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뭐, 뭐야!”
타칸연합군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대와 대치하며 비스링에 공격을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 넘어갔다. 그 동안 몇 차례 씩 자잘한 교전이 있었지만 전면전으로 치달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군대를 이끄는 두 지휘관이 모두 의식적으로 그런 상황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이 넘도록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군졸들도 조금씩, 어느 정도는 타성에 젖어갔다. 오늘도 이러다가 별 일 없이 넘어가겠구나 하는 마음, 혹은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별 탈 없이 흘러갈 것만 같았던 오늘은 느닷없이 자욱한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달려오는 타칸연합군에 의해 파국을 맞았다. 주변을 겉돌며 화살을 날려대던 적들은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좌우 양쪽을 크게 돌더니 후방으로 치고 들어갔다.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던 제국군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혼란이 막 번지려 하는 그 순간, 아그니스 체스퍼가 홀로 말을 몰며 달려 나왔다. 그는 이제껏 소리 지르던 일선의 장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겁쟁이 야만인 놈들이 튀어나오는구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차다! 용맹스런 제국의 아들들이여! 마침내 너희들을 위한 시간이 왔다! 저 무도한 침략자, 야만인 놈들의 목을 취하고 영광을 쟁취하라!”
천둥처럼 떨치는 고함소리에 이어 절로 몸을 떨게 만드는 강렬한 기세가 폭사했다. 병사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한 손에는 들고 있던 그의 창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지금 막 허리춤의 칼집에서 뽑아 든 검을 높이 치켜 올렸다.
“원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이곳에서 우리는 용전으로 그에 답하리라! 고수(鼓手)들은 무엇 하느냐! 진군의 북을 울려라!”
두웅! 두웅! 두웅!
와아아아아아!
일제히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함성을 맞으며 아그니스 체스퍼는 양 손의 무기를 좌우로 펼쳤다. 약속된 신호에 따라 좌우의 날개가 펴지면서 자연스레 중군을 앞질러갔다.
“장군!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안쪽으로!”
“아니다! 병사들에게 싸우라 해놓고 나만 뒤로 빠져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장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부관의 말에도 아그니스 체스퍼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중군의 선봉으로 나아가 빠르게 다가오는 적군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저 시야의 한구석을 차지했었을 뿐인 먼지구름은 이제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크게 보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라도 했나.’
본격적인 대전투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는 생각했다. 이제껏 신중했던 적이 갑자기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단순히 아군이 느슨해지길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다. 수가 너무 얕다. 탐색전을 통해 가늠한 적장은 그보다 똑똑한 자였다. 열흘 여는 전장에 나선 한 군대가 물러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뭐지?
“…….”
점차 커지는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는 어떻게든 그 너머를 꿰뚫어 보려 노력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당장 다가오는 적들보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적장의 속내가 더 중요했다.
‘지금 끝장을 보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수가 조금 적다. 본진에 병력을 남겨뒀다는 뜻이겠지. 비스링의 군대가 빈 집을 치러올 것을 우려해서인가? 만약 그렇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한 줄기 의심.
‘비스링의 군대라고?’
다급히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요새를 보았다. 육안으로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이 동요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병사들이 열흘 여에 걸친 지루한 양상에 물들었듯이 그들 역시 그랬을 테니까. 아니, 성벽 안에서 적습의 염려 없이 지냈던 그들은 오히려 야지에 있던 그의 병사들보다 더하지 않았을까?
“닐스!”
“예! 장군!”
“당장 비스링으로 전령을 보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요새의 수비에 전념하라 전해!”
“옛!”
한 번 의심의 가닥이 잡히니 불길한 마음이 빠르게 덩치를 키운다. 그 사이에 타칸연합군은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제 아그니스 체스퍼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졌다. 눈앞의 일전에 집중할 때가 왔다.
와아아아아!
넓게 펴진 양 날개가 파고드는 적을 감싸 안는다. 한계까지 치솟았던 수만 군세의 전의와 살의가 일순간 폭발했다.
*
“죽어!”
“끄아아아악!”
타칸연합군의 전사들은 가볍다. 그렇기에 그들의 돌격은 위력적이지 않다. 그들이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따돌리며 멀리서 활을 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이것이 제국군의 생각이었다. 단 한 가지 유의할 점이라면 언제 괴물처럼 변해서 발톱을 휘두를지 모를 수인병 정도.
이런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육중하게 무장한 중보병들을 앞세워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고 뒤에서 긴 창으로 기마를 찌른다. 그보다 뒤에서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궁병들이 적을 견제한다. 이상적인 그림이었고 이제껏 잘 먹혀들었다.
결코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고 대처였다. 그러나 제국의 기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볍다한들, 기본적으로 기병이다. 창을 들고 돌진하는 기병은 설령 갑옷을 걸치지 않은 맨 몸이라고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더군다나 선봉의 파괴력이 중무장한 방패병들의 방진을 뚫을 정도로 강력하다면, 제국이 고수해왔던 단단한 진형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무릇 단단한 껍질 안에 숨은 속살은 외부의 공격에 면역이 없기 마련이니.
오오오오오-!
시퍼런 불꽃이 타오른다. 그의 포효를 듣고, 파랗게 타오르는 눈을 본 병사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흉악한 창날이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한 정수리를 꿰뚫었다. 머리는 투구와 함께 박살이 나고, 몸은 화살처럼 뒤로 밀려났다. 뒤편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마저 한 덩이가 되어 굴러갔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제국군의 단단한 방벽을 돌파했다. 우악스럽게 비집고 들어가는 그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정면에서 막아선 병사가 방패 째로 으스러지는 것을 본 병사들은 감히 그와 맞서려 하지 않았다. 포라칸은 마치 먹잇감 무리 사이에 뛰어든 사자와 같았다. 하지만 그런 포라칸의 질주도 곧 벽에 막히고 말았으니, 곧 두려움을 떨쳐낸 제국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던 것을 멈추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악!”
