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첫날의 전투는 타칸연합국 측의 전고가 울리면서 끝이 났다. 투석 공격이 멈추고, 나와 있던 적들도 모두 말머리를 돌리니 아그니스 체스퍼도 본군을 터블헨으로 물렸다.
“수고들 했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의 막사에 모인 천인장들에게 일일이 한 잔씩 술을 따라주었다. 특히 커티스를 비롯하여 바쁘게 움직인 천인장들을 우선하여 잔을 채웠다.
“한 잔 뿐이라 투덜대지들 말게. 자네들이 잘 싸워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열 잔이든 백 잔이든 따라주지 못할 이유가 있겠나. 나 역시 한 잔으로 그칠 테니 한껏 취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자, 드세.”
한 모금 술은 술이 아니라 물과 같다. 취기는 물론이고 뭘 마셨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허나 하루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냥 한 잔도 아니고 자그마치 장군이 따라준 술이 아닌가. 전장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소감을 들어보고 싶군.”
“들은 것에 비해서는 별 것 아니었습니다.”
설마하니 한 잔 술로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다른 천인장들은 물론이고 아그니스 체스퍼도 껄껄 웃고 넘기지 않는가.
“자신감은 좋군. 언제고 한 번쯤은 자네에게 선봉을 맡기겠다.”
“기회를 주신다면 소관이 어찌 마다를 하겠습니까.”
군터는 이 다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낯설었다. 여기 있는 자들 중 상당수는 일찍부터 아그니스 체스퍼의 휘하로 종군하던 자들이었다. 군터 뿐만이 아니라, 이번 전쟁 때문에 새로 들어온 이들은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 이제 농은 그만하지. 저 야만인 놈들, 어땠나? 기탄없이 이야기하도록 하게.”
아그니스 체스퍼가 쭉 한 번 시선을 돌리니 커티스가 손을 들었다.
“그래. 오늘 커티스 자네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었지.”
“하하! 장군이라면 당연히 호응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좋아. 직접 부딪쳐보았으니까 잘 알겠군. 어떠하던가?”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놈들은 우리의 기병보다 더 가볍고 빠릅니다. 달아나면 쫓아갈 수 없고, 따라오면 뿌리칠 수 없습니다. 거리를 벌리며 활을 쏴대면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요.”
“엄살처럼 들리는군.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 자네는 놈들을 한껏 흔든 뒤에 뿌리치기까지 했잖나.”
“여기 군터 천인장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커티스는 옆에 앉아 있던 군터를 가리켰다.
“음?”
“놈들은 강했습니다. 부딪쳐 돌파하려 했을 때, 이쪽의 군터 천인장이 선봉을 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틀어 막혀 적에게 큰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휘하 기병을 이끌고 후미로 가 적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추격을 뿌리치지도 못했을 테고 말입니다.”
“사실인가?”
“소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튼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소관은 군터 천인장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굳이 한 것도 없는 자를 띄워줄 이유는 없지요.”
“흠.”흥미롭다는 듯 커티스와 군터를 번갈아 본 아그니스 체스퍼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치지. 야만인 놈들에 대해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놈들은 가볍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습니다. 하나하나가 약졸이 없고, 특히 수인병은 괜히 악명을 떨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큼 강했습니다. 가죽이 두꺼워 제대로 힘을 실은 공격이 아니라면 큰 상처를 낼 수 없고,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소관이 한 번이지만 놈들과 직접 싸워본 바, 놈들은 난전에서 특히 힘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정보로군.”
그 뒤로도 몇몇 이들이 오늘 그들이 경험한 바에 대한 소감을 내놓았다. 하나 같이 경시할 수 없다, 만만치 않다는 말들이었다.
“귀관들이 말한 대로다. 나 역시 그대들과 같은 보았고, 느꼈다. 놈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나조차도 이제껏 상대해 본 적이 없는 까다로운 적이다. 오늘 우리는 자그마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작은 승리가 최후의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가벼이 마음먹지 마라. 하지만 반대로 과하게 경계할 필요도 없다. 오늘의 첫 교전으로 우리가 놈들을 만만치 않다 여기게 되었다면, 놈들 역시 그러할 테니까 말이다.”
*
“대족장. 원하시는 바는 이루셨는지.”
“글쎄. 사람을 하루아침에 안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타르가이 베르겐의 태연한 말에 자리한 전사들의 안색이 저마다 조금씩 어두워졌다. 물론 대놓고 표정관리를 못하거나, 입을 얼어 볼멘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다.
“전사자가 이백 가량. 부상자 또한 그 정도입니다. 탐색전이었다 하나 저 쪽의 기세를 살려줄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그건 자네의 생각인가, 아니면 전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겐가?”
포라칸은 입을 다물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슬쩍 자리한 전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단 한 명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이가 없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던 그의 시선은 끄트머리에 앉은 전사에게서 멈췄다.
“야녹.”
“예. 대족장.”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던가?”
“…아닙니다.”
“너는 더 강한 전사가 되어 일족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에 난 네가 ‘우리’에 또 한 번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지.”
