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장군! 지금 제 마음이 어떤지 아십니까?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을 다시 뵙는 것 같군요.”
“칼에다가 기름칠을 잘 해놓으라 했더니 칼 대신 혓바닥을 닦은 모양이군.”
“구사일생 하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될 겁니다.”
“끝난 게 아니야. 이제 시작일 뿐이지. 자네나 나나, 목이 완전히 붙어있다고는 말 못하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비스링의 사령관 로레드 엥겔은 꽤나 넉살이 좋은 사내인 듯했다. 감히 제국의 흑포장군 앞에서 만나자마자 시시껄렁한 농을 지껄이다니. 아무리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여간 능청스러운 게 아니었다. 군터는 부디 그의 능력이 담력과 넉살만큼 따라주기를 바랐다. 전군을 지휘하는 건 아그니스 체스퍼지만, 비스링을 이끄는 그 역시 곧 적을 맞아 싸울 바크렌 군의 주축임에 분명했으니.
아그니스 체스퍼는 비스링에 당도하자마자 군사회의를 열었다. 행군의 피로가 가시지도 않은 무관들이 로레드 엥겔의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서신은 받아보았겠지.”
“예.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로레드 엥겔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스링의 성벽을 방패삼아 지구전으로 이끌고 가면서 틈을 보아 적을 견제하는 식으로 싸우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제안은 단박에 거절당했다.
“어차피 다른 수가 없다. 척후가 놈들이 큼지막한 수레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족히 수십 개가 넘는다더군. 그 안에 든 게 무엇일 것 같나?”
“으음.”
“저번 전쟁에서 놈들은 강했지만 미숙했다. 애초 세찬 바람이 부는 초원에서 들짐승처럼 떠돌며 살던 놈들이다. 당연히 공성전이라는 것은 한 번도 치러본 적이 없는 놈들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반군 놈들이 지원해준 것일까요.”
“글쎄. 높은 성벽은 말발굽으로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놈들에게도 머리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준비를 해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말씀하시는 바를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쉽군요. 성벽의 이점을 포기해야 하다니.”
“완전히 포기하는 건 아니지. 그리고 그리 아쉬워할 것 없네. 상대가 특별할 뿐이야. 놈들은 가볍고 빠르지. 비록 내 직접 겪어본 적은 없으나 들은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래. 단지 기병이라서가 아니야. 놈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군. 무장을 최소화하고 기동력을 쥔 거야. 거기에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서 활까지 잘 쏜다니, 일찍이 상대해본 적이 없는 유형의 적이야.”
“하긴 그렇습니다. 몇 번 경계를 넘어온 도적놈들을 토벌한 적이 있는데, 도망치면서 활을 쏴대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더군요. 열 발을 쏘면 여섯 발 정도는 몸 쪽으로 제대로 날아왔습니다. 솔직히 놀랐지요. 그런 건 이제껏 제가 전전한 그 어떤 전장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묘기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게 뭔지 아나?”
“제가 어찌 장군의 마음을 짐작하겠습니까.”
“물러나면 잡기 힘들고, 따라붙으면 떨치기 힘들겠다는 거다. 즉, 놈들을 상대할 때는 어설프게 기동전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허면 어찌해야 합니까?”
“굳건하게 뿌리를 박고 싸우는 거다. 놈들이 바람이라면, 우리는 바위가 되어야 한다. 칼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바위가.”
*
타칸 연합국의 병력이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척후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듣고 있던 비스링은 언덕 위로 줄지어 늘어선 새까만 점의 향연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좋은 공기다.”
거리와는 상관없다. 형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들이 피워 올리는 굳센 군기가 긴장감, 어쩌면 일말의 두려움과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맹수도 그보다 뛰어난 후각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맡을 수 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비로소 자신이 또 다시 전장에 발을 디뎠음을 실감했다. 왕이나 다름없는 대족장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정을 나선 것은 그의 본질이 권력자보다는 전사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리라.
“대족장. 적이 이미 당도해 있습니다.”
포라칸이 다가와 말했다. 검은 안대에 가리지 않은 한 쪽 눈은 방금 전까지 요새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고지대를 살핀 차였다.
“의외군.”
적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음은 예상했다. 하지만 저렇게 자리를 잡고 기다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커다란 깃발이 휘날리는 곳은 비스링의 성벽 위가 아니라 그 옆의 고지였다. 꼭짓점이 평평하게 잘려나간 모양새를 한 지형. 중간에는 자그마한 개천까지 흘러 일찍이 군을 주둔시키려 마음속으로 점지해둔 곳. 이름이 아마…터블헨이었던가?
“선수를 빼앗겼군.”
타르가이 베르겐이 유쾌하게 웃었다. 반면 포라칸은 영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건 틀린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도착했을 뿐이니까 말입니다. 지금 바로 가서 빼앗으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아니야. 적의 진형은 단단해. 섣불리 들이쳤다가는 크게 피해를 볼 것이니 무리할 필요 없어.”
짧은 말로 포라칸을 다독인 타르가이 베르겐은 고지 위, 아마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적장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그니스 체스퍼. 그 아란딜 페레모어의 후임이라.’
직접 칼을 맞댄 적은 없으나 같은 전장에 있었다. 아란딜 페레모어로 인해 살마드를 손에 넣지 못했고, 끝내 시간을 끌려 제국의 군주에게 뒷발을 물리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는 적이지만 능력 있는 자였다. 몸을 바쳐 전투에 임한, 존중할 만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와 같은 직위라 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녹록한 자는 아닐 터. 과연 어느 정도의 인물일 것인가. 어쨌든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포라칸.”
