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고원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그 칸디시아렌은 아래에서 다가오는 십여 기의 기마를 보았다. 그 뒤에 포진한 수백의 병력보다 얼마 되지 않는 인원에 눈길이 갔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선한 바람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고원의 중앙에는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이미 주인이 앉아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아직 빈 상태.
“춥군.”
“전하. 이것을.”왕의 말이 있자마자 시종장이 재빨리 두툼한 털외투를 들고 달려갔다. 반왕, 주앙 칼 고르는 점점 다가오는 상대를 보며 외투를 걸쳤다.
“저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구나.”
왕은 피식 웃었다. 그는 말을 타고 오는 십여 명의 중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으니, 곧 기다리던 이들이 당도했다.
“어서 오시오. 대족장.”
“간만에 뵙소. 베이고르 왕.”
한 사내는 말에서 내리고, 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나눈 그들은 곧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곧 왕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중요치 않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탐색전이다. 유그 칸디시아렌은 잠시 상대편 ‘왕’을 눈에 담았다.
스스로는 대족장이라 칭하나, 세상은 그를 왕으로 인정한다. 저 강대하고 사나운 초원 무리의 영도자. 제국이 두려워하는 수인병(獸人兵)들의 주인이며, 천지조화의 기적을 부리는 막강한 술사. 저 눈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은 전쟁 당시 펼친 대술법의 부작용이라던가.
‘무엇을 노리는가. 야만인들의 왕이여.’
품고 있는 저력의 끝을 알 수 없으나,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심계다. ‘재건전쟁’에서 제국으로부터 승전을 거둔 이후, 동맹으로 참전한 초원인들은 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사전에 약조한 부분은 부족함 없이 챙겨갔으나, 군주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크게 데였음에도 그에 따른 추가 몫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의외인 부분이다.
‘추후에 수작을 부리려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지.’
초원민족, 이제는 타칸 연합국이라는 해괴한 국명을 내건 그들은 정전이 체결된 이후 이제껏 베이고르의 성실한 동맹으로 남았다. 제국이라는 대적을 앞에 두고 있으니 분란을 일으킬 수 없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방심할 수 없다. 결코 야심이 없는 자가 아니니.’
그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왕들의 대화는 슬슬 본론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가 죽은 지 벌써 반 년. 듣자하니 수십 황자들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더군. 대귀족이라는 자들이 섭정회(攝政會)라는 것을 만들어 어떻게든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모양이지만…존재자체가 모순인 통치 기구일 뿐. 그 안에서도 기 싸움이 한창이라니 제국이 내전에 휩싸이는 건 시간문제.”
“같은 생각이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팔다리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국 균형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지.”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의 외관은 참으로 특이하면서도 강렬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작게 휘날리는 흰 머리카락도 그렇고,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 비치는 핏줄도 그러했다. 결코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기세는 누구도 그를 병자처럼 볼 수 없게 했다.
주앙 칼 고르는 너무도 형형해 섬뜩하기까지 한 상대의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입을 열어 꼭꼭 눌러놓았던 본론을 꺼냈다.
“오랫동안 쉬었고, 시기가 무르익어가니. 멈췄던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아직도 지난 전쟁의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했소.”
“초원의 전사들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난 전사이기 이전에 지도자. 날 따르는 이들을 보살펴야 할 책무가 있소. 이전과 같이 그들을 피 흘리게 하고 싶지는 않소이다.”
자, 드디어 나왔다.
유그 칸디시아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상념을 지우고 두 왕의 회담에 집중했다.
전사들을 피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진부한 이야기 바로 앞에 붙은, ‘이전과 같이’라는 말. 이는 지난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강조함과 동시에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제시하라는 의미다.
“전과 같지 않을 거요.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 과실은 그와 그대의 전사들에게도 크게 돌아갈 것이오.”
“베이고르의 왕. 그대가 신뢰할 수 있는 맹우임을 아오. 내 전사들이 흘릴 피에 대해 합당한 대가를 약속한다면 난 언제든 전장에 나설 수 있소.”
“제국은 강대한 적이오. 아무리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해도 말이지. 그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안전할 수 없소. 대족장. 우리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굳게 뭉쳐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난 언제나 그대에게 믿음직스런 친구로 남고 싶군.”
두 왕이 마주보며 웃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소.”
타르가이 베르겐이 말했다. 서늘한 시선이 탁자 위 지도에 내리꽂혔다.
*
얼어붙은 땅. 떨어진 눈이 녹지 않아 언제나 흰색을 유지하는 대지. 세인들의 입에 ‘녹지 않는 땅’으로 불리는 혹한의 고향에 백여 명의 사내들이 발을 디뎠다. 초원에서 넘어온 자들. 사람 뿐 아니라 말들까지 두꺼운 옷을 걸친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이동했다.
“곧 도착이다. 조금씩만 더 힘을 내라.”
우두머리의 말에 따르는 자들은 이를 악 물었다. 그들 모두 내로라하는 전사들이었으나 살을 얼리고 뼈를 파고드는, 매서운 수준을 넘어 저주스럽기까지 한 추위에는 덜덜 떠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휘이이잉
악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음산한 바람소리에 시달리던 와중. 앞서 가던 우두머리가 무엇을 보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저기다! 저곳이 약속장소다!”