비명인가 기합인가. 찔러오는 창을 슬쩍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피해낸 포라칸은 과하게 앞으로 나온 병사의 머리를 투구 째로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힘 한 번 들어가니 우드득! 소리를 내며 투구가 찌그러진다. 그 안에 든 사람의 머리도 덩달아 으깨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잠깐일 뿐, 곧 투구와 함께 형체를 잃은 머리가 붉은 덩어리를 쏟아낸다.
“으…으으으…….”
“아아아아!”
그의 주변, 창 한 번 휘두를 법한 거리 내에는 그 어떤 적도 없었다. 용감하게 달려들던 서넛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뭉개지는 것을 보고는 달려들던 이들조차 두려운 기색으로 멈춰 선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압도적인 힘과 잔혹함을 보이며 주변을 짓누른 포라칸이었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당초 바람은 처음 돌격으로 적진을 통째로 꿰뚫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단했다. 그는 무겁게 무장한 적을 몇 겹 뚫어내지 못한 채 멈춰버리고 말았다. 선봉이 멈췄으니 그 뒤도 덩달아 멈춰버림은 당연하다.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다. 애초 그렇게 쉬운 상대였다면 대족장이 그토록 시간을 들였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돌격은 멈췄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난전.
“바르바피여! 맹진(猛進)하라!”
크허헝!
크아아아아아!
대열의 중간 즈음에 속해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몇 번 크게 뛰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이형의 괴인으로 변해 있었다.
“수인병이다!”
“물러서지 마라!”
제국이 수인병이라 부르고, 타칸연합국이 바르바피라 불리는 전사들은 아물어가던 제국군의 균열을 다시금 벌려놓았다. 날아드는 창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난폭하게 날뛰는 그들은 괴인이요 광인이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제국군은 정예였다. 선별하여 고된 훈련을 이겨낸 자들이었고, 대다수의 병사들도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질 좋은 무구로 무장까지 한 그들은 분명 제국의 중앙군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강병이었으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맹수처럼 날뛰는 괴인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잊은 듯, 목을 노리는 칼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드는 적 앞에서 그들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퍼걱!
바르바피들이 좌우로 날뛰며 나아가자 선봉으로서 압박을 받고 있던 포라칸이 여유를 얻었다. 그는 하나뿐인 눈에서 짙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가로막는 제국군들을 도살해갔다. 그의 뒤를 지키는 전사들 역시 덩달아 힘을 얻었다.
“안 돼! 물러서지 마!”
분전할 것을 외치던 장교의 몸 위로 시커먼 형체가 들이닥쳤다. 날쌘 짐승처럼 높이 뛰어오른 바르바피 한 명이 그를 덮친 것이다.
“으아악!”
장교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우악스러운 괴인의 힘은 그를 용납지 않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어깨를 찍었고 맹수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빨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대전사여! 오늘 제국 놈들을 끝장내는 것입니까?!”
“흥분하지 말고 전투에 집중하라!”
포라칸은 그의 옆까지 불쑥 나와 말을 거는 전사를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머리부터 내미는 통에 하마터면 머리통을 부숴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전사는 여전히 흥분을 지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가벼운 한 마디에도 바로 바싹 굳어서 고개를 숙였을 텐데 말이다. 전장의 광기가 그의 일부를 잠식했음을 보여준다.
‘늦었나.’
이 전사를 탓할 것도 아니다. 바르바피들은 물론이고, 다른 전사들 역시 잔뜩 흥분해 있기는 마찬가지.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 하나뿐일 것이다. 열기가 식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으리라.
‘어차피, 진정하거나 물러날 이유도 없다만.’
대족장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적장이 먼저 군을 물리지 않을까. 진정은 그때 가서 해도 될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금 창을 힘주어 쥘 때였다.
“제국의 용맹스런 병사들이여! 싸워라! 승리가 눈앞이다!”
갑작스레 적진이 흔들리는 듯싶더니, 갈라서는 병사들 틈으로 일단의 기마가 튀어나왔다. 고작해야 수백 기 밖에 되지 않아 뵈는 그들은 코앞에만 그들의 배 이상이 버티고 선 타칸연합군을 향해 겁도 없이 돌진해 들어왔다.
그 무모함도 무모함이지만, 무엇보다 포라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무리의 선두에 튀어나와 있는 한 사내였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양 손에 창과 검을 든 그는 가로막는 바르바피 두 명을 단번에 베어 넘겼다.
“하하하하핫!”
그가 누군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만한 투기, 저만한 담력. 거기에 한 번 외치고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 기세를 잃어가던 제국군이 갑작스레 용맹한 함성을 내지른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감이라면, 저 사내가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
오오오오오오오-!
한껏 포효한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있던 인마(人馬)가 모두 그 흉포함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찰나지만 그는 이 혼란스러운 현장을 지배했다. 그리고 바라던 먹잇감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네놈이 푸른 사자로군. 감히 군주께 이빨을 들이댔다던.”
먹잇감이 웃는다. 그 역시 웃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니, 병사와 전사들이 모두 발을 뒤로 빼며 물러났다. 훤히 뚫린 길 위에서,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콰앙!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