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예견되었던 일이 마침내 벌어졌다. 베이고르와 타칸 연합군이 국경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살마드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그의 권한으로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적을 상대하게 했다.
총사령관이 된 아그니스 체스퍼는 즉시 각 도시와 성에 파발을 돌려 군대를 소집하게 했다. 그가 보낸 전령은 막시밀리언이 다스리는 위글로우에도 당도했다.
“속히 군사를 모아 닷새 안으로 합류하라는 총사령관님의 전갈입니다.”
“알겠다. 최대한 서두르겠다고 가서 전하라.”
“예. 그럼.”
전령이 물러가고, 막시밀리언은 수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마침내 시작되는군.”
급보가 들어왔음에도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일찍부터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오지 않았던가. 두려움은 없다. 단지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 있을 뿐.
“어찌해야 하겠나.”
전령을 통해 전달된 명령서에는 천인대 하나를 보내라 적혀 있었다. 공식적으로 천인대 두 개가 주둔하는 도시에서 그 반을 끌어다 쓰겠다는 것이다. 물론 명령대로 이행하는 것도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위글로우에는 3천이 조금 넘는 병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마저도 이대 가문을 비롯한 유지들의 사병을 제한 수이니, 천 명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병력을 아끼고 싶군.”
막시밀리언은 담담히 속내를 터놨다. 그의 말을 들은 수하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무슨 사특한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진하게 제국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전번의 전쟁을 생각지 않을 수도 없었고.
“여차하면 휩쓸릴 수 있습니다. 수성을 위해서라도 병력은 최대한 남겨두는 것이 좋겠지요.”
위벨이 막시밀리언을 거들듯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옳다. 총사령관은 다섯 요새를 축으로 전선을 형성하려할 터. 만에 하나 1차 저지선이 뚫린다면 이곳까지는 열흘 안쪽이다. 초원의 기마라면 더 빠르겠지.”
“기마 오백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기마 오백이라…….”
기병의 강점은 야전에 있다. 성벽에 의지해 수성을 하고자 한다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차이가 없으니, 천 명 보낼 것을 오백으로 대신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군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막시밀리언은 군터에게 물었다. 나름 존중의 표현이다. 위글로우의 기병 대부분은 군터의 휘하다. 물론 사령관인 막시밀리언이 결정을 내리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통솔해 가겠습니다.”
“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천인대를 불렀는데 기병이라고는 하나 고작 그 반이 가는 겁니다. 그 지휘관마저 백인장이라면 총사령관이 불쾌해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틀리지 않은 말이다. 사실 막시밀리언은 군터 대신 미트라스를 보낼 생각이었다. 병력의 통제를 위해서는 군터를 보내는 것이 맞지만, 막시밀리언은 군터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불안한 시기에 믿음직스런 부하 한 명의 존재는 적지 않은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속내를 미처 터놓기도 전에 군터가 먼저 말을 꺼내버렸으니, 뒤늦게 다른 말을 꺼내기도 힘들어졌다. 결국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무리해서 공을 세우려 할 필요는 없네. 되도록 전력의 보존에 힘쓰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싸우러 가는 군인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래도 군터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
타들어가는 속을 숨기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꺼냈지만, 벨리사는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왜, 왜 또 당신이에요?”
“나만 싸우는 게 아니야. 전쟁이 시작된 이상, 어딜 가도 다 전장이다. 예외는 없어.”
“여기서 있어도 되잖아요? 남아서 싸워도 되는 거잖아요!”
벨리사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군터가 아는 한, 실비아를 낳을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가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다.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하지만 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뭔데요?”
“위로. 먼저 간 녀석들을 달래줘야지.”
여러 이름이 떠오른다. 리스, 데일, 마오즈……. 수십 개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마지막에 떠오른 이름은 프레드릭이었다.
복수가 아니다.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다. 서로가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전장에서 한 쪽이 패했다고 원한을 갖는 것도 우습다. 그러니 그가 전장에 앞장서 몸을 던지는 이유는 복수 때문이 아니다. 위로다. 아직도 가끔씩 꿈에 나오는 녀석들을 후련하게 보내주기 위함이다.
회의 직후에 막시밀리언이 따로 불러 왜 먼저 나섰느냐 물었을 때도 같은 답을 했다. 완전히 이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답은 된 듯했다.
벨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흘러나오는 눈물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더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저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볼 뿐.
“이해해줘. 난 당신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지만 싸워야 하는 군인이고 먼저 간 녀석들의 상관이기도 하니까.”
“정말. 말이나 못하면.”
“미…….”
“됐어요.”
벨리사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가느다란 두 팔이 힘겹게 군터의 두터운 몸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종일 같이 있어줘요.”
“…그래. 그러지.”
그날 군터는 하루 종일 벨리사와 함께 했다.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고, 해가 지기 전에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잠에서 깬 밤새가 슬그머니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에는 처음 몸을 섞었던 그때처럼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
깊은 밤.
막시밀리언은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살을 섞고 있었다.
라일라였다. 벌써 수 년 째 하루건너 하루 꼴로 안고 있지만, 조금도 질리지 않는 그녀의 몸은 매번 처음과 같은 쾌락을 안겨주었다.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녀의 몸은 매력적인 것을 넘어 신비할 지경이었다.
“흐윽. 흐윽.”
사내를 위한 싸구려 교성 따위는 없다. 그저 몰아치는 대로 흔들리며 간헐적인 신음을 토할 뿐이다. 그 신음이 쾌감에 기인한 것인지,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위에 올라 탄 막시밀리언은 있는 힘껏 욕정을 풀어놓기에 바빴다.
“으윽!”
