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두 명의 병사가 짝을 이루어 큼직한 활을 조작한다. 한 명은 지지대를 설치하고 활을 놓은 뒤 몸을 실어 내리누르고, 또 다른 한 명은 화살을 장전하고 조준한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활이 아닌 노포다. 본래 공성무기로 쓰이는 것을 경량화한 것으로, 본래의 노포보다는 떨어질지언정 그래도 일반적인 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사거리와 위력을 자랑한다. 정령수(精靈樹)의 가지로 궁신(弓身)을 제작했고, 시위는 요정의 머리카락으로 되어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다. 무언가를 만드는 자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의미가 아니면 최소한 이름이라도.
아무튼 이 경량화 된 노포는 제국의 신형 병기다. 야전에서 지구전에 돌입할 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아직까지 기술적인 문제로 본격적인 대량생산에는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주요 전선의 부대만이 보유하고 있는 이 신병기가 아그니스 체스퍼의 군대에 있는 것은 제국 조정이 그래도 바크렌의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 줬다는 증거이리라.
“계속 쏴라! 쉬지 말고 쏴!”
장교들이 바삐 움직이며 외쳐댔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뒤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그들 덕에 노포를 만지는 병사들은 손이 다 부르트도록 화살을 걸고 쏘고를 반복해야 했다.
“그래. 실컷 쏴라.”
대량생산이 안 되는 신병기라 화살 한 대 한 대의 가격도 일반적인 화살과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 화살을 사는데 그가 돈을 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저걸 또 언제 써보겠는가. 일단 적과 교전에 들어가면 저런 무식한 물건을 사용할 틈 따위는 생길 수가 없다. 괜히 다급히 움직이다가 빼앗기거나 손상이 될 바에야 지금 모두 다 써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옆쪽의 상황은 나쁘지 않군.’
커티스의 부대는 기어이 적을 돌파하여 추격까지 뿌리쳤다. 길게 선회하며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이다. 덕분에 셋으로 나뉜 적 기병 중 둘은 발이 묶였고, 나머지 하나는 피어슨이 상대 중이다.
‘이쯤 왔으면 많이 왔지 않나. 슬슬 움직일 때도 된 것 아닌가?’
생각보다 인내심이 강하다. 타르가이 베르겐이라고 했던가? 군주의 검을 상대로도 목숨을 부지했다면 무예 또한 출중할 터.
보통 무예가 뛰어난 무인은 자부심이 강한 법이고, 자부심은 종종 얕은 인내심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적도 자신을 해할 수 없으리라는, 어떤 적도 자신이라면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 야만인들의 우두머리는 예상보다 침착한 자인 듯했다. 이렇게까지 앞으로 나와서 도발까지 하고 있건만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연 일군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것일까.
‘계속 버텨라. 계속 쏴줄 테니.’
어차피 탐색전. 이쪽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저 비싼 활이나 실컷 쏘다가 물러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거기! 벌써 지친 거냐! 쏘는 속도가 느려지…….”
퍼억!
한 순간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 둘에게 다가가던 한 장교의 머리가 산산이 박살이 나버렸다. 노포의 화살보다도 더 큰, 흡사 작은 창과도 같은 무식한 물건이 그 원인이라는 것은 핏물에 흠뻑 젖은 그것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두려움이 아닌, 당황이 번졌다. 설마 이 정도의 거리에서 무언가 날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열심히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뭐냐, 저건?”
당황한 것은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땅에 떨어진 물건의 정체가 화살 비슷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보통의 화살을 몇 배나 더 키우면 저런 모양일까? 누가 저걸 쏘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호들갑떨지 마라! 고작 화살 한 대가 날아왔을 뿐이다! 계속 쏴라! 방패병들은 뭘 하고 있는가! 정신 바짝 차려라!”
내심이야 그도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웠으나, 겉으로는 결코 내색하지 않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의 호통이 떨어지자 살짝 긴장이 풀려 느슨해져 있던 병사들이 다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앞만 보고 달리는 시야에 어느덧 적들이 탁 트인 평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히 적 부대를 돌파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불덩이처럼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스치는 바람을 조금이나마 인식하기 시작했다.
