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83화 (183/1,064)

<-- 2부 -->

리에론 가의 가주 파비우스 리에론.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

관재중신 아샤즈 테오모렌.

살마드의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

바크렌을 이끌어가는 거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대외에는 철저히 숨긴 채 극비로 이루어진 그들의 만남.

“어려운 자리를 마련해주셨군요 성주님.”

간단한 인사 후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파비우스 리에론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에게 시선을 주며 운을 떼었다.

마치 무관처럼 옷 아래 가벼운 갑옷까지 받쳐 입은 그 중년인이 바로 살마드의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다. 신정부로 구분되는 당파의 수장이기도 한 그는 이 자리를 마련한 장본인으로서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비극이 일어났소. 어려운 시국인 만큼, 바크렌을 이끌어가는 여러분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이다. 리에론 가주가 말했듯 이 자리를 이렇게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모두 속을 터놓고 서로 근심을 더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오.”

“좋지요. 황도에서 일어난 참사를 들은 이후로 줄곧 불안하던 차입니다.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유의미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군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흰 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많은 노인이 마른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의 이름은 아샤즈 테오모렌. 바크렌의 관재중신이자 바스카드 일레이저 이전의 성주 때부터 일파를 이끌어 온 정계의 거두다.

“성주께서 청하셨고, 전에 없던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 만큼 이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당위에 대해서는 십분 이해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가 그리 길게 늘어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바로 이 사내였다. 전쟁에 나온 것처럼 무장을 하고 온 중년인. 다른 이들과 같은 크기의 의자에 앉았음에도 혼자 작은 의자에 앉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오. 황도에서 사자가 내려오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며 맡은 바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

“물론 그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성주께서 말씀하셨듯이 불안한 시국이오. 괜한 행동은 불필요한 잡음을 낳을 수 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중일 것이오.”

웃으며 말을 하던 아샤즈 테오모렌은 결국 날카롭게 받아치는 아그니스 체스퍼 덕에 입을 닫았다. 다만 그러면서도 웃는 낯은 변하지 않았다.

“성주께서도 소장과 같은 생각이실 것이라 믿습니다.”

“크게 다르지는 않소.”

“그 말씀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여차하면 허리춤에 손이라도 가져갈 것 같은 기세였다. 물론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어야 할 칼은 바깥에 남은 그의 수하가 맡고 있었지만 말이다.

“장군도 알고 있을 것이오. 황도의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

“황도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소. 혼란은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오히려 더 크게 번져가고 있지.”

정식으로 계승권을 가진 황자들만 수십이다. 그들 모두 본래는 황위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품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나, 갑작스레 찾아온 기회는 그들 모두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제국의 지존이 될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대다수의 황자들이 변변치 못한 이들이라면 상황은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계승권을 가진 황자들은 모두 만만찮은 외가를 둔 이들이다. 비록 황위를 계승하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황후나 황비, 나아가 황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것은 힘을 가진 귀족가들로서도 큰 영예였기에 그들은 모두 황제의 사돈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좌를 둔 암투는 이미 벌어지고 있을 것이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곳에서, 더 심하게 일어나고 있겠지. 그 다툼은 결코 짧게 끝나지 않을 것이오.”

“어찌 확신하십니까. 비록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지만 군주들께서 남아계십니다. 특히, 수호자께서는 여전히 황도에 계시지요.”

아그니스 체스퍼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바스카드 일레이저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는 절제하고 있다지만, 흑포장군의 기세 앞에서도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군주들께서 충성을 맹세한 대상은 황제 폐하시오. 황가(皇家)가 아니고, 황자 전하들도 물론 아니지.”

“그 말씀이 옳습니다. 허나 그렇다한들, 군주들께서 혼란을 마냥 방치하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장군. 장군은 군주를 뵌 적이 있소?”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있소.”

“…….”

둘의 언쟁이 소강상태를 맞았다.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과거의 어느 날을 되짚었다.

“나는 예전에 아간투스베록 전하를 뵌 적이 있소. 영광스럽게도 짤막하게나마 대화를 나눌 기회까지 얻었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분과 나눴던 대화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소.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던 탓이지.”

“하고픈 말씀이 무엇입니까.”

“군주는. 그분들은…우리 같은 범인의 잣대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요. 난 그것을 아간투스베록 전하를 뵈고 느꼈던 바, 아국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돌아가든지 그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실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

“억측이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내 목을 둘 중 하나에 걸어야 한다면 그분들이 나서지 않는다는 데에 걸겠소.”