“예. 대족장.”
“눈 조심하게. 맹인이 되어버리면 빼어난 용력도 갈 곳을 못 찾게 되지 않겠나.”
“…명심하지요.”
벌써부터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한 포라칸을 가라앉혔다. 용맹한 대전사를 조롱하기 위함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뜻을 알았는지 포라칸도 잠시 멈칫했을 뿐, 곧 의식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였다.
“…….”
타르가이 베르겐은 군대가 진을 칠 자리를 정하는 한편, 고지의 적을 살폈다.
그렇게 그의 시선이 높은 곳을 향할 때, 그곳의 시선은 반대로 그가 있는 낮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에 있는가. 줄카 전하의 거검(巨劍)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괴물이.”
타르가이 베르겐.
타칸 연합국이라는, 듣기만 해도 비웃음이 절로 나오는 야만인들의 우두머리.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군주 줄카와 직접 칼을 맞대고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하나였다. 그 외에 살마드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든가, 아란딜 페레모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솔직히 들어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굉장한 이야기이긴 하지만…아무래도 앞선 이야기에 비하면 비중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군주는 제국인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다. 특히 군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부디 참아주십시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도 좋지만, 장군께서는 지금 군을 이끄는 대장의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는가.”
“밑에서 따른 세월이 얼마인데 제가 장군을 모르겠습니까. 거듭 청하니 부디 참으십시오.”
천인장이자 그의 부관인 피어슨이 사뭇 절절하게 말하니 아그니스 체스퍼는 마지못해 입맛을 다셨다.
아닌 척을 했지만 사실 피어슨의 말은 그의 속내를 정확히 찔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군인이지만, 그 이전에 강함을 숭상하는 무인이었으니까.
제국에서 군주는 절대적이다. 제국인들에게 있어 그들은 황제 바로 밑의,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과 다름없다. 그들의 능력은 초월적이며, 그들의 행사 중 일부는 기적이라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한 여섯 군주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는 술사로 분류될 만큼 술법 능력이 뛰어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무인으로서 그 무명이 하늘에 닿기도 했다.
줄카 같은 경우는 명백한 후자다. 검 한 자루를 들고 용의 목을 친 전설적인 일화로 용살자라는 칭호를 얻은 그는 제국 최강의 무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이름이 거론되곤 했다. 그야말로 제국 무인들의 우상이라 할 만한 존재인 것이다.
우상이란 동경의 대상. 감히 목표로 삼는 것조차 불경인 존재지만, 그럼에도 뜨거운 무혼(武魂)을 가진 무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호승심이라는 놈이 티끌만 한 불씨를 태우곤 했다.
애석하게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도대체 얼마나 강할지 마음속에서 질리도록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비록 본인은 아니라 하나 그와 칼을 맞대고도 목숨을 부지한 적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적과 맞붙음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수십 년 간 마음속에 품어온 우상을 재단해볼 수 있으리라.
‘한평생 제국을 위해 몸 바쳤건만, 이런 불경스런 생각을 하다니.’
군인으로서 자책한다. 하지만 그래도 무인은 고개 숙이지 않는다. 마음을 꺾지도 않는다.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났다.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수하의 말이 옳다. 일단은 접어두어야 한다. 지금 그는 무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그것도 군을 통솔하는 대장으로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기회가 온다면 지나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해가 누우며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운이 감도는 일대가 적막에 깊이 물들어갔다.
*
둥! 둥! 둥!
이른 새벽. 전고가 시끄럽게 울리며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밤사이 조립을 마친 공성병기들이 위용을 드러내고, 돌덩이들이 매서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갈랐다.
쾅!
그렇게 날아간 돌덩이 중 일부는 애꿎은 땅을 때리기도 했고, 조준한 대로 비스링의 성벽을 강타하기도 했다.
“젠장. 술사들이 제법 있나 보군.”
로레드 엥겔이 멍하게 울리는 귀를 부여잡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적의 출현을 예상했을 때부터 병사들을 동원해 부지런히 인근의 돌덩이들을 치웠던 그다. 지금과 같은 투석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잘만 투석기를 쏴댔다. 술사들이 술법을 부려 바위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흙과 자그마한 돌멩이들을 모아 더 큰 돌을 만들어내는 술수는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땅의 술법이었다.
“버텨라! 어차피 진짜 돌멩이도 아니다! 오래 쏘지도 못할 것이다!”
술법으로 만들어 낸 돌은 자연의 돌보다 무르다. 물론 그 차이라는 것은 사람이 맞았을 때 완전히 으깨지느냐, 적당히 으깨지느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뿔 나팔을 불어라!”
비명을 지르듯 낸 명령에 곧 웅장한 소리가 전장 가득 퍼졌다.
뿌우우우-!
한 번.
“피해!”
콰앙!
뿌우우우-!
두 번.
“세 번째! 불어라!”
뿌우우우-!
얼굴이 새빨개진 병사들이 세 번째로 길게 나팔을 불었을 때. 멀찍한 곳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괴작ㅋㅋ 재미있네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남자 주인공을 자궁암으로 죽이는 건 또 무슨...
예전에 2대에 걸친, 부자가 주인공인 판타지를 구상하기도 했었는데 정작 쓰는 제 자신도 몰입이 안 되서 접은 기억이 나네요. 역시 주인공은 한 명인 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