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술법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다. 모르는 자들의 눈에는 불이나 물, 흙을 부리는 술사들의 모습이 신과 같이 보이고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모두 기적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술사들이 술법을 부리기 위해서는 술력이 필요하며, 술력이 있다 해도 술법을 발현하기 위한 매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불의 술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의 기운(火氣)이 있어야 한다. 기석이라면 더욱 좋고 하다못해 작은 불씨 하나라도 있어야 그것을 키워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흙의 술법, 흔히 땅의 술법이라 부르는 종류는 범용성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곳이든 발 디딘 땅에는 흙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보통 술사들은 그래서 술법을 사용하기 위한 매개체를 상시 소지합니다. 기석을 끼워 넣은 지팡이라든가, 반지나 팔찌 같은 장신구라든가…뭐, 그런 것들도 법구라면 법구지요.”
“너는 그렇지 않지 않나.”
“제가 특이한 것입니다. 땅의 술법은 그런 것이 필요치 않으니까요.”
불을 피울 때도 도구가 필요하다. 아무 것도 없는 맨손으로 어찌 불을 만들겠는가. 기석은 불씨의 역할이다. 그 자그마한 불씨를 술력이라는 바람을 통해 키워내는 것이다.
“그럼 나도 사령술을 쓰기 위해서는 사기석을 지녀야 하는 건가.”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기석보다 더 훌륭한 매개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음?”
모페이브가 군터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긴 검창을 가리켰다.
“그 창. 칸젤 말입니다. 죽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그 창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매개가 아니겠습니까.”
모페이브의 말에 군터는 칸젤을 움켜잡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칸젤에는 불길한 기운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껏 칸젤로 숨통을 끊은 적의 수가 얼마던가. 뿐인가? 칸젤의 영성을 탄생시킨 바칼의 잔재는 피먹이의 술법을 기괴하게 뒤틀어 놓았다. 덕분에 칸젤의 시리도록 날카로운 창날에는 삶과 죽음이 혼탁하게 어우러져 있다. 모페이브의 말처럼 사령술의 매개로 이 이상 가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변명거리야 고민할 필요도없이 바로 댈 수 있다. 칸젤과 그는 이제 한 몸과 같아, 칸젤이 품은 강렬한 기운마저도 그저 머리에서 자란 내려온 머리카락처럼 당연히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칸젤을 감싼 진득한 사기를 느끼십시오. 그 창으로 적의 목숨을 거두시는 한, 매개로서의 수명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개로 쓰이는 기석은 수명이 있다. 아무리 불을 지피는 불씨로만 사용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기석이 품고 있는 기운의 양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세한 양이라도 계속해서 기운이 빠져나가면 기석도 언젠가는 그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 수명은 얼마나 술법을 자주, 강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무엇보다 기석의 질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5년 정도면 수명을 다한다.
“이런 말씀드리는 것도 참 새삼스럽지만, 대장님의 칸젤은 실로 귀물입니다. 어지간한 법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어쩌면 법보에 준하는 수준의.”
어지간한 법구만 해도 묵직한 금덩이 몇 개로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다. 하물며 법보는 말할 것도 없다. 법보는 아니라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의 귀물도 재물이 있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행스럽게도 대장님의 창은 그 가치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볼 줄 아는 자들은 그 가치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것이니, 부디 조심하시길.”“덤벼드는 놈들은 목을 베면 그만이다.”
“파비우스 리에론이라도 말입니까?”
“…….”
답하지 못한 군터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주제넘은 조언이었습니까?”
“아니. 좋은 조언이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문제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무언가를 빼앗긴다는 것은, 초원에서 살던 어렸을 적 이후로는 영 낯선 것이었으니까. 이전에도 몇 번씩 귀물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늘 한 몸처럼 지니고 다닌 칸젤을 누군가가 탐을 낼 거라 생각지도 못했었고.
“그나저나…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마님께서 조금 달라지셨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음?”
“전에도 미트라스 부인과는 가끔씩 어울리셨습니다만, 그 빈도가 요즘 들어 상당히 잦아지셨습니다. 다른 부인들도 만나시고 말입니다.”
“그런가.”
벨리사가 요즘 ‘고상한 귀부인 되기’에 나름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여인네들과도 전과 달리 어느 정도 활발하게 어울리고 있는 모양이다.
“좀처럼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변하셔서 말입니다. 의욕적이신 것 같습니다만, 무슨 계기라도 있으셨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아무래도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세심한 집사로군.”
“별 말씀을.”
“벨리사가 귀부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좋은 일이군요.”
“……?”
“여인들이 주도하는 사교계에서 이뤄지는 정치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습니다. 사내를 움직이는 것은 여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마냥 처지 좋은 여인들의 놀이터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웃기는 소리군.”
“그간 마님께서는 지위에 비해 너무도 소극적이셨습니다.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요.”
“뭐가 되었든, 난 벨리사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 것이다. 자네도 그리 알고 있게.”
“예.”
