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사령관저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군터였다. 그가 도착하고 나서 그 뒤를 이어 다른 이들이 속속들이 당도했다. 그때까지 막시밀리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군터의 집에 와 말을 전한 전령처럼, 아니 그보다 더 좋지 못했다.
모두 모였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분위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 막시밀리언의 표정을 살피기 바빴다. 심지어는 위벨조차 짐작되는 것이 없는지 의아한 기색이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자네들을 급히 소집한 것은…살마드로부터 급한 소식이 들어와서이다.”
막시밀리언은 중간에 몇 번씩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에게서 극도의 긴장과 곤혹스러움, 기타 감정들이 엿보였다. 단언컨대 군터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런 막시밀리언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의문이 깊어갈 즈음.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킨 막시밀리언이 입을 떼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 전갈이 온 곳이 살마드고, 리에론 가문인 만큼 믿지 않을 도리도 없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황제폐하께서…승하하셨다.”
툭!
찻잔이 탁자 위를 굴렀다. 찻물이 쏟아졌다.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
트라소프 2세.
선왕이었던 부친, 트라소프 1세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 켈자그의 왕이 된 그는 도시 밖을 거닐던 어느 날 원신의 신탁을 받아 그의 사도가 되었다. 신의 가호를 받은 그는 영세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켈자그를 끝없는 번영으로 이끌어 끝내 제국으로 키워냈다. 여섯 군주를 휘하로 거두고, 서른일곱 주를 영토로 두었다. 모두 그의 삼백 하고도 팔십여 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이룬 일이었다.
그는 황제라 불렸다. 왕 중의 왕이라 불렸고, 원신의 제사장을 자처했다. 신과 같은 군주를 여섯이나 아래에 둔 그는 진정 인세에 현신한 신 그 자체였다. 그는 어떠한 말도 한 적이 없지만, 일부 제국의 백성들 중에서는 황제를 신이라 믿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들의 아비, 할아비, 그 이전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를 다스렸던 황제야말로 하늘 위에 거하는 원신의 현신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비단 순박한 백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교활하게 머리를 굴리며 돈을 만지는 장사치들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온갖 부패를 저지르는 관료들이나, 거드름을 피우며 남을 깔아보는 귀족들이나, 모두 제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황제에 대해 품는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영원불멸하며, 언젠가 이 세상 전부를 발아래 둘 단 하나 뿐인 지배자.
그 이름은 신앙처럼 경건하며, 그 존재는 만인이 우러러 마땅할 경외의 대상. 고귀한 자부터 천한 자까지 그 아래에서는 구별 없이 무릎 꿇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넓은 제국의 영토에 우뚝 선 단 하나의 규율.
황제 아래 제국은 위대하며, 그 절대적인 위엄아래 아래 세상은 원신의 신역(神域)이 된다. 제아무리 황도의 대귀족들이 정파싸움에 골몰한다한들, 황제의 명이 내려오면 그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목소리를 죽이고 고개를 조아린다.
이렇듯 제국에 있어 황제는 신앙이며 질서다. 제국이 곧 황제이며, 황제가 곧 제국인 것이다.
그래서였다. 막시밀리언이 한없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했음에도 누구 하나 현실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언가…와전이 된 게 아닐는지.”
다른 곳도 아니고 리에론 가에서 온 소식이 잘못된 것이리라 기대하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써 부정하는 까닭은.
심지어는 항시 냉정함을 보이던 위벨마저도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군터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도 뜻밖의 소식에 놀라기는 했으나, 다른 이들처럼 큰 동요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쿼러즈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대로 제국의 백성이었던 것이 아닌 만큼, 황제에 대해 갖는 생각도 이 자리의 다른 이들과는 다르니까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황도에서 변란이 있었다고 한다. 황태자가 난을 일으켜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수호자께 쫓겨 하렘에서 분사했다는군.”
“황태자 저하께서 어찌……!”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모두의 시선이 위벨에게 쏠렸다. 여전히 안색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 그는 어느 정도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은 듯했다.
“황태자라는 자리는 황제폐하의 뒤를 잇는 자리. 하지만 황제폐하께서는 원신의 제사장으로서 영생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이제껏 황태자의 자리가 여럿 바뀌었으니, 본인 역시 평생 황태자의 자리에 있다 사라질 운명임을 알았겠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미트라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막시밀리언이 없었다면 자리라도 엎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는 그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얼굴까지 잔뜩 붉어진 그의 분노와 슬픔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그게 끝입니까?”
군터가 물었다.
리에론에서 단지 소식을 전하려고 서신을 보냈을 리는 없다. 뭔가 첨언이 있으리라.
