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황도에서 전투가 있었다느니, 어디서 어느 귀족과 어느 귀족이 크게 맞붙었다느니 하는 근거도 없고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양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시민들의 마음에 불안이 활활 타올랐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저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병사들을 거세게 다그쳐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함을 보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떤가.”
“아이고. 살펴주시는 덕분에 별 일 없습죠.”
“그런 것을 물은 게 아니지 않은가. 알면서 말을 돌리는군.”
위벨은 간사하게 눈을 굴리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무부들처럼 날카롭거나 사납지는 않았지만 흔들림 없이 상대를 가두었다.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지그시 쳐다보고 있으니 결국 사내도 한숨 쉬며 감춰두었던 속내를 터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요. 주도의 지체 높으신 분들도 그렇고, 저기 북쪽 땅도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니까 말입니다.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다들 움츠리는 추세지요.”
“그래도 아직까지 거래물량에 변화는 없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는’이지요. 미리 체결해놓은 거래인지라 앞으로 한 보름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요. 그 다음이 문제지요.”
“수요가 줄어들 것 같은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베이고르…아니, 반왕(反王)이 물자를 징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고요.”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흘러 다니는 이야기로만 치면 이미 저 남쪽의 황도는 불바다가 되었겠지.”
“그렇기는 합니다만…어쩌겠습니까. 그런 별별 소문에 다들 겁을 집어먹는 것을요.”
“흐음.”
죽겠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는 사내. 그를 보며 위벨은 가벼운 침음을 삼켰다.
그렇게 위글로우에 자리를 잡은 암상의 일원과 이야기를 마친 그는 즉시 사령관저로 향했다.
“그런가.”
보고를 들은 막시밀리언이 턱을 쓸었다. 짧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자란 수염이 손끝을 지났다.
“전쟁 운운은 우는 소리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예?”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있을지도 몰라. 황도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성주가 우려하는 것처럼 혼란이 확산된다면…베이고르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이전의 전쟁에서도 제국은 여력의 부족을 드러냈다. 현재 치르고 있는 전쟁 중 세 개를 멈추더라도 그 힘이 내부의 진통에 쓰인다면 북부 변경지역에서 정전이 깨진다한들 제국에서 신경을 쓸 수 있을까? 물론 제국에서 영토를 그냥 넘겨주는 일은 없겠지만, 베이고르 입장에서는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고.
“내색은 안 해도, 자네도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않나?”
“으음. 사실은 그렇습니다.”
“기탄없이 자네 생각을 이야기해보게. 어차피 이 자리에는 우리 둘 뿐이야.”
위벨이 표정을 굳혔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듯 입을 달싹거리고서야 속내를 드러냈다.
“저는…어쩌면 아국이 내전에 휩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시적이지 않은, 다년간에 걸친 길고 심각한 분열에 말입니다.”
“…계속해보게.”
“타국의 경우, 왕위를 놓고 벌이는 후계 다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안정적인 계승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지요. 계승권자, 혹은 다른 권력가의 반란으로 인해 왕조가 바뀌는 경우도 이따금씩 있는 편입니다.”
인간은 권력을 탐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그런데 이 권력이라는 것은 마물(魔物)이라,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권력을 탐하게 한다.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왕좌를 탐하는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의심병에 걸리는 것은 그들이 유난스러워서가 아닌 것이다.
“허나 아국의 경우는 그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붕어하신 황제 폐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아국은 지지 않는 성세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오히려 약점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약점이라…그래. 그럴 수도 있지.”
갑작스레 생긴 왕의 부재. 이는 왕위 다툼을 겪은 바 있는 타국에서 일어났어도 큰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는 대사(大事)다. 하물며 제국은 일찍이 이러한 사태를 겪은 바가 없다. 면역력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계승권을 가진 황자들은 좀 많은가? 직계만 해도 수십이 넘고, 방계까지 합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이거 참, 끔찍한 일이군.”
“관리로서, 성주의 판단은 옳습니다. 하지만 모든 관리가 그 같지는 않을 터.”
며칠 전 파비우스 리에론이 보낸 서신이 왔다. 성주 및 바크렌의 최고 권력자들과 가진 회담의 내용이 간략하게 담겨 있었다. 회담에서 정한, 향후 바크렌의 지침도 물론 함께였다.
“어렵지. 성주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크렌이 벽지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대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 어차피 황위를 노리는 황도의 권력자들은 밖으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심 있는 자들은 그 손을 거절하지 않겠지요.”
“내전은 확실하겠군.”
“또한 금방 끝나지도 않을 겁니다. 어떤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제국의 심장에서부터 전란이 들끓는다. 언제 꺼질지도 모를 불이 제국 전역을 뜨겁게 뒤덮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막시밀리언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두통이 다 일었다.
“문제군. 문제야. 회담의 밀약이 지켜진다면 당장 휘말리지는 않겠지만, 눈앞의 적이 문제야.”
“아직은 시간이 조금 있지 않겠습니까.”
황도의 혼란이 격화되고, 제국이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 있다. 위벨은 적들이 그때까지는 기다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모르는 일이 아니겠나. 우리가 놈들을 아는 것처럼, 놈들도 우리를 알고 있으니. 아무튼 들어오는 소식을 예의주시하게.”
“예.”
*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군터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언덕 아래를 주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을 열어 명령했다.
“좌로 선회.”
“좌로 선회!”
군터의 나직한 말에 살라스가 목소리를 높이니 깃발을 든 병사 한 명이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 아무런 무늬 없이 통째로 빨간 깃발이 좌우로 펄럭였다.
