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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91화 (191/1,064)

<-- 2부 -->

세 번째 뿔 나팔이 울리면 진격한다. 그것은 미리 비스링과 약속한 신호다. 투석기가 성벽을 때리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기병대는 신호에 맞춰 군진을 벗어났다. 그 뒤를 보병이 대열을 맞춰 뒤따랐다.

“달려라! 달려!”

기병대를 이끄는 것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부하 무관, 커티스였다. 그가 이끄는 3천 기병에는 군터도 속해 있었다. 수하 500기와 함께 대열의 허리 쪽에서 선두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는 커티스의 지시였다. 같은 천인장이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로부터 지휘권을 받은 것은 커티스였기에 군터는 순순히 그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나를 견제하는 건가. 한심한.’

위태로운 전장의 한복판에도 질시의 꽃망울은 터지는가. 아그니스 체스퍼와의 첫 대면에서 강렬한 인상은 준 일은 일부 무관들에겐 놀라움과 친근함을 선사했지만, 또 다른 일부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거기에 아그니스 체스퍼가 어느 정도 특별하게 대우하는 모습도 보이니, 그를 따르던 휘하 무관들 중 일부는 군터를 질시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는 텃새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한들 어찌할까. 군터는 그저 새색시처럼 새침한 사내가 그의 마음처럼 뾰족한 창과 감각을 가지고 있기만을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초전부터 곤란함을 겪게 될 테니.

“온다!”선두에서 거친 고함이 들렸다.

‘빠르다.’

진영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나 됐는가. 세 번째에 이후 울린 네 번째 나팔 소리가 아직 그치지도 않았다. 아무리 대기 중이었다 해도 이런 대응속도는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기민하다.

“방패!”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비스듬하게 우측으로 방향을 튼 그들은 곧장 자그마한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제는 타칸 연합군 병사들의 상징이나 다름없게 된 기사(騎射). 그에 대한 나름의 대응책이다. 머리에 맞는 화살만 피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들의 갑옷은 화살 몇 대에 뚫릴 만큼 약하지 않다.

퍼퍼퍽!

머리 위에 가져다 대다시피 한 방패에 화살이 박히며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말발굽소리 덕분에 묵직함은 귀가 아닌 팔로 전해졌다.

“따라붙는다!”

커티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날카로운 편인 그의 목소리는 이제 계집의 그것처럼 더없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전투가 그를 격하게 만든 모양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의 판단은 냉철하기 그지없다. 그는 세 갈래로 나뉘는 적의 무리 중 굳이 좌측의 적을 택했다. 뒤따라오고 있는 보병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리라.

“방패!”

그 예상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적의 뒤를 쫓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곧 또 다시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이번에는 우측이었다. 쏟아지는 화살을 또 한 번 막아내니 좌측의 적이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커티스도 그것을 보았는지, 곧바로 또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루카! 네 부대를 이끌고 뒤로 빠져라! 사이를 벌리고 옆구리를 친다!”

“알겠습니다! 대장나리!”

또 다른 천인장 루카가 지시를 받자마자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 사이 좌측의 적은 완전히 반전하여 빠른 속도로 아군을 따라붙었다.

“온다! 꺾어!”

한 차례 화살비 이후 적이 속도를 더욱 높이며 다가오자 커티스는 더 빠르게, 루카는 더 느리게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일직선으로 달려온 적이 아군 기병 두 무리 사이를 파고드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돌파한다! 뒤쳐지지 마라!”

선회한 그들은 한 자루 창이 되었다. 짧게 나뉜 두 창은 훤히 드러난 적의 옆구리를 찔러갔다. 반면에 먼저 찌른 타칸연합군의 창은 텅 빈 허공을 덧없이 갈랐다.

바크렌군이 승리를 예감하며 한껏 전의를 불태우는 그 순간.

크아아아아!

지금 이곳에서 나올 리 없는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말을 박차고 뛰쳐나온 수십의 검은 형체가 좌우측면을 찌르는 창과 부딪쳤다.

“마침내 보게 되는군! 이게 그 수인병(獸人兵)인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지만 속도는 조금도 늦추지 않는다. 살마드 공성전 당시 맹위를 떨친, 사악한 주술을 각인한 야만인들의 이야기는 타 지방에도 널리 퍼질 정도로 유명했으니.

“돌파하라!”

전의는 식지 않는다. 오히려 더 뜨겁게 불타오른다.

콰앙!

두 군세가 부딪쳤다.

*

“전진! 전진하라!”

