙이, 뼈까지 가르고 박혔던 창날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두 명을 또 다시 해치우고 나니 이제는 바로 그에게 덤벼드는 적이 없었다. 그제야 군터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앗!”
“흩어지지 마!”
기세 좋게 속도를 높이며 타칸연합군의 옆구리를 들이쳤지만 그들은 어느새 단단한 벽에 가로막혔다. 처음 짠 진형은 의미 없을 정도로 깨져버렸고 지금은 백인대, 십인대 단위로 쪼개져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기병들이었다. 기병은 본래 그 기동력, 돌파력에 강점이 있는 만큼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공간이 안 나는 전장에서는 그저 높은 곳에 있는 표적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약점임과 동시에 강점이기도 하다. 아래에서 올려치는 공격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공격은 힘을 받는 법이니.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런 진흙탕 싸움 같은 난전 속에서는 말이 상하기 쉽다는 것이다. 기수도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창칼로부터 자기 한 목숨 챙기기 바쁘니 말까지 어찌 신경을 쓰겠는가.
“queriuvea(개자식들)!”
할렌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몇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초원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배가 길게 베여 쓰러진 말 한 필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할렌 백인대의 병사들이 십인대 단위로 나뉜 채 각자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녀석.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안 됐군.’
이 얼마나 한가한 상념인가. 군터는 자책하면서도 말을 받고 며칠 동안을 실실 웃고 다녔던 할렌을 떠올렸다. 쓴웃음이 저절로 입가를 맴돌았다.
쿵!
설마하니 사람의 발소리가 그렇게 컸을까마는, 군터의 귀에 실제로 그것은 과장 조금 보태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그의 신경을 잡아 끈 것은 사실 발소리가 아니라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적의 존재감이었으리라.
크르르르…….
짐승의 울음소리다. 이제껏 계속 들었고, 지금도 사방에서 들리는 것들과 별 다를 것 없으나 이상하게도 이것은 귀 바로 앞에다 대고 소리를 내는 것처럼 뚜렷하게 들렸다.
“qebarka…buriabed(너는…강한가)?”
놀랍게도 새롭게 등장한 괴인은 말을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만큼 어눌하고, 그 내용마저도 정상적인 이성으로 내는 것이라기엔 과할 정도로 생뚱맞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보통의 괴인들보다 훨씬 더 큰 체구도 체구지만, 그보다는 무작정 덤벼들지 않고 멈춰 서서 말을 했다는 점에서 이 괴인은 특별했다.
“ushir(아마도). veskeba(너는)?”
괴인의 번들거리는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초원어로 대꾸가 돌아와서일까. 만약 그렇다면 처음 그의 물음은 애당초 답을 바라고 던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너…도망자…인가?”
“그랬었지.”
힘이 없어서, 살기 위해서 초원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은 제국군이 되어 초원의 주인들을 도륙하고 있고.
크르르…….
“넌 특별하군. 그렇지?”
“나…최고전사…타브시리…….”
최고전사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큼은 되는 듯했다. 군터는 자신의 이름을 타브시리라 밝힌 괴인에게 칸젤을 겨눴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타브시리.”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하는 최고전사. 상당히 인상 깊고 흥미롭지만, 그뿐이다. 그를 적으로서 눈앞에 두었으나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 본능이 속삭인다. 이 강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적을 쓰러뜨리라고.
그럼에도 투쟁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까닭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군터는 자신이 어딘가 비틀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전사라도, 군인이라도, 보통의 사람은 고통이 수반되는 그 어떠한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테니.
크허엉!
괴인이 울부짖는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짐승의 소리를 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편이 더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이겠지. 아마 저렇게 으르렁대면서도 별 다른 생각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터 역시 그랬다. 그 역시 솟구치는 힘에, 간질거리는 감각에 자연스레 모두 의지했다.
마음이 속삭인다. 당장 저 재미난 적의 목을 잘라버리라고.
그 마음의 목소리를, 군터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
안개가 걷혔다.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보이지 않던 형체가 드러났다. 전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가 데리고 갔던 전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대족장.”
비스링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한 전사가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타르가이 베르겐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야녹. 눈 아프게 노려본다고 해서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답답한 마음에…….”
호전적이다. 어느 전사가 호전적이지 않겠냐마는, 야녹은 그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하다. 일반적인 바르바피들은 수인화를 했을 때 이성이 희미해지지만, 야녹은 때때로 수인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광기를 드러내곤 했다. 그것이 바로 야녹이 최고전사가 되지 못한 이유이며, 타르가이 베르겐이 그를 곁에 두는 이유였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역시…부작용인가.’
‘우리’에 두 번 들어가려는 이들 자체가 드물었고, 그나마도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이는 야녹이 유일했다. 두 번이나 시험을 치른 대가로 야녹은 더 큰 힘을 얻었지만, 그에 따른 더 큰 대가 역시 치렀다.
“투석기를 준비해라.”
“대족장. 무자(巫子)들이 지쳤습니다.”
“무자들은 필요 없다. 돌을 쏠 것이 아니니. 가장 상태가 좋은 투석기 한 대와 솜씨 좋은 전사들을 대기시켜라.”
“알겠습니다.”
준비는 금세 끝났다. 애초 투석 공격이 지지부진 했던 이유는 무자들의 부담 때문이었으니 전사들이나 투석기야 준비하고 말 것도 없었다.
“실어라.”
타르가이 베르겐은 전사들 몇이 짊어지고 온 짐을 투석기에 싣게 했다. 커다란 가죽 보따리 안에서 나온 것은 피로 흥건하게 젖은 수급들이었다.
“쏴라.”
슈슈슝!
본래 돌덩이가 실려야 할 곳에 가득 담긴 수급들이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성벽으로 날아갔다. 백 개가 넘는 잘린 머리들은 날아가던 도중에 난잡하게 흩어졌다. 일부는 비스링 요새에 닿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졌고, 일부는 성벽에 부딪쳐 으깨졌으며, 또 다른 일부는 의도했던 대로 성벽 위로 떨어졌다.
“제국 놈들. 깜짝 놀라겠군요.”
주변의 전사들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동조하듯 살짝 웃고는 비스링의 성벽을 주시했다. 전사들의 기대처럼 혼란과 두려움이 번지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엉망이 되어 뭉개진 머리통들이지만 투구를 씌운 채로 날려 보냈으니 아군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 온전히 떨어진 것이 있다면 혹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천천히 준비해라.”
“드디어!”
투석기를 쏠 때부터 달아올랐던 전사들이다. 기대가 사실로 굳어지니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몸을 들썩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것은 역시 야녹이었다.
“야녹.”
“예. 대족장.”
“네가 미끼다.”
“기꺼이.”
곁의 다른 전사들이 다 그렇듯, 야녹에게서도 두려움의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곧 있을 전투를 기대하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지도는 기회가 되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워낙 지도 그리는 게 힘이 들어서요. 사실은 제가 솜씨가 없는 탓이겠지만.
표지는 20일? 전후로 해서 완성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중입니다 ㅎㅎ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스토리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할 텐데, 글 솜씨가 모자라서 쉽지가 않네요.
추천,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