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카트리나 리에론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위에 얇은 화장이 더해지니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의 얼굴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트리나 리에론은 결코 자신에게 관대한 여인이 아니었다.
보통 어느 정도 여유가 되는 귀부인들은 화장 솜씨가 뛰어난 하녀나 노예를 따로 둔다. 그러나 그녀는 가문에서 일하던 화장 전담 하녀에게 화장술을 배운 뒤로 줄곧 스스로 화장을 하곤 했다. 그녀는 남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의 의도가 담기길 원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스스로를 꾸미는 이 짧지 않은 의식은 무부들이 전투 전에 하는 무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뒤편에서 조용히 서 있던 나이 든 하녀가 한 마디 건넸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섬긴 하녀였다. 가문에 남아도 되는 것을 스스로 따라온 충직한 여인이다. 무표정하게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던 카트리나 리에론의 눈길도 뒤편의 하녀를 향할 때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고맙구나.”
사감이 섞인 칭찬이라 해도 아름답다는 말은 여인에게 있어 더 없는 찬사이련만, 칭찬을 받은 그녀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모자라지는 않다고 자부하는데, 그에겐 아닌 것 같구나.’
입 밖에 내기는 창피한 말이다. 그러니 속으로만 삼킨다.
그녀의 남편은 사흘에 한 번씩 그녀를 안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한 첫날밤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안는 막시밀리언의 품에서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한 번도 거칠지 않고, 성의 없던 적이 없었지만 그뿐이다.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꼭꼭 숨겨놓은 그 계집이 나보다 나은 걸까?’
알고 있다. 막시밀리언에게 애첩이 있다는 것을.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감정을 가지고 한 결혼이 아니다. 정략혼이 아닌가?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만,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란 으레 그런 것이다. 사내들만 탓할 필요 없다. 귀부인이라는 이들도 밖으로 돌며 다른 여인의 남편과 살을 비비지 않는가. 그러다가 덜컥 아이를 갖게 되어 곤란을 겪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을 정도다. 그에 비하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저택에 유폐시켜 놓듯 애첩을 둔 막시밀리언은 굉장히 양호한 편이다.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섭섭하거나 불쾌하지도 않다. 단지 궁금할 뿐이다. 알아본 바에 자신과 결혼하기 수 년 전부터 끼고 있던 계집인 모양인데, 그 정도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관계는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생겼을까.’
자신보다 나을까? 적어도 남편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끄럽고 탐스럽게 보이던 입술이 조금 얇지 않은가 싶고, 차분해 보이는 눈이 심심하게 느껴진다.
‘한심하긴.’
자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바깥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부사령관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응접실에 모셔라. 곧 가겠다.”
“예.”
카트리나 리에론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고 몸을 일으켰다. 늙은 하녀가 다가와 팔과 손목 등에 장신구를 채워주었다.
“미트라스 부인께서는 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부르지 않았으니까.”
“파티에서는 세 분이 함께 다니시지 않습니까?”
“그래.”
“하온데 어찌?”
“미트라스 부인은 말을 전하기에 좋고, 군터 부인은 나누기에 좋지. 오늘은 그냥 말을 나누고 싶었거든.”
파티에서 미트라스 부인은 다분히 활동적이다. 특히 그녀의 말을 대신 해주거나, 주변을 환기시켜주는 데 탁월하다. 반면에 군터 부인은 조용하다.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데 능하다. 때문에 파티에서는 그저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부사령관 부인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을 정도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티에서의 이야기고, 사석에서는 다르다.
“오셨군요. 부인.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금방 도착했는걸요.”
김이 폴폴 나는 차를 후후 불다가 일어나 그녀를 맞는다.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카트리나 리에론은 벨리사의 웃는 얼굴을 잠깐 눈에 담았다. 언제 봐도 참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표정 연기에 능한 여인네라 해도 저 얼굴만은 꾸며낼 수 없고, 따라하지도 못할 것이다.
“보리스가 절 미워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요즘엔 저와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걸 더 좋아한답니다.”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으로서 카트리나 리에론은 벨리사보다 부족한 게 없지만, 여인으로서는 그녀보다 나은 점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오직 아내만 바라봐주는 자상한 남편,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래서이지 않을까? 벨리사가 저런 웃음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은.
“부사령관은 요즘 어떠신가요?”
“요즘엔 통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랍니다. 밤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나가니, 일부러 자지 않고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얼굴을 볼 수 있어요. 공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이해는 하지만…….”
밝게 빛나던 얼굴에 처음으로 그림자가 진다. 카트리나 리에론은 말수가 줄어든 벨리사를 위로했다.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지.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남편과의 대화나, 가문과 주고받는 서신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애써 부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꾸준히 굳어가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다. 도시의 시민들이 얼굴에 그림자를 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워, 워.”
거대한 흑마가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흙먼지를 피웠다. 역동적인 힘이 넘쳐흐르는 말의 목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군터는 아이처럼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고했다. 내쉬.”