목을 걸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평소 성주의 진중한 성품을 알고 있던 터라 그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파비우스 리에론이 입을 떼었다.

“이 몸 역시 성주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일전에 줄카 전하를 뵌 적이 있지요. 뭐 그리 길게 시간을 갖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때 저도 성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몸의 생각만은 아니었을 줄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대신.”

“비슷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확실히, 필부의 눈과 사고로는 재단할 수 없는 분이셨지요.”

우스운 일이다. 성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거의 평생을 바크렌에서 살아온 두 사람마저 군주를 만난 적이 있건만 황도에서 태어나 제국 각지를 돌아다닌 아그니스 체스퍼는 군주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

아그니스 체스퍼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다시 성주, 바스카드 일레이저에게 시선을 주었다.

“좋소. 그렇다면 한 번 들어봅시다. 성주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황도의 정쟁에 군주들께서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황도의 혼란은 급속도로 아국 전체에 뻗어나가리라 보오.”

“아국은 현재 4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욕심에 눈이 멀었다한들, 황도의 거두들이 그리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옳소.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짓겠지. 아바시스는 어떨지 몰라도, 나머지 3국과는 종전협상을 하든 정전협상을 하든 하지 않겠소?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그런 연후에 남는 병력을 돌려 아바시스를 상대하겠지.”

파비우스 리에론이 끼어들었다.

“3국이 순순히 협상에 응하겠습니까?”

“응할 거요. 어차피 그들은 오래 전에 지친 상태. 멈추고 싶은 마음이야 한 가득이었지만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 명분을 아국이 먼저 제시해준다면 아닌 척하면서도 협상장에 나올 것이오.”

전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부담을 느끼지 않을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벽지 중의 벽지인 이 바크렌에 박혀 있던 파비우스 리에론이나 아샤즈 테오모렌은 정확한 정세를 알지 못했지만, 황도에서 내려온 나머지 둘은 제국이 벌이고 있는 4개의 전쟁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외부의 소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면 본격적인 황위 다툼이 시작되겠지. 명분은 누구에게나 있소. 그게 문제지.”

“수호자께서 나서주시지는 않겠습니까.”

마지막 희망을 담아 아그니스 체스퍼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관적이었다.

“황실근위대 오천. 물론 대단한 힘이기는 하나 이빨을 드러낸 모든 이들을 꿇리기는 쉽지 않을 거요. 게다가, 난 수호자께서도 다른 전하들과 크게 다르시리라 보지는 않소.”

“으음.”

여섯 군주에 대한 인식은 두려움과 경외로 압축된다. 그것은 무지렁이 백성들부터 지체 높은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 저 이름 높은,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대귀족들 정도가 되면 사정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살아있는 신과도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 그들에 대한 경외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인 이유는 그 초월적인 존재들보다도 더 위에 군림하는 황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여섯 군주를 완벽히 통제했고, 여섯 군주는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황제의 명대로 제국을 위해 싸웠고, 제국민의 수호신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황제는 없다. 그렇다면 여섯 군주는 어찌 움직일 것인가.

“예상할 수 없는 변수는 제외하고 보는 게 옳소. 확실한 사실은, 황위를 둘러싼 암투가 그림자 밖으로 드러날 것이란 사실이지.”

“성주께서는 그에 대한 우리의 처신을 논하고자 하십니까.”

아샤즈 테오모렌이 말했다.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마 회유작업이 진행될 거요. 황자 전하들은 황위 다툼을 위해 세력을 얻고자 하실 테니까. 이르든 늦든, 이 변경까지도 그 손길이 뻗어오겠지. 허나 이 몸은 우리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위험한 진창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보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중립을 지키자…이 말씀이십니까.”

파비우스 리에론이 말을 받았다. 이번에도 바스카드 일레이저는 긍정했다.

“단언컨대,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뒤쪽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오. 우리가 봐야 할 적은 이미 눈앞에 있지 않소?”

반군과 야만인 놈들을 말함이다. 정전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어설프게 봉합한 전쟁은 언제든 다시 재개될 수 있다.

“아국의 혼란을 알게 되면 놈들은 필시 움직임을 보일 것이오.”

“그 날이 바로 망국의 잔당과 주제도 모르는 야만인 놈들의 최후일 것입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될 것이라 믿고 있소.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은 분명하지. 아무튼…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오. 이미 위험은 우리 앞에 있으니, 또 다른 위험을 끌어들이지는 말자는 것이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 여겨도 되겠소?”

차례로 시선을 받은 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놀다 왔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한결 좋아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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