“대족장의 은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결의에 탄복하여 응했을 뿐이다. 하지만 야녹. 여기는 전장이며, 이곳에 전사는 없다. 오직 군인만이 있을 뿐.”
“…….”
“짐승은 본능을 따르지만, 군인은 명령을 좇는다. 내게는 군인이 필요하다. 짐승은 필요 없어. 내 말뜻, 알겠느냐?”
“…예.”
일렁이던 푸른 안광이 가라앉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난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타르가이 베르겐은 시선을 거뒀다. 야녹이라 불린 전사의 얼굴에서 몇 가닥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적장은 영악한 자다. 얼핏 과감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모두 계산이 깔려 있으니,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자임에 틀림없다. 그런 자가 거는 싸움에 섣부르게 응했다가는 크게 피해를 보게 될 터.”
결국에는 또 다시 신중론이다. 전사들은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 타르가이 베르겐이 아니었다.
“전투와 사냥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전투와 전쟁은 또 다르다. 우리는 이제 초원에서 하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 적의 수는 우리보다 월등히 많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제국만이 아니다. 적의 목 열 개보다 우리 전사의 목숨 하나가 중하다.”
“하지만 대족장. 싸우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알고 있다. 당연히 싸울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방식대로 싸우지는 않아.”
“그 말씀은?”
“이곳은 초원이 아니야. 우리는 초원 밖의 싸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때,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천막의 문이 크게 펄럭였다. 일부 열린 틈 사이로 비친 하늘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했다.
“인내심을 가져라. 사냥에서 그렇듯, 전쟁에도 인내심이 필요하니. 그것을 몰랐기에 이전의 전쟁에서 우리는 흘리지 않아도 되는 피를 더 많이 흘린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들이 타르가이 베르겐의 말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꾸하거나 반감을 표하지 못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제국인들이 죽었다는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초원인들에게는 그들의 대족장이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오히려 그보다 더 절대적이다. 제국의 황제는 신의 사도라 하지만, 대족장은 그야말로 신 그 자체였으므로.
*
“전진! 겁먹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쏟아지는 화살의 비에도 방패병들은 꿋꿋이 나아갔다. 일부는 전면을 막고, 일부는 머리 위로 방패를 든 그들은 흡사 단단한 껍질을 두른 것 같았다.
“저 비렁뱅이 야만인 놈들의 천박한 화살은 너희의 멋진 방패와 갑옷을 절대 뚫지 못한다!”
“놈들은 절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해! 왜? 오면 황소에게 밟힌 쥐새끼처럼 으깨져 죽을 걸 알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되는 대로 외쳐대는 일선 장교들. 평소라면 싸구려 농담거리 밖에 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목소리가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되었다. 말의 내용보다, 장교들이 목소리로 보여주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병사들에게 그들이 이기고 있다는, 적이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텅! 터터텅!손에 든 방패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 걸친 모든 무장이 육중하다. 그야말로 중보병(重步兵) 그 자체. 그들을 처음 뽑을 때 가장 먼저 본 조건이 체격과 힘인 만큼, 그들은 군단의 선두이자 방패가 되어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질리도록 단단한 놈들입니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옆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포라칸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굳건하게 진형을 갖추고 밀고 들어오는 적은 좌우로 활을 쏴대는 전사들의 움직임에도 도무지 흔들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초원의 무법자라 불리는 철갑코뿔소와 겹쳐 보일 정도였다.
“물리시겠습니까.”
며칠 째 반복되고 있는 흐름이다. 타칸연합군이 비스링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터블헨의 아그니스 체스퍼가 군을 움직이고, 그러면 타칸연합군은 병력 일부를 돌려 그들을 상대한다. 하지만 두 군대는 정면충돌 없이 서로 위협과 견제만 주고받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뒤로 물러난다. 제3자가 멀리 떨어져 이 며칠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면 저게 뭐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법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군을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예컨대 지금 크게 반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전사들을 그대로 깊숙이 침투시켜 적의 후방을 노린다면 큰 성과를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투입한 전사들 중 상당수를 잃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 되었건 한 번 선택을 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 확실한 기회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않는다. 타르가이 베르겐과 아그니스 체스퍼, 둘 모두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포라칸은 오늘도 적당히 하고 물러날 것인지를 물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모습이 어제와 다르지 않았기에, 그는 오늘도 이렇게 끝이 나려나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타르가이 베르겐은 고개를 저었다.
“전사들을 밀고 들어오는 적의 뒤쪽으로 파고들게 한다. 저 단단한 무리가 걸음을 멈추면 이쪽에서 전력으로 부딪친다. 자네가 1만을 이끌게. 맡겨도 되겠지?”
어제 전사들을 물리라고 할 때와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전면전을 이야기한다. 포라칸은 이 종잡을 수 없는 젊은 대족장의 속내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건 둘째다. 지금 중요한 건, 마침내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허면 대족장께서는?”
“나는 사냥을 나서야겠네. 자네가 사냥감을 잘 몰아줘야 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적을 쓸어버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신비로우면서도 어쩐지 꺼림칙스러운 자줏빛이 타르가이 베르겐의 두 눈에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