“숨죽이고 있자는 이야기지. 다행히 바크렌은 변경이니 덜하겠지만…그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어떤 태풍이 불어올지 몰라. 자네들은 일단 이 일에 대해 함구하도록 하게. 곧 백성들도 모두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혼란을 늦추고 줄이는 편이 좋을 테니.”
“하지만 사령관! 정말로 황제폐하께서 승하하셨다면 속히 위령제를 실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신관들도 모두 불러 모아 기도회를 열어야지요.”
미트라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막시밀리언이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내 마음이 자네보다 덜 끓고 있다 착각하지 말게. 나 역시 당장 백의를 입고 단상 위에 올라 누구보다 눈물을 쏟고 싶은 마음이니. 하지만 내게는 위글로우의 시민들을 다스려야 할 책무가 있다.”
마냥 감정에 휘둘리는 자가 어찌 남의 위에 설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런 바보는 없었고, 미트라스도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마음이 들끓어 사령관께 무례를…….”
“됐네. 이 소식이 퍼지면 필시 자네보다 더 뜨겁게 반응하는 자들이 넘쳐날 것이야. 혼란을 다 가라앉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화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옛.”
“이만들 물러가게.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절대 바깥으로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네.”
“예.”
*
막시밀리언은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고 예상했지만, 그것은 입소문이라는 것의 힘을 너무도 간과한 생각이었다. 불과 사흘 후, 위글로우는 온통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아아아! 폐하!”
황제의 얼굴은커녕, 그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을 백성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황도가 있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누가 보면 혈육이라도 죽었다 생각할 정도.
“부모 자식이 죽어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할렌이 말했다. 군터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저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가 있는 거겠지.”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제국인들의 마음속에 황제가 차지한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말이다. 심지어 벨리사조차 온 위글로우가 비통함에 휩싸인 요 며칠 동안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라스는 아예 얼굴이 반쪽이 되었고.
“앞으로 어찌 될까요?”
“글쎄.”
군터는 솔직히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막시밀리언의 소집에 참석한 회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듣다보니 현 상황이 굉장히 위태로움을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추슬러보면 황제의 붕어도 붕어지만, 그 후에 벌어질 일들이 더 문제라고 한다. 당장 후계부터가 미정이다. 본래라면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황태자가 황제를 살해하고 불타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아야 할 것인데, 그 황자의 수가 근 백 명에 달한다 하니 후계 문제가 쉬이 정리될 것 같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내전까지 발발할지 모른다 했던가.’
위벨이 어렵사리 꺼낸 이야기였다. 평소 위벨의 말이라면 그게 어떤 내용이든 잠자코 들어주었던 막시밀리언조차 대경하여 탁자를 후려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자리는 하나인데 노리는 자들은 넘쳐나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만 그런 당연한 추측을 입 밖에 내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을 뿐. 그러고 보면 위벨은 그 가냘픈 몸으로 무부 못지않은 용기를 발휘한 셈이니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칭찬받아야 마땅했다.
“보아하니 짧으면 며칠, 길면 열흘까지 시끄러울 것 같다.”
“주야로 시내를 단속하겠습니다.”
“그래.”
할렌도 이제는 제법 무관 티가 난다. 혈기만 앞세우던 시절은 지난 느낌이다.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서일 것이다. 살라스도 할렌이 여러모로 능숙해졌다고 종종 말을 하곤 했다.
“애는 잘 크나?”
“너무 잘 커서 놀랄 정돕니다. 매일 보는데도 가끔씩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죠. 대장님은 안 그러십니까?”
“글쎄. 한창 클 나이 아닌가.”
보리스는 올해로 여섯 살이 됐다. 아비를 닮았는지 벌써부터 그 나이대의 아이들보다 큰 체구를 가진 꼬마는 이제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어 한다. 부사령관의 자제라는 신분 때문에 도시 바깥의 또래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한 살 어린 할렌의 아들 조셉과 이리저리 쏘다니는 것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별 일…없겠지요?”목이 다 쉴 때까지 꺽꺽거리다 끝내 탈진한 노인을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문득 할렌이 물었다.
‘별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 묻지만,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있다.
물론 할렌은 용감한 군인이고, 전사이지만 동시에 한 여인의 남편이며 한 아이의 아버지다. 지킬 것이 생긴 자는 위험 앞에 움츠러들게 된다.
“글쎄.”
황도로부터 불어온 바람은 이 변경에 벌써 두려움을 심었는가. 바크렌에서 황도까지의 길이 몇 달은 훌쩍 넘으니, 어쩌면 황도에서는 황제의 붕어 이후에 벌어진 혼란도 이미 가라앉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고.
“별 일이 있어봐야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하지만 그런 짐작에도 불구하고 이리 답하는 까닭은, 그 역시 할렌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남편, 두 아이의 아비. 그러니 그 역시 ‘별 일’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았다.
========== 작품 후기 ==========
예약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