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검은 대리석이 빈틈없이 깔린 넓은 복도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줄카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홀로 걸었다. 간간이 벽에 걸린 횃불이 보였으나 불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둥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만이 이유는 아니리라.
철컥! 철컥!갑주의 마디와 군화 등이 맞물리며 규칙적으로 소리를 냈다. 그리 크지는 않은 소리였으나 적막에 잠긴 복도에서 그것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고요를 깨는 파문이었다.
“잠이라도 자고 싶었나?”
줄카의 발걸음이 멎었다. 어둠 속, 거대한 동상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덩어리 하나로 여겼겠지만 줄카는 훤한 대낮처럼 그 자세한 형체까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사내는 검 한 자루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너무도 정적이어서 마치 시체처럼 보이던 그는 줄카의 목소리에 작게 몸을 움직였다.
“…네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나?”
“글쎄. 별로 궁금하지는 않은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야. 넌 항상 그저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굴지.”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늘어진 긴 머리카락이 무릎 높이까지 내려와 흔들렸다. 얇은 코와 턱 선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또 그녀와 밀애(蜜愛)를 나누고 있었소? 내가 방해했나보군.”
빈정거리는 말투에 다시 한 번 사내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가 방금 전보다 더 컸다. 사내의 고개가 더 높이 들렸다.
“종종, 내 검이 네 목을 베어 가르는 환영이 보인다.”
“공교롭군. 난 가끔씩 당신의 그 얇은 모가지를 이 손으로 분지르는 꿈을 꾼다오.”
“피차간에 질긴 명줄, 하나라도 끊어보자고 온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지.”
줄카가 기둥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사내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렘에 또 다시 이백이 들어갔다는 게 사실이오?”
“…그걸 왜 묻지?”
“왜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황제가 들어간 하렘의 문지기를 서는 게 당신이지 않은가. 수호자 나리.”
사내는 키리스트라는 이름 대신 수호자라고 불렸다. 황제의 수호자이자 황가의 수호자라고.
“아무려면 어떻지? 네 그 무식한 검으로 황제의 목이라도 칠 텐가.”
“…….”
키리스트가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여인의 그것처럼 얇은 입술이 비틀린 채 드러났다.
“그래. 사실이다. 이백이 더 들어갔지. 야심한 밤에, 담을 넘는 도둑처럼 은밀하게.”
“미쳤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지. 황제가 미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 않나. 내가 알기로 반백년은 훌쩍 넘었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수도 있고.”
길게 흘러나오는 키리스트의 목소리는 기괴했다. 그의 목소리는 사내라기에는 너무 가늘었으며, 여인이라기에는 너무 거칠고 두꺼웠다.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거슬리는 정도를 넘어 불길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놈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애송아. 애초, 자격 없는 놈이 욕망에 타들어갔을 뿐이다. 약해빠진 평범한 인간 주제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야. 아아, 숭고하기 짝이 없지. 크흐흐.”
연민, 예찬, 조롱이 한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줄카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늙은이?”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키리스트가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처럼 두 손으로 짚고 있던 검은 그의 손아귀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얇은 평복 차림의 호리호리한 체구에 여인보다 더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은 겉으로만 봐서는 사내인지 여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질문 상대를 잘못 찾았군. 난 그냥 지켜볼 뿐이다.”
줄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
짧은 한 마디 속 짙은 혐오를 분명 느꼈으련만, 키리스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아름답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늙은이라는 말 따위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젊은 청년의 그것이었다.
“여전히 어설프군. 이도저도 아닌 잡종. 네가 생각하는 나 이상으로 너는 혐오스럽다.”
“말은 잘 하시는군. 괴물 주제에.”
줄카는 팔짱을 풀고 돌아섰다. 그가 걸음을 내딛기 전, 키리스트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약속하지. 네 목은 내가 베어주마.”
“그거 좋지. 헌데, 목줄을 풀 자신은 있고?”
고개를 돌려 씩 웃어준 줄카가 성큼성큼 걸었다.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한 자그마한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
허수아비 감찰관이 위글로우에 부임해왔다. 그에 따라 바즈쇼어는 그의 가족들과 수행인 몇 명을 대동한 채 쓸쓸히 도시를 떠났다. 그가 떠나던 날, 군터는 겁먹은 개처럼 고개 숙인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즈쇼어, 그의 가족, 수행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상인과 용병들까지. 모두 살마드에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해가 지고 난 후, 수풀이 높이 자란 곳에서 죽어 땅에 묻히거나 짐승의 한 끼 식사가 되겠지.
과연 저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마 오직 한 명, 바즈쇼어만이 어렴풋이 불길함을 느끼고 있으리라. 오랜 시간 부패한 관리로 살아온 자의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쫓겨나듯 떠나는 것이라지만, 저렇게 곧 죽을 사람처럼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마음이 쓰이십니까?”
첨탑 높은 곳에서 떠나가는 행렬을 보고 있으니 살라스가 다가와 물었다. 굳이 볼 필요 없는 것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었나 보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때 잘 나가던 권력자가 처참히 몰락하여 죽을 자리로 찾아들어가는 꼴이지 않은가.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보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로군요.”
“음?”