열 넷을 베었다. 아니, 열다섯인가? 그 중에는 제국이 수인병이라 부르고, 초원인들이 바르바피라 부르는 전사들도 셋이나 끼어 있었다. 그 중 둘을 쓰러뜨렸고, 한 명은 직접 머리를 몸뚱이와 분리시켰다. 명백히 초인적인 존재들. 그런 이들의 피를 흠뻑 먹어서인지 칸젤도 기뻐한다. 칸젤이 기뻐하니 그 역시 덩달아 기뻐한다. 이제는 누가 먼저 기뻐하는 것인지, 어느 쪽의 감정이 진짜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사실 아무래도 별로 상관은 없다. 그의 창과 그는 이미 하나이니까.
“군터! 우측으로! 루카와 합류해야 하오!”
뒤쪽에서 커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텁게 뭉쳐 버티던 적이다. 그런 그들을 뚫어냈다는 즐거움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냉철한 판단. 비록 치졸한 시기심이 있다 하나 과연 독자적으로 일군을 이끌 만한 재목이다 싶었다.
군터는 그의 말대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커티스가 그를 따라잡았고, 둘은 나란히 말을 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후미에 적이 따라붙고 있소! 떨쳐내야 하오!”
“방도는?”
“본대가 이미 진을 치고 대기 중일 터!”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했다. 사실 군터는 다시금 병력을 나누어 일부 반전, 쫓아오는 적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커티스의 계획은 확실히 그보다 더 나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따로 신호도 보낼 수 없소만.”
“장군을 너무 모르는군. 우리의 생각 따위, 멀리서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간파하실 거요.”
그러고 보면 커티스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직속 휘하다. 황도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자고, 아마도 그 전부터 쭉 그의 군대에서 종군했을 터.
“그렇다면야.”
군터는 슬쩍 뒤를 살폈다. 적들은 아군을 쫓고 있었지만 아직은 제법 여유로웠다. 돌파당한 후에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까닭이리라. 하지만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따라잡힐 터. 커티스의 계획은 좋지만, 조금은 불안하다.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여유를 늘릴 필요가 있다. 겸사겸사 적당히 약도 좀 올리면 더욱 좋고.
“커티스!”
“음?”
“선봉은 다시 맡기겠소. 나는 후미로 가 적들의 추격을 늦춰보리다.”
“뭐요?!”
대답은 필요 없다. 군터는 할 말만 하고 즉시 말머리를 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할렌! 1대 백 명만 이끌고 따라라!”
“옛!”
1대란 기사가 되는 병사들을 말한다. 군터 천인대에서도 최정예인 이들이며, 상당수가 아쿼러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짤막한 지시였지만 할렌은 즉각 따랐다.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에 대한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군터의 명령은 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전장에서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군터가 급격하게 말머리를 틀며 대열을 이탈하자 할렌과 1대의 병사들도 곧장 뒤를 따랐다. 그 수가 백 명이 조금 넘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안장에 활을 달고 있었으며,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은 모두 덩치가 좋고 힘이 좋은 상품의 것들이었다. 거기에 걸친 갑옷도 일반적인 제국 기병의 것과는 달리, 마치 타칸연합군 병사들의 것처럼 얇고 가벼웠다.
모두 군터가 의도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위해서 말이다.
“드디어 써먹는군.”
아군과 떨어져 나오자마자 군터는 칸젤 대신 활을 들었다. 비싼 돈을 주고 마련한 강궁(强弓)이다. 장인이 좋은 재료를 써 심혈을 기울인 덕인지, 몇 십 번을 당겨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그간은 사냥을 나갔을 때나 가끔씩 사용했었지만, 드디어 제대로 쓸 기회가 왔다.
두두두!
한 손으로 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장에 달린 화살통의 매듭을 푼다. 두 다리만으로 내쉬의 배를 조이지만 질주하는 말 위에서 흔들리는 몸에 불안함은 없다. 말과 한 몸인 것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움직임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만 하다.
‘첫발이다. 빗나가서는 안 되지.’
