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아그니스 체스퍼와 파비우스 리에론인가.’
두 장군이 각기 군대를 이끌고 적에 맞선다. 그렇다면 누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중요한 만큼이나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개인적으로 군터는 베이고르의 군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 초원의 군대, 즉 타칸의 군대는 큰 위협으로 여겼다. 따라서 더 강한 상대에 맞서기 위해 더 강한 전력이 움직여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장군 중 더 뛰어난 자는 누구인가?
‘아무래도…아그니스 체스퍼겠지.’
파비우스 리에론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처음 오테론에서 봤을 때는 집안을 잘 타고난, 탐욕스럽기만 한 자로 여겼다. 후에 살마드에서 다시 봤을 때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느꼈지만…리에론 가의 가주로서의 그의 능력이 장군으로서의 그것과 꼭 비례한다는 법은 없다. 반면에 아그니스 체스퍼는 제국의 황제가 직접 임명한 제국의 고위 무관. 물론 그의 혈통이라든가 다른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흑포장군이라는 자리는 능력 없이 오를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거기에 며칠 전 처음 봤을 뿐이지만 그에게서 강렬한 기세는 그가 뛰어난 무인임을 증명했다. 물론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가져다 댄 잣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무인이라고 뛰어난 지휘관인 건 아니겠지만…아무튼 그런 것들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유로 군터는 파비우스 리에론보다는 아그니스 체스퍼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이전의 전쟁에 비추어 볼 때, 두 군세 중 더 위협적인 건 필시 야만인 놈들 쪽일 거요.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놈들은 전원이 기병이라는 점이지. 여차하면 기껏 세워둔 요새는 버려두고 방어선을 돌파해 주도까지 들이닥칠 수도 있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듣자하니 놈들은 끼니도 말 위에서 때운다고 하더군. 만약 놈들이 정말 그런 식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면 따라잡기가 쉽지 않겠지.”
아그니스 체스퍼가 담담히 말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은?”
“부디 불쾌하게 여기지는 마시오. 장군이 살마드에서 야만인 놈들과 부딪친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수성을 하는 입장이었지.”
“……”
파비우스 리에론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이어지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야전은 경우가 다르오. 변수도 많을뿐더러, 회전(會戰)이라도 벌어지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거외다.”“허면 장군께서 하시려는 말씀은.”
“야만인 놈들은 내가 맡겠소. 장군께서는 반군 놈들을 맡아주셨으면 하오.”
가만히 듣고 있던 군터는 내심 감탄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어려운 선택지를 스스로 택했다. 불쾌해 하면서도 은근히 안도하고 있는 파비우스 리에론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뼛속까지 군인이군.’
처음 봤을 때 느낀 칼 같은 기세에서부터 이미 그런 인상을 받았지만, 실제로 아그니스 체스퍼는 철저한 군인이었다. 그는 쉬운 길을 가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어떻게 이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치러내느냐, 이 한 가지뿐이리라.
‘중앙군이란 자들은 다 이런 것인가.’
그러고 보면 이제껏 만난 중앙군들은 대부분 그랬다. 카리비온 하야신이 그랬고, 숱한 백인장들이 그랬으며, 이제는 은퇴했다는 아란딜 페레모어가 그랬다. 그들은 순수했으며 열정적이었다. 적어도 전쟁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았다. 반면에 바크렌의 군인들은…….
‘쯧. 쓸데없는 생각을.’
전혀 영양가 없는 푸념일 뿐이다. 군터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기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타르가이 베르겐이라는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사악한 술법을 사용합니다. 살마드의 견고한 성벽조차 놈의 술수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줄카 전하께서 시기적절하게 당도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살마드는 이전의 전쟁에서 필시 함락 당했을 것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어차피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야만인 놈들을 상대해야 하오. 그리고 나는,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나와 내 병사들이 더 적합하다 생각하오.”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자랑이지만 전혀 자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억지로 자신을 세우려는 자랑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자부심이었다. 그랬기에 오만보다 당당함을 느꼈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몸은 그저 무운을 기원하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이해해주어 고맙소.”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많은 것은 필요 없소. 다만 날랜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이쪽도 기병이 필요하오.”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두 장군의 대화가 합의에 이르러갔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어려운 곳에 간다 하여 과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파비우스 리에론은 그런 아그니스 체스퍼에게 최대한 협조해주었다.
*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제 1군. 타칸 연합국의 대병을 상대하는 그 군대에 군터와 그의 오백 기병도 합류했다. 자발적인 합류는 아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직접 그를 콕 집어 군대에 합류시킨 것이었다.
그가 군터를 직접 거론하며 이야기를 꺼냈을 때 파비우스 리에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군터가 이끄는 오백 병력이 기병이기에, 타칸 연합군을 상대하는 데 있어 기병 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앞서 역설했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납득하기에는 군터가 위글로우 소속이라는 것이 걸렸다.
위글로우의 사령관 막시밀리언은 파비우스 리에론의 평범한 당여가 아니었다. 무려 방계라고는 해도 리에론 가의 사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군터는 필요하다고 빼내가기에는 리에론 가문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자였다.
