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로레드 엥겔은 일찍이,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부터 아그니스 체스퍼를 따라 전장을 경험했었다. 그 인연 때문인지, 아그니스 체스퍼는 바크렌에 발령을 받으면서 데려갈 수하로 그를 지목했고, 로레드 엥겔은 평소 흠모했던 흑포장군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이 낯선 땅에 발을 디뎠다.
“또 시작이군.”
요란한 뿔 나팔 소리와 함께 피곤한 하루가 시작된다. 곧 투석 공격이 있겠지. 한동안 이어질 것이고, 저 멀리서는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제국군과 야만인 놈들의 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적당히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서로 못 이기는 척 군을 물리겠지.
‘답답하구만.’
로레드 엥겔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는 본래 성정이 급한 편이었다. 그가 요새의 사령관직을 떠맡은 것은 그 외에 달리 맡을만한 자가 없어서이지,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는 자는 적당한 선의 침착함과 느긋함을 갖춰야 하지만, 로레드 엥겔은 둘 모두 부족했다. 다만 다행이라면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다분히 주의를 한다는 것일까.
지금만 해도 그는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장군께서도 그것을 아시기에 지루한 탐색전을 이어가시는 거겠지.’
군사에 있어, 두 군대가 같은 조건이라는 전제 하에 지키는 쪽은 공격하는 쪽에 비해 상당히 유리하다. 첫째로 지리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로 쳐들어오는 동안 이동한 만큼의 피로가 쌓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보유한 군량의 차이다. 아무리 보급대를 많이 꾸려서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다고 해도 성 안에 쌓아두는 수비군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수비를 하는 측은 공격을 하는 측에 비해 커다란 세 가지 이점을 안고 간다. 물론 그 외에도 더 많은 이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점들은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큰 힘을 발휘한다. 전쟁의 이치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키는 쪽이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기다리면 원군이 온다는 말이지.’
타라냐드와 본다인, 어쩌면 리바스트라에서 올 원군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리 미덥지는 않다. 일전에 타라냐드와 본다인에서 보낸 원군이 바로 저 야만인들에게 완전히 싹 쓸려나갔다는 이야기는 군부 내에서도 쉬쉬하고 싶어 하는 치욕스런 기억이었다. 그만큼 저 야만인들이 강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뭐랄까, 중앙군의 입장에서 보면 지방군이라는 것들이 다 고만고만해 보였다.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용도라고 할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최상의 전력으로 최상의 시기에 싸운다. 그것이야말로 전략의 기본. 아그니스 체스퍼가 신앙처럼 따르는 군사 교범이다. 그리고 로레드 엥겔은 그런 상관을 충분히 존중했다. 이제껏 그의 방식대로 싸워 손해를 본 적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저 믿고 따를 밖에.
쾅!
돌덩이 하나가 첨탑의 창 쪽에 처박혔다. 마침 첨탑 아래 성벽에 서 있던 로레드 엥겔과 병사들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돌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써버렸다.
“젠장!”
로레드 엥겔은 마른기침을 뱉으며 성벽 위를 걸었다. 그는 혹시 돌덩이가 자기들 머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다독이면서 성벽 아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야만인들의 군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점점 솜씨가 좋아지고 있다. 며칠 전에 비해 성벽에 맞는 횟수가 반 배 이상 늘었어.’
추측컨대 저 야만인 놈들은 투석기를 다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을 대비해서 미리 몇 번 연습 정도는 해봤겠지만 허공에다 대고 쏘는 것고 실전에서 쏘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하여 처음에는 상당히 헤매는 듯했지만 며칠이 지난 이제는 제법 감을 잡아가는 것이겠지. 이쪽에게 있어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저런 돌덩이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아마도 없겠지만, 저런 것이 자꾸 병사들을 뭉개다보면 다른 병사들도 위축이 되기 마련이다.
“겁먹지 마라! 정신만 바짝 차리면 저 따위 느릿느릿한 돌덩이 하나 못 피하겠느냐!”
사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투석 공격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다. 정말로 정신이 칼처럼 날카롭게 서 있거나, 고도로 단련된 무인이 아니고서는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큼직한 돌덩이를 피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투석 공격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돌덩이를 만들어내는 술사들의 술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리라.
‘멍청한 놈들. 아무리 쏴대도 소용없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돌덩이들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판국에 나올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 어리석은 야만인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조소가 새어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정이 나아지는 것이 그들 제국측이라면, 저 야만인들은 정확하게 반대다. 그런데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투석 공격으로 요새 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며칠이면 족하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공성추를 써서 성문을 열고, 사다리를 놓아 성벽을 넘어야 할 게 아닌가? 설마하니 정말로 투석 공격만으로 성벽을 무너뜨릴 생각인가?
‘한심한……. 공성의 기본도 안 되어있군.’
로레드 엥겔은 그렇게 쯔쯔 혀를 차며 아둔한 야만인의 우두머리를 비웃고, 그 아둔한 지시에 따르고 있는 야만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둥! 둥! 둥!
갑작스레 전고가 울렸다. 북이 울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전과 달리 그 울림이 유난히 더 크고 길었다. 그 불길한 고동 속에서, 로레드 엥겔은 즉각 이변을 감지했다.
“하! 인내심이 바닥이 난 모양이군.”
성벽 난간에 가까이 붙어 적진을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적의 대병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단순한 위력시위로는 보이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예상대로, 두 군대는 곧 크게 맞붙었다. 넓게 진형을 펼친 제국군과 한 덩어리가 되어 중앙으로 돌진해 들어간 야만인들은 복잡하게 얽혀갔다.