달뜬 호흡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막시밀리언은 욕정의 결실을 라일라의 몸속에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리고는 땀에 젖은 몸을 라일라의 위에 포갰다. 그는 어미 새를 찾는 아기 새처럼 입술로 라일라의 몸을 더듬었다. 가슴, 목, 턱, 그리고 입술.
라일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벌리고 막시밀리언이 그녀의 속살을 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허억…허억…….”
마지막으로 살을 비빈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다. 잠깐 숨을 몰아쉬던 막시밀리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라일라의 한쪽 다리를 옆으로 벌리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자신의 흔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희한하군. 너와 내가 몸을 섞은 횟수가 수백 번은 될 터인데, 넌 어째서 아이를 갖지 않느냐?”
“제가 아이를 가지면 장군께서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곤란할 것까지야. 아무튼 내가 곤란해질 것 같아 네가 나 몰래 피임이라도 했다는 소리냐?”
“아니요. 딱히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흐음. 너도 그렇고, 카트리나도 그렇고. 뭐, 내 씨가 약하기라도 한 것인가.”
“…….”
사내로서 꺼내기 부끄러울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막시밀리언. 라일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쪽 다리가 벌어지고 성기를 빤히 보이고 있는 수치스러운 자세를 하고서도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궁금하구나. 네가 낳은 내 아이는 어떤 녀석일지. 설마하니 너처럼 목석같은 녀석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제가 장군의 아이를 낳기를 바라십니까?”
“글쎄. 바란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궁금하긴 하군.”
지금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바깥에 새어나가면 큰일이 나리라. 허나 막시밀리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라일라는 그에게 있어 욕망을 불태울 수 있는 대상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말동무였다. 그녀에게 한 말은 결코 밖으로 흘러나가는 일이 없음을 오랜 시간 동안 확인해왔다.
“이번 전쟁, 점을 쳐보았겠지? 어찌 되겠느냐?”
“점괘는 미래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땅을 보며 걸을 때 하늘을 보게 해줄 뿐이지요.”
“그렇게 말을 해도 나는 모른다.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지.”
“신성모독입니다.”
“내 신은 아니지 않느냐? 참, 이런 이야기도 지겹군.”
막시밀리언이 툴툴 거리며 다리를 벌린 손을 거두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눈을 감은 라일라가 잠시 후 입을 떼었다.
“어둡습니다. 죽은 신은 기력이 쇠했지만 여전히 버티고 서 있습니다. 검은 들소의 힘 또한 한 손에 거머쥐었지요. 그의 의중에 따라 먹구름이 깔릴지, 폭풍이 몰아칠지가 결정될 겁니다.”
“타르가이 베르겐…역시 그가 문제인가.”
무겁게 읊조린 말에 라일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싸움에서 죽은 신은 거신과 상잔(相殘)했습니다. 그때의 싸움으로 그는 원기를 쇠하였으니 전과 같지 않습니다.”
“네가 어쩐 일이더냐? 드물게 희망적인 이야기군.”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었다.
“이전의 일로, 신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배웠을 뿐입니다. 어쩌면 신의 힘을 다루는 것이 인간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 말을 하는 라일라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목소리 또한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은은한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은, 착각인지 몰라도 조금 우울해 보였다.
*
“보리스.”
“네. 아버지.”
보리스는 고개를 크게 위로 꺾어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본 모든 사람들 중 가장 키가 컸다. 한 번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은 보리스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이 아비는 전장으로 향한다. 알고 있겠지?”
“네.”
거짓말이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 꼬마는 전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역시 알지 못한다.
“아마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거다.”
“…….”
도톰한 입술이 꾹 말려들어갔다. 그저 담담히 흘러나오는 말이건만, 한동안 아비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왠지 왈칵했다. 보리스는 눈물이 나오려 하는 것을 참았다. 아비가 눈물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아비는 사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아비가 떠나고 나면 네가 이 집안에 남은 유일한 사내다.”
“…….”
“아비가 뭐라 했느냐. 사내는 어찌 해야 한다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그래. 아비가 없을 때는 네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살라스를 알고 있지? 살라스가 너를 도와줄 거다. 녀석의 말을 아비의 말처럼 여겨라. 알겠느냐?”
“네에…….”
기어이 보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을 아비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보리스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손이 올라왔다. 부드럽게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그 손은 뒤로 넘어가 자그마한 등을 붙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처럼 부드럽게 보리스의 몸을 끌어당겼다.
“잘했다. 사내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흑.”
“가끔, 정 힘들어 못 참겠거든 한 번씩 울어도 좋다. 하지만 네 어미나 실비가 알게 하지는 마라. 아비와 약속할 수 있겠느냐?”
“네……. 훌쩍.”
울보처럼 흐느끼면서도 눈물을 그치려 애를 쓴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군터는 그의 허리춤에 닿는 자그마한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앞도 못보고 울음으로 어미를 찾던 아기가 어느새 어설프지만 사내구실을 할 정도로 자라났다. 다음번에 다시 보게 될 때는 지금보다 훌쩍 더 자라있겠지.
‘아쉽군.’
이제 전장으로 떠나가매, 그렇게 자라나는 아들을 볼 수 없다는 것. 그 단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보리스.”
“네에. 훌쩍.”
“건강해라.”
다시 한 번, 자그마한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그 감촉을 기억 속에 깊숙이 담아두었다.
========== 작품 후기 ==========
소설 표지를 주문했습니다.
제가 바란 퀄리티가 너무 높아 한 달 연재로 번 돈을 넘는 큰 액수가 깨졌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근래에 들어 글을 쓰며 힘이 좀 빠지고 있었는데 제 스스로에게 큰 선물임과 동시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느낌입니다. 표지는 이달 말 안으로 나올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정말 기대가 크네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당겨 받는 심정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