큼지막한 방패를 든 방패병이 선두다. 장창병과 궁병이 그 뒤를 따른다. 완벽에 가깝게 짜인 군진은 속보(速步)로 나아감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커티스의 활약 덕분에 진영을 나온 본대는 적의 별다른 견제 없이 멀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아그닛스 체스퍼는 본대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말에 올라 먼 곳을 내다보던 그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다 눈을 빛냈다.

“오는군.”

셋으로 나뉜 적의 요격 부대. 그 중 하나는 커티스의 부대에 따라붙었다. 쫓기던 나머지 하나는 반전하여 협공하려는 듯했고, 나머지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출진.”

“출진이다!”

그의 옆에 대기하던 기수 중 한 명이 깃발을 들자 후열의 기병이 움직였다. 피어슨이 이끄는 또 다른 기병대. 그들이 다시금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넓게 벌려라!”

또 다른 깃발이 올라간다. 세 겹, 네 겹으로 뭉쳐 나아가던 방패병들이 길게 늘어선다. 전면에서 보면 갑자기 병력이 배 이상으로 불어난 것처럼 보이리라.

‘야만인 놈. 제대로 한 판 붙을 배짱이 있는가?’

이미 꽤 먼 거리를 나왔다. 적당히 싸우고서 군을 물리려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곤란하다. 상대 또한 그것을 알 테니, 이는 도발이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과 같다. 맹수는 갈등할 것이다. 등을 보인 상대에게 달려들지, 아니면 낮게 으르렁거리며 눈치를 살필지.

“대열을 유지하라! 장창병은 방패병 바로 뒤에 붙으란 말이다!”

장교들의 호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아그니스 체스퍼의 시선은 적 본진에서 멈춘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커헝!

“크아악!”

예리했던 창극은 수인병이라는 장애를 만나며 기세를 잃었다.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니나 무뎌져버렸고, 선봉이 속도가 느려지니 후열의 병력이 자연스레 적과 부딪치게 되었다.

콰직!빛살처럼 날아간 칸젤의 창날이 괴인의 목젖을 정확히 꿰뚫었다. 허우적거리는 손길이 칸젤을 붙들지만, 안타깝게도 칸젤은 일반적인 창이 아니다. 창날이 전체 길이의 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검창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목을 찌른 것을 붙든 괴인의 손은 예리하기 그지없는 창날에 처참히 갈라졌다.

“흐음!”

힘 있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내쉬의 기세에 힘입어 칸젤을 좌우로 흔들며 뽑아냈다. 목이 걸레짝이 되었으니 괴인이 아니라 그 할아비라도 살 수 없으리라. 뭐, 출혈로 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뒤따르는 말발굽에 밟혀 죽겠지만.

이미 나가떨어진 적에 할애할 정신은 없었다. 군터는 전면과 우측에서 동시에 마주치는 적들에 대응하기도 바빴다. 칸젤을 한 몸처럼 휘두르며 내쉬가 마음껏 달리게 해주니, 그는 어느새 커티스의 대열까지 따라붙었다.

악을 쓰며 창을 내지르고 있는 커티스를 발견한 군터는 재빨리 그의 곁으로 붙었다. 군터의 접근에 적인 줄 알고 흠칫했던 커티스는 다가온 이가 군터임을 확인하자 눈을 크게 떴다.

“군터?!”

“너무 지체되는군. 내가 선봉을 맡겠소.”

“무슨 소리인가! 자리로 돌아가라!”

커티스는 대번에 얼굴을 붉혔다. 사실 이미 터질듯 붉어져 있던 얼굴이었지만 노성을 내지르면서 아주 조금은 더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군터는 흥분한 커티스를 달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뜻을 관철하는 데는 한 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리면 후방의 적에게 물리게 될 거요.”

“……!”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때인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장의 열기에 함몰되어 있던 커티스는 군터의 한 마디 말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힘껏 창을 내지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적을 상대하고 있는 군터를 보았다. 필사적인 자신과 달리, 그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전장이 아닌 집 안의 정원에 산책을 나온 것처럼. 오직 그 혼자만이.

“…맡기도록 하지. 뒤는 내가 받치겠다.”

“그럴 필요 없소. 내 등은 내가 알아서 하리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되물을 새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단의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장님! 갑자기 방향을 바꾸실 때는 최소한 신호 정도는 주십시오!”

“내 뒤를 잘 따라오라 하지 않았더냐. 지금도 잘 따라왔고.”