“끄응……!”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혼전양상. 그것을 성벽 위에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로레드 엥겔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저곳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으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에이잇!”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편에서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던 수하 무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로레드 엥겔이 대뜸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냐!”
“안 됩니다!”
“장군께서 야만인 놈들과 전투를 벌이고 계신다! 마땅히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사령관님! 장군께서 하신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흔들리지 말고 요새를 사수하는 데 전념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다! 그래서 이제껏 충실히 자리를 지켰지.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저 바깥의 전투에서 만에 하나 장군께서 밀리시기라도 하면 요새에서 버티는 의미가 없어진다! 모르겠느냐!”
“그건…….”
무관의 말끝이 흐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장군께서 야만인들에게 당하실 리가 없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당장 바깥의 싸움은 그가 보기에도 혼전이었다.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켜라! 나는 장군을 도우러 가겠다. 요새는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지켜주게. 잠깐 동안이겠지만 말이야.”
“사령관님…….”
충직한 어깨의 수하를 두드려주고, 로레드 엥겔은 즉시 병력을 꾸려 요새의 남문으로 나섰다. 터블헨에 아그니스 체스퍼가 주둔한 덕에 비스링은 북문과 동문을 제외하고는 훤히 뚫려 있었다. 로레드 엥겔은 신속하게 군을 몰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터블헨 북쪽을 향해 이동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히히히힝!
성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오르막길을 달려가던 말들이 일제히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로레드 엥겔은 당황하여 말을 다독였지만 그의 말은 조금 진정은 했을지언정 다시 앞으로 달리려 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아! 왜 이러는 것이냐! 갈 길이 바쁘단 말…….”
말을 다그치던 로레드 엥겔은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어 경사진 언덕 위쪽을 노려보았다.
수풀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일어섰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그들은, 전형적인 타칸연합군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짐승들은 감이 좋지.]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말. 제국어도, 야만인들의 언어도 아닌 그것은 로레드 엥겔이 태어나 처음 접하는 기이한 울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신비한 경험에도 감탄하거나 궁금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그는 검을 뽑아들고 적의 수를 헤아렸다.
‘이백? 삼백인가?’
적다. 그가 끌고 나온 병력의 십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이유는 가슴 한구석에 체한 듯 자리 잡은 불안함 때문이기도 하고, 적들이 이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무식한 야만인 놈들이라도 자신이 없었다면 굳이 적은 수로 매복까지 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대체 어떻게…….”
[이 땅과, 이 땅의 정령들은 모두 나의 편이다.]
영문 모를 소리다. 하지만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자만했구나 야만인! 고작 그 정도 수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장군께 가기 전에 네놈들의 목부터 베어주마!”
[멧돼지 같은 놈이군.]
언덕 위에서,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를 올려보는 제국군을 보며 씩 웃었다. 그는 등에 맨 태도를 꺼내들었다.
“오래들 기다렸다 바르바피들아. 이제야 비로소 너희의 시간이다.”
크르르르르!
그의 뒤편에 머물던 전사들이 일제히 짐승의 모습으로 화했다. 태도의 칼끝이 언덕 아래를 가리키고, 허락을 받은 짐승들은 흉성을 터뜨리며 내달렸다.
*
군터는 좌군의 선봉을 맡았다. 그와 함께 싸운 천인장들이 그의 용맹을 인정한 결과였다.
커티스는 그의 왼편을 지켰고, 또 다른 천인장은 오른편을 채웠다. 할렌과 군터의 수하 기병 오백 기는 중심에서 군터의 바로 뒤를 받쳤다.
와아아아아!
전투가 시작됐을 때, 군터는 우군과 보조를 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타칸연합군이 중앙으로 파고들면서 자연스럽게 좌우군, 양 날개는 타칸연합군의 좌우를 감싸 안았다. 물론 그 날개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 박힌, 흉기 그 자체였다.
콰직!
히히히힝!
한 순간에 수십의 생명이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지는 가운데, 칸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우악스럽게 적을 짓뭉개는 군터의 입가도 역시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비정상적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럼 또 어떤가? 지금도 그의 가슴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다.
흥분이 마음을 집어삼키고, 희열이 몸을 채운다. 창과 창의 주인은 눈을 감지 않고 강한 적을 찾아 헤맨다.
커헝!
바르바피의 이빨이 팔뚝을 향한다. 칸젤의 창대가 놈의 입에 대신 물리고, 이어 군터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짐승의 입 안에서 창대가 쑥 밀려 내려가고, 대신 날카로운 창날이 놈의 아가리를 찢어발긴다. 반쯤 떨어져 나간 턱이 덜렁거렸다. 고통과 광기에 물든 눈에 피를 삼키고 있는 칸젤이 내리 꽂혔다.
========== 작품 후기 ==========
그만쉴래님 저는 사람은 어지간하면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생각하기에...^^
Guaaaaak님 글쎄요..^^
비누좀주워주세요님 현재 제국의 전선은 대부분 봉합이 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된 것인데, 이제는 둘이 되었습니다. 휴전 혹은 정전이 어떤 식으로 되었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군주라 하심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군터가 있는 전선(바크렌)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황제의 죽음 때문에 좀 많이 바쁩니다.
가식적썩소님 쿠폰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퍄퍄퍄퍄님 한결같으시네요ㅋㅋ 닉네임 잘 지으신 것 같습니다.
광SSIN도님 추천은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