“장군. 어째서 소관을…….”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과 어색해지는 것까지 감수하고서 데려왔느냐 이 말인가?”
집결지를 떠나기 전날, 군터는 따로 아그니스 체스퍼를 찾아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한데 아군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소관의 무엇을 보고 그런 말씀을.”
“감히 내 앞에서, 그것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렇게 과시를 하지 않았나. 내 눈에는 그것이 날 써달라고 외치는 것으로 보였네. 아닌가?”
“…….”
“나무를 패는 데는 대충 날 선 도끼 한 자루면 충분해. 명검의 쓰임새는 따로 있는 법이지. 믿고 따라오게. 자네가 활약할 전장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아그니스 체스퍼는 뚜렷한 자였다. 그는 가식 없이 솔직했다. 굽히는 법도 없고 돌아가는 법도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인간유형이었다. 흑포장군이라는 지고한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그런 기질을 가질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으나, 어쨌거나 좋은 느낌이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를 찾아간 바로 그날 밤에 파비우스 리에론으로부터 따로 심심한 위로의 말까지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더 어려운 전장에, 뜬금없이 차출되어 끌려가다시피 하는 모양새였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리에론 가의 가주로부터 무운을 빈다는 말까지 들었다. 굉장히 낯설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쉬지 말고 달려라. 앞서 보낸 탐색조가 있으니 그들과 합류해서 일을 진행해라. 필요한 인원은 얼마든지 차출해도 좋다. 그리고 카리비온 하야신에게 이 서신을 전하도록.”
“옛!”
아그니스 체스퍼는 집결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탐마를 뿌리고 전령을 보냈다. 본대의 진군속도도 빠른 편이었지만 하루에도 거의 열 번에 가깝게 오가는 인원을 보고 있으면 바쁜 정도를 넘어 정신없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집결지를 출발한 지 엿새째 되는 날. 아그니스 체스퍼는 휘하 무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탁자 위에는 지도와 더불어 전령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종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놈들은 비스링으로 향하고 있다. 아주 정직하게 이동하고 있지. 반군 놈들이 노딤으로 간다고 치면, 최대한 거리를 벌려 독자전인 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그렇겠고, 키롤드를 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에는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이 계시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 구 말레이드군이 고스란히 키롤드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놈들도 잘 알고 있을 게야. 하지만 그래서 피했다고 해도 어차피 마찬가지다. 비스링을 친다면 키롤드의 원병은 당연히 온다. 놈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지.”
“그렇다면…….”
“이곳. 터블헨이다. 난 야만인 놈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거라고 보고 있다.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키롤드에게 뒤를 내주는 모양새가 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형이 썩 괜찮지. 경사가 진 고지대. 물길도 흐르고, 놈들의 기병 병력을 고려하면 놈들 입장에서는 적을 요격하기에 용이해.”
무관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지?”
“굳이 멈춰서 싸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점은 없고 손해만 있는 선택인데, 어찌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겠습니까?”
타칸 연합군의 최대 강점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동력이다. 하지만 특정 지점에 주둔한 채 오는 적을 맞아 싸운다면 제 발을 스스로 묶는 꼴이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바로 그거다. 병법의 기본이지. 내가 불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아그니스 체스퍼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전장에서 따지는 유불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정면으로 붙어 쉽게 찍어 누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장점 하나 살리지 않는다고 해서 무에 그리 큰 문제이겠는가.”
“그 말씀은…….”
“놈들은 강하다. 일전에 살마드 공성전 때만 보아도 알 수 있지. 놈들은 줄카 전하께서 당도하시기 전까지 바크렌 군을 살마드에 가둬놓고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 소수의 요격 부대로 타라냐드와 본다인의 원군을 완파하기까지 했지. 그런 전력(前歷)이 있으니 그 정도 자신감은 가질 법도 하지 않나?”
“설마 놈들이 일부러 아군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한 번 눌러놓으면 골칫거리를 줄이는 셈이니까. 만약 운 좋게 제대로 회전 한 번이라도 치르면 바크렌 전력의 반을 없애는 셈이다. 놈들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오만하군요.”
“오만에 실력이 뒷받침 되면 그건 더 이상 오만이 아니다.”
큼지막한 주먹이 탁자를 때렸다. 어수선해진 막사 내 분위기가 한 순간에 걷혔다.
“놈들은 강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그럴 리 없을 거라 믿는다만, 혹시라도 야만인이라고 경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강적을 상대로 할 때는 극도의 신중함과, 때에 따라 발휘할 과감함이 필수적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아군의 전력이 놈들보다 처지는 이상, 그 전력의 격차는 준비로 만회해야겠지.”
탁자를 찍은 주먹이 펴졌다. 검지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우리는 놈들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여유는 끝이다. 이제부터는 매 순간이 피를 말릴 것이다. 단단히들 각오하도록.”
========== 작품 후기 ==========
댓글들을 보다가... 문득 이대로 군터를 죽이고 완결을 내면 어떻게 될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마 조아라 노블 역사상 손 꼽히는(?) 엔딩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그런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심심한 상상 정도로 그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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