투덜대는 할렌에게 퉁명스레 대꾸한 군터는 또 한 명의 적을 날려버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돌파하겠다.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할렌이 또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섭섭하다는 투다.

군터는 씩 웃으며 내쉬의 배를 찼다. 이제까지도 여유를 부린 적은 없었던 검은 명마는 더 분발할 것을 재촉하는 주인에게 한 차례 비명을 지르고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휘잉!

가로.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경로에 걸린 모든 적이 위 아래로 피를 뱉으며 쓰러진다. 눈에 독기를 가득 담고 악다구니를 쓰던 타칸연합군의 전사들이 일순 주춤거린다.

“따르라!”

소리라기보다 울림에 가까운 외침에, 멈춰가던 창이 다시금 기세를 올린다. 한데 뭉쳐 있던 뭉툭한 날은 다시금 가느다란 삼각형으로 돌아가고, 서서히 불안에 젖어가던 말들이 콧김을 뿜으며 용기를 되찾았다.

와아아아!

용기백배한 병사들의 함성 때문이었을까? 기수가 든 제국의 깃발이 마치 그들처럼 크게 요동쳤다.

*

퍼억!

운 나쁘게 머리를 허용한 전사가 크게 뒤로 밀려나 나뒹굴었다. 그렇게 명을 달리한 전사에게 포라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눈빛으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다면 수십 정도는 가뿐히 도륙할 것 같은 살벌한 눈빛으로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멀리…….”

휘하 전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굳어진 분위기에도 굳이 입 밖에 낸 것은 말이 아니라 그의 속내이고 솔직한 감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포라칸은 전사를 질책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역시 젊은 전사와 같은 마음이었으니.

‘전에는 겪은 적 없는 것이다.’

화살이 날아왔을 뿐이다. 별 달리 특별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화살이 저 까마득한 멀리서 날아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몇 발 되지 않는다. 정확도 역시 그리 뛰어난 편은 못 되고.’

실효성으로 따지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저렇게 계속 쏴댄다고 해봐야 이쪽이 입는 피해는 고작해야 자그마한 생채기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이다. 이 깜찍한 수작질은 상당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꾸준히 신경을 긁는다고 할까. 마치 가볍게 어깨를 툭툭 치면서 언제 덤빌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듯하다.

‘대족장. 아직입니까.’

포라칸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본진을 확인했다. 아직까지도 아무런 신호가 없다. 앞으로 나온 적을 조금 더 끌어들이려는 생각이겠지만, 그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 시건방진 적들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위험합니다!”

갑작스레 곁의 전사들이 대경하여 외쳤다. 본진을 돌아보고 있던 포라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한 손을 들었다.

턱!

그의 손이 살짝 펴지기가 무섭게 화살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 아귀 안에 붙들렸다. 손에 슬쩍 힘이 들어가니 두꺼운 화살은 형편없이 박살났다.

“활을 가져와라.”

“옛!”

명을 받은 전사가 곧 거대한 활을 가져왔다. 포라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초원 전사라면 누구나 활을 잡게 되어 있는 법이고, 초원 제일의 전사로서 대전사의 명예를 거머쥔 포라칸인 만큼 한때 그는 초원 제일의 활잡이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가 멀리서 날리는 화살은 가까운 거리의 투창만큼이나 위력적이었고, 그가 노린 사냥감은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그 모두는 한쪽 눈을 잃기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제국의 군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 그는 더 이상 초원 제일의 활잡이일 수 없었다. 한 쪽 눈만으로는 목표를 정확히 노릴 수도, 거리를 제대로 잴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포라칸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활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네놈이 나를 자극하는구나.’

얼굴도 모르는 적장, 아그니스 체스퍼.

같잖은 수작을 계속 부려대는 그에게 따끔한 한 마디 정도는 날려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그극!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다. 비록 정확도를 잃었으나 그의 힘은 여전했다. 어지간한 전사는 제대로 당기지도 못하는 시위가 가볍게 끝까지 물러났다.

‘이 한 대 화살에 약속하노니, 이곳에서 내가 네놈의 목을 베리라.’

투웅!

활이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뭉툭한 소리를 내며, 포라칸의 손아귀에서 부러졌던 화살보다 배 이상 크고 두꺼운 화살이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 작품 후기 ==========

어제 올린 글은 유난히 오타가 많았습니다. 비문도 많았고요. 가끔(?) 이럴 때마다 참 창피한 마음입니다. 오타 제보해주시는 독자분들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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