그 신호를 본 언덕 아래서 말을 달리던 기마대가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급격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져나가는 이가 없었다.
“우로 선회.”
“우로 선회!”
군터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언덕 아래의 기마대를 시험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낙오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쉬지 않고 달리던 기마대는 질서정연하게 정렬하여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군터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백 쌍의 눈이 흥분과 기대를 담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이제야 어디 가서 기마대라 해도 부끄럽지는 않을 수준이 됐구나!”
후한 칭찬은 아니었다.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답이었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그들은 거침없이 환호했다. 기대했던 칭찬은 받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어쨌거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그간의 인고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저리도 좋아하는데 조금 더 살갑게 말씀해주지 그러셨습니까.”살라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한참 부족하다.”
살라스는 그의 기준점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닌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콧방귀 하나 안 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길었습니다만…그래도 어떻게든 해냈군요.”
“그래.”
군터 천인대의 전원 기병화. 처음 막시밀리언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기병이라는 것은 그저 병사를 장비 갖춰 말에 태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을 타고 능숙하게 전투 및 각종 임무를 능숙히 수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기병이라 부르는 것이다.
‘초원의 전사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거기다 군터의 눈은 굉장히 높다. 기병을 보는 그의 기준점은 초원의 전사였다. 말 위에서 나고 자라는 초원 전사를 기병의 기준점으로 두니, 사실 그의 눈에 차는 이들은 지금도 천인대 내에서 백을 넘지 않는다.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상황은 나날이 급박해져 가는데, 당장 눈에 비치는 부하들은 부족하기만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다그친다고 해서 갑자기 확 나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가는 수밖에.
“군마는?”
“오후쯤엔 도착한다고 하더군요. 바로 보시겠습니까?”
“물론.”
이제는 기병대가 되어버린 그의 천인대에는 노쇠한 군마를 탄 병사들이 꽤 있다. 그들의 말을 교체하기 위해 질 좋은 초원마를 대거 구매했다. 그 말들이 도착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장군마로도 손색이 없는 상등품이 몇 마리 있다고 하던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보면 알겠지.”
군터의 애마, 쿠센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았다. 전쟁터의 한복판을 함께 내달렸던 씩씩한 흑마는 이제 전과 같이 속도를 내지도, 오래 달리지도 못했다. 나이로는 아직 퇴역할 나이까지는 아니지만, 혹독한 전장을 여럿 겪어서인지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군마들보다 노쇠가 빨리 찾아왔다.
1년 정도는 더 함께 해도 되겠지만, 군터는 쿠센에게 보다 일찍 평온한 삶을 주기로 했다. 고생은 할 만큼 했다. 녀석은 이제 더는 무거운 주인을 태우고 위태로운 땅을 밟지 않아도 되리라.
얼마 후. 군터는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살라스와 몇몇 수하를 대동하고 상인들을 만나러 갔다.
“아이고. 부사령관께서 직접 오실 줄은.”
상인이 머리를 허리 높이까지 숙이며 달려왔다. 군터는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 뒤를 살폈다. 족히 이백 필은 되어 보이는 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주변에는 상인의 무리로 보이는 사병들 여럿이 지키고 서 있었고, 그 바깥에는 군터의 수하 병사들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다.”
“고생이라니요. 그 무슨 말씀을. 그저 주문받은 대로 물건을 가져왔을 뿐입니다요.”
“밖이 꽤나 시끄러웠을 터인데, 말들을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나?”
“말도 마십시오. 안 그래도 조금만 늦게 움직였더라면 어려웠을 뻔했습니다. 오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국경이 아주 봉쇄되다시피 했다더군요. 그 때문에 다른 곳에서 움직이던 자들은 국경을 앞두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답니다.”
“그 정도인가?”
“잘은 모릅니다만…아그니스 체스퍼 장군께서 엄명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엄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것만 놓고 보면 거의 국경을 봉쇄하디시피 한 모양이었다. 상인의 말처럼, 이쪽은 운이 따른 셈이다.
“쓸 만한 말 몇 마리가 있다지?”
“예. 따로 모아놨습니다. 이쪽으로.”
상인이 이끈 곳으로 가자 과연 보기에도 남달라 보이는 말이 네 필 있었다. 그 체구부터가 보통 말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됐다. 이제껏 군터가 타던 쿠센도 준마라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상인이 내보인 네 마리 말은 그런 쿠센보다도 더 체구가 좋았다. 물론 체구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괜찮군. 시험해 봐도 되겠지?”
“물론입죠. 당장에라도 문제없습니다.”
군터는 병사들을 시켜 상인이 가져온 말들을 타보게 했다.
“이상 없습니다.”
돌아온 수하 백인장이 보고했다.
“특히 이 네 마리 말들은 제 생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좋은 말이더군요.”
이 말은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전했다. 군터는 작게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해 둔 주머니를 상인에게 건넸다.
“약속했던 잔금이다.”
“감사합니다. 저…그런데.”
“…….”
상인은 뭔가 더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군터가 지그시 바라보니 곧 아무것도 아니라며 꼬리를 말았다. 꼴을 보아하니 징징대면서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의도로 보였지만, 군터가 은근히 기세를 풀어내니 감히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옮겨라.”
“옛.”
말을 전했던 수하 백인장이 밝은 얼굴로 병사들과 함께 말을 옮겼다. 뒤에 남은 상인만이 반쯤 우는 얼굴을 한 채 덩그러니 남았다.
========== 작품 후기 ==========
김주혁씨의 사망 기사를 봤습니다. 놀라우면서도 안타깝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