“트라벤 가문과 하이글렉을 무너뜨린 후로는 처음이지 않습니까.”
“아아, 그래. 그렇군.”
생각해보면 트라벤 가문과 하이글렉을 박살냈던 일이 바즈쇼어를 쳐낸 것보다 더 큰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이글렉과 그의 가문은 그 몸집에 비해서는 너무 쉽게 무너진 감이 있었다. 머리인 돼지 녀석이 어리석었던 탓에 말이다.
반면, 바즈쇼어 같은 경우는 하이글렉처럼 어리석지는 않아 제법 오래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처음 사령관과 손을 잡았을 때부터…아니, 사령관이 리에론 가문과 통혼의 연을 맺은 순간부터 이미 그 자의 운명은 결정되었던 것인가.’
불운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막시밀리언이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막시밀리언과 얽히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살려서 보내기에는 바즈쇼어는 알고 있는 일이 너무 많고, 무엇보다 이미 막시밀리언과 척을 지려 한 전적이 있다. 비록 미끼에 불과했을지라도 말이다. 막시밀리언은 결코 후환의 싹을 남겨두는 말랑말랑한 사내가 아니다.
“병력을 증강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이다.”
“사령관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금광으로 인해 눈길을 받고 있는 판국인데 말입니다.”
감찰관이 바뀐 이상, 공식적으로 위글로우와 막시밀리언을 감시하는 눈은 사라진 셈이다. 비공식적으로 깔린 눈들만 치우거나 제어할 수 있다면 위글로우에서 막시밀리언이 무슨 일을 벌이든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
자유를 얻은 막시밀리언은 가장 먼저 병력 확충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막시밀리언은 살마드에 병력 확충을 건의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가 실행할 병력 확충이 비공식적인 일이 된다는 뜻이니,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 트집 잡히기 딱 좋은 일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별 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사로이 병력을 꾸린다는 것이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또 아니다. 어차피 위글로우 뿐만 아니라 지방의 유지란 자들은 저마다 사병 얼마씩은 가지고 있으니, 이번에 확충할 병력 역시 그런 식으로 잘 감춰놓으면 될 일이다. 수 년 간 미겔과 그의 수하들을 부렸던 방식과 비슷하게 말이다. 사령관인 막시밀리언과, 그 휘하의 관리들이 눈을 감거나 오히려 나서서 은폐한다면 병력 수백 정도를 구성한다 한들 누가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뭘 위해서?’
막시밀리언은 리에론에게건, 아그니스 체스퍼에게건, 다른 그 어떤 자에게건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힘이라는 것이 자칫 반역의 혐의를 덮어쓸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어야 하는가.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뭐, 어쩌면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의문을 가슴에 묻은 그날의 늦은 저녁. 막시밀리언은 그의 수하들의 소집했다. 그리고 그의 청사진을 꺼내놓았다.
“다들 생각이 많을 줄로 안다. 걱정스럽겠지. 내가 왜 굳이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려는지 궁금하기도 했을 게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표정변화가 전무한 이는 오직 위벨뿐이었다. 그는 사전에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무엇을 짐작했는지 막시밀리언의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했다.
“간단히 이야기하지. 난 이 위글로우에 장사치들을 위한 터전을 만들어줄 생각이다.”
막시밀리언은 당황하고,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입을 떼기 전에 말을 이었다.
“전쟁이 멈춘 이후, 귀금속의 값어치가 계속 뛰었지. 덕분에 우리는 크게 득을 보았어.”
그렇다. 막시밀리언이 리에론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어찌 보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 잘 알겠지.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아는가?”
통통한 관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북쪽의 흰 땅에서 넘어온 물자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북쪽의 흰 땅. 다르게는 녹지 않는 땅이라고도 불리는 갈색초원 너머 불모의 대지에는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물자들이 존재한다. 가진 자들이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하는 사치품들이.
“그래. 그렇지. 하지만 완전한, 내가 원한 답은 아니야.”
이번에는 통통한 관리도 답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위벨이 대신 답을 했다.
“암상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자들이 흰 땅의 물자를 들여오고, 돈을 움직이지요.”
“그래. 맞다.”
막시밀리언이 씩 웃으며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한 곳을 짚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 위글로우였다.
“정부에 인정받지 못해 암상이다. 관에 발각되면 목이 달아나는 그들이 재물 다음으로 원하는 것은 안전이지.”
위글로우의 위치는 애매하다. 반으로 쪼개진 바크렌을 놓고 봐도 그렇다.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땅이 비옥한 것도 아니며,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보는 눈을 조금 달리하면 어떤가. 전선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 근방이 삼엄하지 않고, 지방정부의 손길이 크게 닿는 곳도 아니다. 최단거리는 아니지만, 조금 우회한다면 북쪽과 남쪽을 오가는 이들에게 썩 괜찮은 경유지가 될 수도 있지.”
거기까지 말이 이어졌을 때는 이제 모든 이들이 얼굴에서 의문을 지웠다.
“위글로우는 그들에게 안전을 제공할 것이고, 그들은 위글로우에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막시밀리언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컴퓨터의 상대가 시시각각 악화되어감에 따라 독자분들의 추천대로 내일 메인보드 전지를 한 번 손보러 가려 합니다. 부디 잘 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