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시민들의 열띤 환송을 받으며 군터와 오백 기병은 위글로우를 나섰다.
“너무들 좋아하던데요.”
할렌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평소 재미있는 일이 생겼을 때보다 더 짙은 웃음은 상당히 인위적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제 아무리 용감한 군인이라도 전장에 나가는 길이 어찌 달갑기만 하겠는가. 특히 아내와 아이를 둔 사내라면 더욱 그렇겠지.
“우리가 가서 적들을 싹 다 쓸어주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만.”
“아. 물론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만, 뭐랄까…조금 야속하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벌벌 떨고 있으면서 누군가 대신 나가 싸워주길 바라는 게 말입니다. 도시의 시민들은 우리가 다치고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요.”
“…….”
군터는 슬쩍 할렌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는 군인이다. 이건 우리의 본분이고.”
“…예. 그렇지요.”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네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라. 그따위 정신 상태로는 전장에서 버틸 수 없다.”
“송구합니다.”
할렌이 고개를 숙이니 군터도 더는 탓하지 않았다. 사실 직접 이야기를 꺼낸 것이 할렌이라 그를 나무라기는 했으나,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군졸들도 비슷비슷한 마음이지 않겠는가. 안온함에 젖어 있던 마음이 생사의 격전지로 향하면서 다소 울적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너무 길었던 건가?’
날이 잘 선 칼도 1, 2년 정도 방치해두면 예기가 죽기 마련이다. 헌데 그 배가 훌쩍 넘는 시간, 하물며 쇠붙이도 아닌 사람의 마음이야 약해졌다한들 어찌 탓하겠는가.
용감했던 부하들이 겁쟁이가 된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생기매 덩달아 잃을 것도 생겨 망설임을 가지게 되었을 뿐.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문에 군터는 부하들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그들 중 누구보다 잃을 것이 많은 자로서, 가장 앞에서 길을 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광활한 평원에 제국군이 집결했다. 새까맣다는 표현 밖에 나오지 않는, 어마어마한 수였다. 군터는 일전에 초원의 대군을 목도한 바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많아 보였다. 어림잡아도 3만은 훌쩍 넘는다는 뜻이다.
‘가용병력은 전부 집결했다 봐도 되겠군.’
도시며 성을 지키는 수비 병력을 제하고, 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끌어 모은 것 같았다.
“저쪽인 것 같습니다.”
할렌이 군영 한복판 쪽을 가리켰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군터는 그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야. 정말 바크렌의 모든 병력이 다 모인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흑포장군의 명성이 역시 대단하기는 하군.”
뒤편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수만 병력이 운집한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으니 자신감이 솟은 모양이다. 주변 머릿수가 많아짐에 따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다수는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갖는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위글로우의 부사령관 겸 천인장 군터다. 총사령관의 부름에 응하여 왔으니 나를 장군께 안내해라.”
군터가 자기소개를 하자 소속을 물었던 백인장이 재깍 고개를 숙였다. 그런 동작 하나에도 칼 같이 절도가 있으니, 과연 황도의 정예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시겠습니다. 장군의 막사까지 사람이 많으니 하마(下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내 부하들이 쉴 곳을 마련해주게.”
“예. 하켄! 이분들을 안내해주게.”
하켄이라 불린 백인장이 병사들을 안내하기 위한 역할을 맡았다.
“할렌. 군장을 풀고 나면 총사령관의 막사로 나를 데리러 오거라.”
“옛.”
군터는 백인장을 따라 얼마간 걸었다. 그의 말처럼 아그니스 체스퍼의 막사까지 가는 길은 군인들로 북적였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죄다 군인에 막사였다. 처음 찾아가는 자는 길을 잃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얼마나 모인 거지?”
“어제까지 4만 3천 가량이었습니다. 오늘도 여러 곳에서 병력이 속속들이 당도하고 있으니 더 늘었겠지요.”
4만하고도 3천이라. 거기에 그게 끝이 아니라 더 늘고 있다니. 이곳에 있는 병력이야말로 바크렌 제국군의 전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갑작스레 일격을 허용하며 정신없이 응전했던 먼젓번과는 다르다는 것이 이 평야의 상황만 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대병력이다. 이전번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도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제대로 된 군대다. 비록 선전포고를 당한 입장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일전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입니다.”
수수하지만 큼지막한 막사 앞에서 멈춰 섰다. 막사 입구를 지키던 병사 중 한 명이 군터를 안내해 온 백인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즉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들라 하십니다.”
몸수색은 물론,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가라는 말조차도 없다. 등에 버젓이 짊어지고 있는 칸젤을 보았음에도 말이다.
‘용장(勇將)이라더니.’
아그니스 체스퍼에 대한 소문은 일찍부터 들었다. 난전 중에 적진의 한복판에서 고립되어 낙마까지 한 상태로 혼자 적병 수십을 무찌르고 적의 말을 빼앗아 빠져나온 이야기는 바크렌의 무부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술 마시며 안주거리로 즐겼을 정도로 널리 회자된다.
용장으로 유명한 자다.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고 막사로 들이는 것도 그런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유별난 건 아니지만.’