이 멋진 녀석에게 군터는 내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암상이 자신한 대로, 네 마리 말은 모두 명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상품(上品)이었다. 군터는 그 네 마리 말을 가지고 가장 먼저 막시밀리언에게 갔었다. 좋은 말들을 얻었으니 마땅히 상관인 막시밀리언에게 먼저 보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웃으며 사양했다.
“좋은 말이야. 달리지 않고 멈춰 서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군. 내가 이런 말을 탄다 하여 무슨 의미가 있겠나. 좋은 검을 칼집에 쉬게 하는 꼴이니, 이런 말의 주인은 응당 자네 같은 용사들이 되어야 하네.”
군터가 재차 권했으나 막시밀리언은 또 한 번 사양했다. 하여 군터는 네 마리 말 중 쿠센을 떠올리게 하는 흑마 하나를 자신이 갖고, 한 마리는 미트라스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마리는 각각 살라스와 할렌에게 주었다. 미트라스는 크게 기뻐하며 훗날 반드시 보답을 하겠노라 약조했고, 살라스와 할렌은 자신들이 이런 귀한 말을 타도 될 지 곤란해 했다.
“나라고 해도 한 번에 세 마리 말을 탈 수는 없다. 좋은 말을 얻었으니 훗날 활약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크게 활약하면 된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미트라스가 크게 기뻐했다면 살라스와 할렌은 그 정도를 넘어 감동한 기색이었다. 눈물이라도 한 두 방울 흘릴 만큼 말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말을 탈 줄 아는 무인에게 있어서는 손에 쥔 무기보다 중한 것이 말이다. 그것도 보통 말이 아니라 명마라 불려도 손색없을 훌륭한 놈을 얻었으니, 그 기쁨이 어찌 감동에 미치지 못할까.
푸르륵!
“진정해라.”
내쉬가 아직 더 많이,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듯 씩씩댄다. 곤란할 만큼 혈기가 넘치는 녀석이다. 완전히 길들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원 없이 달릴 수 있는 때가 올 거다.”
확신이 담긴 말이다. 이제는 그도 다가올 전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정전은 깨진다.’
어설프게 멈춰놓은 전쟁은 다시 시작된다. 그게 ‘곧’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시간 후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폭풍이 휘몰아치기 직전 같군.’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막상 북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떠는 이들이 바람잡이로 보일 만큼.
막시밀리언도, 위벨도 놈들이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 여기는 듯했다. 제국의 혼란이 절정에 다다라 바크렌에 손을 쓰기 힘들다는 확신이 서면, 그때 비로소 득달같이 달려들 거라고. 그들은 반군의 우두머리, 주앙 칼 고르의 심계를 엿보기 위해 매일 같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군터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주앙 칼 고르나, 그의 졸개들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여겼다.
‘소리만 크게 낼 뿐, 어차피 놈들은 오합지졸이다.’
한 번 전쟁을 겪었고, 그 뒤로도 시간이 흘렀으니 이전과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약졸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군터는 주앙 칼 고르와, ‘신생 베이고르 왕국’이라 스스로를 일컫는 반군 무리보다 그들과 손잡은 동맹이 더 신경 쓰였다.
타칸 연합국.
초원의 부족들을 일통한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 세운 국가. 초원인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이지만, 그는 해냈다. 정착의 역사가 없는 초원인들을 초원 밖으로 이끌어 내어 성벽 있는 도시에서 살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왕 대신 대족장이라 불리길 원했다.
‘바뀔지언정 버리지는 않겠다는 거다.’
대족장이란 직위는 정복하고 약탈하는 자의 것이다. 그에 반해 왕이란 머물며 다스리는 자의 것이다. 타르가이 베르겐이란 작자는 비록 초원의 삶을 일부 바꾸었지만 그 본성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비록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쟁이 멈춘 수 년 동안 그들의 이빨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직감에 불과할지라도 군터는 확신했다.
‘이번엔 다르다.’
저번 전쟁에서 그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더불어 적지 않은 것을 잃기도 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싸움이라는 것이 으레 그런 것이라지만 아직도 가끔씩 좌절하고 실패했던 기억들이 꿈으로 나타나곤 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또 다시 시작될 전쟁에서도 그는 많은 것을 잃게 되리라. 하지만 그렇다한들, 이번만큼은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승리할 것이다.’
묘한 감정으로 두근거리는 것은 손에 쥔 칸젤일까, 아니면 그의 가슴일까. 조금 전까지 씩씩거리던 내쉬는 이제 조용했다. 그의 주인이 의식치 못하고 내뿜는 기세는 실로 흉포하여 어지간한 맹수보다 거친 기질을 가진 젊은 말도 주눅 들게 했다.
“돌아가자.”
하여 주인이 가볍게 고삐를 당겼을 때, 내쉬는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히 머리를 틀었다. 여러 인간의 손을 거치는 동안 귀하게 떠받들어지며 마음껏 성질을 부려왔던 흑마는 난생처음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11월의 첫날입니다. 날씨가 부쩍 추워지는데 독자분들 모두 감기 유의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