초원에서 난 사내들이 다 그렇지만, 군터 역시 자신의 활 솜씨에 대해 자신이 있다. 말 위에서든 아래서든 이제껏 그의 화살은 차라리 막히면 막힐지언정 빗나가는 법은 없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번엔 빗나가는 것은 물론, 막히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꾸우욱!비스듬히 겨눈 활은 목표에서 조금 위로 뜬 허공을 향한다. 그러나 매서운 시선은 정면 멀리,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말을 달리는 적의 선두에 고정되어 있다.
“…후우.”
짧은 호흡 뒤의 적막.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해진 그만의 세상에서, 군터는 구부린 손가락을 천천히 놓았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던 시위가 완전히 구속을 벗어나고,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가느다란 빛살이 허공을 찢었다.
슈슈슝!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할렌과 병사들이 일시에 시위를 놓았다. 백여 발의 화살이 바삐 달려오던 적의 전열을 덮쳤다.
*
“빨리빨리 움직여라! 아군의 말발굽에 밟혀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거냐!”
굳이 장교들의 고함이 아니더라도 병사들은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측면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은 눈 뜬 자라면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아군 기병대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휘날리는 깃발 덕에 모를 수가 없었다.
“잘 들어라! 아군 기병은 그대로 통과시키는 거다! 아군이 통과하고 나면 즉시 입구를 닫는다! 밀집 대형으로 적의 난입에 대비하라!”
“적이 그대로 우회하여 빠져나갈 수도 있다! 궁수들은 명령을 기다려라!”
“말발굽이 아군 방패병을 찍기 전에 너희가 먼저 찔러야 한다! 언제라도 내지를 수 있게 대기하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병사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 이윽고 먼지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질주해오는 아군 기병의 모습이 크게 눈에 들어왔을 때, 병사들은 장교들의 고함소리가 터지자마자 즉시 명령받은 대로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움직여 벽 같았던 진형에 몇 개의 길을 낸 것이다.
두두두!병사들이 낸 길에 맞추어 몇 갈래로 나뉜 기병대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본대를 관통해 빠져나갔다.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좌우로 이동했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본래의 자리를 채웠고, 전보다 더 단단하게 응집하여 곧 들이닥칠 적군을 대비했다.
“quibuwir(쏴라)!”
타칸연합국의 병사들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재빨리 경로를 틀었다. 밀집해있는 적진에 그대로 들이받는다는 무식한 선택지는 애초에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듯했다.
하지만 방향을 튼 그들은 제대로 활을 쏘기도 전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을 목도해야 했다. 방패병들의 뒤, 창병들의 뒤에서 쥐죽은 듯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시위에 걸어놓은 화살을 일제히 쏘아 보낸 것이다.
“으아악!”
히히힝!
인마가 뒤엉켜 쓰러졌다. 그 수가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화살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장교들의 독촉에 쉬지 않고 날린 화살은 방향을 튼 타칸연합국의 병사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기 전까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 작품 후기 ==========
간만에 세계관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 기쁘네요. 흑포장군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봐주셨는데요. 답해드리겠습니다.
흑포장군이란 제국의 중앙군부 체계에 속하는 장군의 계급입니다.
앞선 내용(1부)에서도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었는데, 한 번 더 제국 중앙군부의 위계를 설명드리자면,
1-대장군(중앙군부의 수장)
2-상장군(대장군 제외 최고 수뇌부)
이 두 계급의 밑으로 위장이라고 하여 청,녹,흑,적의 장군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기 청포, 녹포, 흑포, 적포 장군이 되는 거지요. 여기서 말하는 포(袍)란 갑옷 겉을 감싸는 망토 같은 것을 뜻합니다. 보다 화려한 계급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포는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것으로, 제국에서는 굉장한 명에입니다. 이렇게 황제에게 직접 관직을 하사 받은 중앙군부의 장군들을 위장(位將)이라고 하며, 그와 달리 지방정부에게 관직을 전달받은 장군들은 무위장(無位將)이라 합니다.
그리고 저 중앙군부의 위계에서 군주들은 제외입니다. 군주들은 중앙군부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들은 오직 황제의 명령만 듣습니다. 물론 그건 중앙군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