무관들은 어지간하면 스스로의 용력에 자신을 가지는 편이다. 특히 실전을 몇 번씩 치르며 목을 부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은 물론 개개인의 성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그니스 체스퍼도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놈들은 분명 깊게 치고 들어올 겁니다. 확실합니다.”
“오합지졸이었던 반군 놈들도 전쟁 경험을 얻었으니 전과 같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그러했듯, 놈들도 철저히 준비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막사에 들어섰을 때 보인 것은 기다란 탁자 위에 넓게 펼쳐진 지도와, 양 옆으로 자리하여 지도에 시선을 주고 있던 무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 어찌 보면 상석이라 할 만한 곳에서 홀로 탁자를 짚고 선 사내 한 명이었다.
그가 아그니스 체스퍼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마다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 틈에서, 그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으니까.
“음?”
군터가 막사 안으로 발을 디뎠을 때,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던 탓이다. 위글로우에 있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 노력하여 버릇처럼 죽여 놓았던 기세를 의식적으로 풀어놓았다. 달려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망아지의 고삐를 푼 것처럼, 절제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나운 바람이 그의 몸을 타고 넘실거렸다.
“위글로우의 부사령관 겸 천인장, 군터입니다. 총사령관을 뵙습니다.”
오른 주먹을 심장 위로 가져가며 담담히 소리를 낸다.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던 사내, 아그니스 체스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는다.
“그래. 군터. 잘 왔네. 그나저나 놀랍군. 그곳의 사령관의 이름이…막시밀리언이었던가? 그런 한적한 곳에 자네 같은 인물이 있었나.”
서로가 서로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같은 흑포장군이지만…다르군.’
군터는 아그니스 체스퍼 이전에 또 한 명의 흑포장군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일찍이 바크렌의 수호신처럼 여겨졌던 아란딜 페레모어.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그는 평범한 사내였다. 그는 무관 같지도 않았고, 어딘지 모르게 펜대 굴리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둘은 그의 생각처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란딜 페레모어 역시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지 않았던가. 직접 긴 칼을 들고 적의 선봉과 부딪쳤다는 이야기는 당시 살마드 공성전에 참여했던 병사들로부터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 소문의 반만 맞아도 그 역시 용장이라 칭할 만한 자였다. 그렇다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때 느꼈던 평범하다는 인상은 그저 착각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가 평범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떨까.’
군터는 그 시절의 자신을 아직 여물지 못한 풋내기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한창 거칠 것 없는 20대 초중반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시절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군터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여전히 어리석고 다급한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처음 전쟁에 나서던 그때의 풋내기보다는 낫지 않을까.
“여기 용맹한 군인에게 자리 좀 내어주지.”
탁자 양 옆으로 늘어앉은 이들처럼 군터 또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탁자 위 지도에 시선을 주었다.
*
군터가 집결지에 도착하고 사흘 후, 파비우스 리에론이 치중(輜重)을 이끌고 당도했다. 이로서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본격적인 수뇌부 회의가 이루어졌다.
총 병력 4만 7천. 천인대 단위로 쪼개면 숫자상 천인장이 마흔 일곱이나 나온다. 물론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수뇌부 회의를 위해 개조된 큼지막한 막사 안에 모인 인원은 확실히 마흔은 훌쩍 넘었다. 그 중에는 총사령관도 있었고, 부사령관도 있었으며, 단독으로 수천 병력을 이끌 권한이 있는 장군들도 있었다. 자리에 모인 무관들 중에 가장 낮은 직급이 천인장이었고 그 중에 군터가 있었다.
첫날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자도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 같이 너무나 쟁쟁했으며, 때문에 천인장 나부랭이에게까지 돌아올 의자는 없었다. 군터는 다른 천인장들과 마찬가지로 앉은 자들의 뒤편에 서 있었다.
“반군과 야만인. 두 군대가 각기 다른 곳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소.”
아그니스 체스퍼의 힘 있는 목소리가 수십 명이 들어 찬 막사를 가득 채웠다.
“놈들의 의도는 분명하오. 어차피 연합군이라고 해봐야 완전히 다른 두 군대가 섞여 제 힘을 내지 못할 테니, 서로 다른 경로를 잡고 싸우겠다는 거겠지.”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니까?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까?”
파비우스 리에론이 물었다.
“반군 놈들은 노딤. 야만인놈들은 베스링을 칠 생각인 것 같소. 물론, 지금 움직이는 방향으로 계속 갈 경우 그렇다는 거요.”
정전 이후 베이고르와 타칸에 맞닿는 지역에 다섯 개의 요새가 들어섰다. 원래 있던 성을 증축한 것도 있었고, 아예 새로 지은 것도 있었다. 개중 하나는 아그니스 체스퍼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세워진 것이었다.
“지원이 없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요. 따라서 우리도 둘로 나눠져야 하오.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과 내가 각기 일군을 이끌고 놈들을 상대해야 하겠지.”
아그니스 체스퍼. 파비우스 리에론.
바크렌의 최고 무관 두 사람이다. 군을 둘로 나눈다면 그들 두 사람 외에 누가 대장이 될 수 있겠는가.
“…….”
적의 움직임을 접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다. 이제부터 정해야 할 것은 하나. 누가 어느 쪽을 맡느냐 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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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몰랐는데 표지 가격이 상당하더군요. 거기에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싶어서 무리 좀 했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