*
사내들에겐 사내들의 세계가 있듯, 여인들에게는 여인들의 세계가 있다. 특히 귀부인이라 불릴 만큼 힘 있는 집안의 안주인이나 여식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모르는 이들이 보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한 파티장에서 그들만의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오랫동안 잠잠하던 위글로우의 사교계에 새로운 여왕이 나타났다. 기존에 사교계의 주인으로 통하던 올리네이스 부인, 리루는 강력한 경쟁자를 맞이했다.
이번에 사령관 부인이 된 리에론의 여식, 카트리나 리에론이 바로 그 경쟁자다. 위글로우에 온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무렵, 카트리나 리에론은 사령관저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위글로우에 온 뒤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던 모든 이들은 이제껏 평화롭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하던 위글로우의 사교계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아름다우시군요. 군터 부인.”
“아닙니다. 부인이야말로…….”
카트리나 리에론은 눈 앞의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여인은 고개를 찻잔으로 내린 채 시선을 피했다. 단순히 그녀의 신분에 눌렸다고 보기에는 그 반응이 과하다.
‘눈도 못 마주치는군.’
벨리사. 부사령관 군터의 아내. 미리 알아보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들은 것보다도 더 소심한 여자가 아닌가. 분명 그녀의 나이가 자신보다 더 많을 것인데도, 카트리나 리에론은 벨리사를 보며 귀엽다고 느꼈다. 양 검지를 붙였다 뗐다 하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조금 더 일찍 청했어야 하는데,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미안하다니…….”
“저, 가문을 떠난 것이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정신이 없었어요. 낯선 곳에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그녀가 말끝을 흐리니 벨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응?’
카트리나 리에론은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당황했냐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을 정도다. 그만큼 그녀는 벨리사의 눈빛에 놀랐다. 그녀를 바라보는 벨리사의 시선, 그 안에 깃든 감정은 분명 측은함이었다.
‘연기인가?’
그럴 리가 없다. 리에론 가의 여인으로 태어나 이제껏 자라오면서 온갖 눈치 싸움에 이골이 난 그녀다. 나이는 어릴지언정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그녀의 눈썰미는 칼 같이 예리하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지금 벨리사의 표정과 눈빛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지?’
그녀가 보아온 여인들은 모두 속에 뱀 한 마리씩은 기르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은 거짓말을 가리는 도구였고, 때때로 흘리는 눈물은 사내를 홀리며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무기이며 기술이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서투르고, 나이가 많을수록 교묘한 차이만이 있을 뿐 그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벨리사라는 여자는…뭐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아.’
만약 이게 연기라면 이 벨리사라는 여인은 실로 무서운 독사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을 품어보려고 해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부인.”
“예.”
“이틀 뒤에 제가 파티를 연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어요.”
“저는 그 파티에서 부인과 함께 입장하고 싶습니다.”
“네에?”
벨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올리네이스 가문에서 열렸던 파티 이후로 그녀는 두 번의 파티에 더 참석했다. 그 사이에 많은 귀부인들과도 어울렸다. 덕분에 이제 그녀는 사교계라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상태였다.
지금 카트리나 리에론이 말한, 파티에 함께 입장하자 함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은 그녀가 여는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뜻이고, 둘째로는 이번 파티를 통해 확고히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뜻이다.
보통 파티를 여는 주최자는 미리 파티장에 자리를 잡고 파티에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곤 한다. 하지만 카트리나 리에론은 파티에 같이 입장하자고 했다. 미리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손님들이 다 와서 그녀를 기다리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뜻. 이는 자신의 위세를 한껏 뽐내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되는 건가?’
벨리사는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카트리나 리에론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위글로우를 다스리는 사령관의 부인이면서, 리에론 가문의 여인이니까.
그러니 그녀에게는 자격이 있다. 하지만 자격이 있다 하여 아무렇지 않게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그녀의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불쾌감을 줄 터였다. 예를 들면 이제껏 위글로우 사교계의 주인이었던 올리네이스의 귀부인 말이다.
‘만약 내가 사령관 부인과 함께 이번 파티에 입장하게 되면…….’
마지막 한 가지 의미. 그것은 이 제안을 수락할 경우, 그녀는 카트리나 리에론의 무리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올리네이스 부인과는 척을 지게 될 확률이 높다.
“어때요 부인? 이번 파티, 저와 함께 입장해주시겠어요?”
벨리사는 잠시 고운 입술을 달싹였다.
“…네. 그럴게요. 부인.”
자그맣게 흘러나온 대답에 카트리나 리에론의 입매가 아름답게 호선을 그렸다.
========== 작품 후기 ==========
간만의 칼연재입니다.
오늘 컴퓨터를 켰는데 컴퓨터 시간이 갑자기 2035년으로 점프했네요... 인터넷 접속했는데 기간이 너무 오래 되었다나? 이상한 팝업이 떠서 알았습니다. 정말 수명이 다해가는 건지...
아이오네님 지적 감사합니다. 이전에 카트리나의 이름을 잘못 적은 것을 수정했습니다. 카트리나 리에론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