힘을 내어 가까이 다가가니 무엇보다도 모닥불 연기가 먼저 보였다. 어떻게 이 추위와 바람 속에서 불을 피웠는지는 모른다. 볼 때마다 참 신기한 재주라는 들었다.
“이제야 왔군.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전사들이 거의 떨어지듯 말에서 내렸다. 우두머리만이 부드럽게 말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던 무리에게 다가갔다.
“간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우두머리가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로 넘기며 정중히 인사했다. 눈 한쪽을 검은 가죽 안대로 가린 사내. 그는 타칸 연합국의 대전사, 포라칸이었다.
“그렇군. 정말로 오랜만이야. 내 일찍이 소식은 들었지. 저 제국의 군주라는 놈과 맞붙었다지? 눈은 괜찮은가?”
“예.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만…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구만. 자네의 눈깔을 파버릴 자가 존재할 줄이야. 와하핫!”
“정말 안목을 넓혔습니다. 목숨 값으로는 싸게 치른 셈이지요. 그나저나 어르신은 여전하십니다.”
포라칸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인을 새삼 다시 보았다.
얼굴만 보면 흰 머리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초원의 전사들보다 크고 다부진 근육질의 몸을 보면 평범한 그 나이대의 노인이라는 생각을 고이 접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자네 부하 놈들은 어지간히도 허약하구만. 이만하면 날씨도 좋구만 뭘 저리 벌벌 떠는 게야?”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따스한 땅에 익숙해져버린 녀석들입니다.”
“쯔쯔!”
노인은 영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혀를 차고 싶은 건 포라칸이었다. 그는 걸칠 수 있는 것은 다 걸친 자신의 부하들과는 달리 그리 두껍지도 않아 보이는 가죽 옷 한 벌만 달랑 걸친 노인과 그의 수하들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지만 저들이 저렇게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노인을 비롯한 그의 일행은, 엄밀히 말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살가죽은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두꺼우며, 체모(體毛)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장 좀 보태서, 당장 얼굴의 반을 뒤덮은 수염과 머리카락만 봐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발도 디디기 힘든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 하얀 하늘의 축복을 받은 그들에게 추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 좋군. 눈딸기주(酒)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색다른 맛이야.”
“내륙에서 가져온 겁니다. 최대한 넉넉하게 들고 왔으니 완전히 얼어붙기 전에 드십시오.”
“얼면 어때? 도로 녹여서 마시면 되지. 아! 녹여 마시면 맛이 변하나?”
“그걸 모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크크크! 그럼 이 자리에서 싹 다 비워버려야겠군.”
말도 나오지 않는다. 가져온 술이 종류 따지지 않고 다 합쳐 이백 통이 훌쩍 넘는데 그걸 이 자리에서 다 비우고 가겠다니. 하지만 노인은 시시껄렁한 농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정말로 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기어이 저 모든 술통을 다 비워버리리라.
“그래. 내 딸년은 잘 있나?”
“예. 더위를 좀 타시긴 합니다만, 잘 지내십니다. 소족장을 보살피시느라 함께 오지 못하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흥! 매정한 계집애 같으니. 손주 녀석하고 같이 오면 될 일 아닌가.”
섭섭한 마음에 그냥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이제 두 살이 된 외손자가 먼 길을 오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사위 녀석은 잘 있나?”
“무탈하십니다.”
“다행이군. 먼젓번에 골골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후로는 언제 또 앓아누울까 영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특별한 경우였지 않습니까.”
“충격을 받아서 그래. 난 그전까지는 사위 녀석을 해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리라 생각했거든.”
“그랬지요. 저도 크게 놀랐습니다. 덕분에 눈 한 쪽도 잃지 않았습니까.”
“클클! 그래. 잡스런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술을 들이키면서 하고, 본론이나 꺼내봐. 내게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예.”
포라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살마드의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그의 앞으로 온 서신을 읽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그의 찌푸린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시답잖은 소리를 장황하게도 써놨군.”
고급스러운 서신은 그의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서신 말미에 박힌 주앙 칼 고르의 인장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무슨 짓이오!”
“무슨 짓? 무슨 짓이냐고? 나야말로 되묻고 싶군.”
언성을 높이는 사신(使臣)에게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국과 맞닿은 베이고르의 마을 몇 개가 약탈당했다. 마을을 약탈한 무리는 제국의 깃발을 걸고 있었으니, 제국은 흉수를 밝히고 잡아들이는 데 적극 협조하라. 그러지 않을 경우 정전협상을 위배한 것으로 판단,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빤히 보이는 수작은 그만 두지. 망국 잔당의 수괴가 전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응해주겠다. 가서 네놈의 주인에게 전하거라. 이 몸은 살마드의 성주로서 마땅히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겠노라고. 또한 제국의 영토에 군홧발을 디디는 그 순간이 너희 알량한 무리의 최후일 것이라고.”
“후회할 거요.”
“가라. 네 주인에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음껏 누리라고 전해라.”
살마드의 성주관저에서 고성이 있었던 날로부터 보름 후. 베이고르와 타칸 연합국은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엿새 후. 네 개 군대가 국경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