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카트리나 리에론. 그녀는 사실 리에론의 여식이기는 하지만 가문 내에서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의 아비는 전대 가주의 자식이며, 현 가주에게 나름대로 총애를 받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무리 가주의 총애를 받는다한들, 그녀의 아비가 쥘 수 있는 권한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권력을 쥔 가문에서 피를 나눈 형제란 애틋함의 대상 보다는 견제와 불안의 대상인 법. 그것은 그녀의 아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주가 개인적으로 총애를 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녀는 진열장 안에 든 상품이었으며, 새장에 갇힌 새였다. 그녀를 소유한 가문이 원할 때 가문이 원하는 상대에게 팔려 갈 운명이었다. 마침내 때는 왔고, 그녀는 위글로우라는 작은 도시의 사령관의 여자가 되었다.
기다림은 끝났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카트리나 리에론은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인생을 소비하는 멍청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오. 간밤에 잠은 잘 잤소? 피로는 좀 풀렸는지 모르겠군.”
“배려해주신 덕분에.”
빈 말이 아니다. 정말로 푹 잤다. 하지만 피로가 다 풀리지는 않았는지 몸이 무거웠다. 그래도 카트리나 리에론은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제법 푸짐한 요리들이 큼직한 식탁 위에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나름대로 차린다고 했지만, 리에론 가문에서 먹던 것에는 부족할 거요. 이해하시오.”
“부족하지 않습니다. 리에론이라고 해봐야 저는 방계니까요.”
스스로 말하기 껄끄럽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막시밀리언은 은은하게 웃었다.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자, 드십시다.”
처음에 카트리나 리에론은 우려가 많았다.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막시밀리언이라는 사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후에 나름대로 사람을 시켜 알아본 결과도 상가의 자식으로 무관이 되어 전공을 세워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가문도 무가이기는 하나 군인인 사내, 그것도 귀족도 아닌 자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막연한 인상이란 좋게 말해 거칠고 예의를 모르는…나쁘게 말하면 무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막시밀리언은 여느 귀족가의 사내 못지않게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자였다. 그는 여인을 대할 때 깍듯이 예의를 차렸으며, 살마드에서부터 위글로우에 오기까지 한 번도 눈살 찌푸릴 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흘러갔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곧 헤어졌다. 막시밀리언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관청으로 향했고 카트리나 리에론은 그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아가씨.”
“그래.”
식사는 잘 했건만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얼굴을 보니 잘 먹은 음식이 속에서 얹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반백에 가까운,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걸친 것 같은 사내는 살마드의 가문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온 집사였다. 하지만 정작 가문에 있을 당시에는 면식이 없던 자로, ‘리에론’에서 그녀에게 딸려 보낸 자였다.
“사령관이야 아가씨를 위해 최선을 다 할 테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시골 도시의 한계가 있겠지요. 가문에서 지내실 때보다 많은 것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선생처럼 굴 필요 없네.”
“제가 괜한 말을…용서하시길.”
사과하는 말이나 고개 숙이는 몸짓에서 감정은 비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내는 수십 년 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리에론의 인형으로서.
“오늘 밤에 가문으로 서신을 보낼 예정입니다.”
“알았다. 준비하지.”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건만 벌써 서신이라니. 과하다 생각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앞에 서 있는 사내도 그렇고, 이곳엔 그녀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깔린 가문의 눈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가 다 알지 못할 만큼.
‘이곳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건가.’
괜히 우울해지는 마음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 원형 탁자 위에 몇 장의 종이가 올라왔다.
“이곳의 유력자들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런 것은 가문에 있을 때도 봤었는데.”
“대략적인 것이었지요. 보완된 것입니다. 보다 세세한 내용까지 적혀 있으니 되도록 빨리 숙지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지.”
“그럼, 편히 쉬십시오.”
‘편히 쉬라고?’
요 며칠 동안 들었던 것들 중에 제일 웃긴 농담이다. 어쨌거나 비로소 혼자가 된 그녀는 하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탁자 위의 종이를 집었다.
‘그리몰드 가의 유론. 올리네이스 가의 히링.’
몰락한 귀족 가문의 가주들. 오랫동안 위글로우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유지들이자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 된 막시밀리언과 함께 금광 채굴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
‘확실히…이들은 알아둘 필요가 있지.’
살마드에서도 이들에 대한 내용은 종이가 닳도록 봤다. 지금 새로 받은 보고서에도 딱히 새로운 것은 없다. 기껏해야 근래에 들어 막시밀리언에게 고분고분해졌다는 정도?
‘우리 가문의 아래에 들기로 한 거겠지.’
막시밀리언이 리에론과 통혼으로 묶였으니 이제는 그의 뒤에 리에론이 있는 셈이다. 그런 이에게 시골의 유지들이 어찌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 있을까. 고분고분해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군터. 미트라스.’
미트라스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위글로우의 경계까지 병사들을 이끌고 온 천인장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 역시 나름 이 도시의 유지 출신으로서, 막시밀리언의 부임 초기에 그와 대립각을 세웠던 유론이나 히링과는 달리 일찍부터 그를 섬겼다고 한다. 위글로우 군부의 3인자이며, 며칠 본 인상으로는 어느 정도 예를 아는 무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군터.
‘특이한 자 같았다.’
어제 처음, 잠깐 봤을 뿐이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자다. 말단 병졸로 시작해 천인장, 도시의 부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사내다. 막시밀리언이 군문에 들어왔을 당시부터 그와 함께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참혹했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실력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때문인지 막시밀리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우직한 군인으로 보였는데…어쨌든 이 자도 신경 써야겠지.’
그녀는 신중하게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무수한 이름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
막시밀리언은 관저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창밖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쥐새끼들이 바쁘게 움직였다고 합니다.”
“부지런하군. 쥐새끼도 명문가의 쥐새끼라 그런지 참 남달라.”
태연한 대꾸에 코르넬이 쓴웃음을 지었다.
“리에론 정도 되는 가문이라고 하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순진하군 코르넬. 나와 함께 한 세월이 있는데도 여전히 순진해. 내가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번엔 막시밀리언이 웃었다. 그는 입에 넣은 두툼한 고기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쪽은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치른 혼인에 무슨 예의가 있겠나. 애초에 신뢰를 말하기에는 뭐한 사소한 일이기도 하고.”
“하오나…이건 숫제 집에 도둑고양이를 들인 셈이 아닙니까.”
“내 아내를 도둑고양이로 취급하는 건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아니야. 자네 말이 맞아. 그녀와…그녀를 따라 온 자들은 리에론의 눈이지. 나를 감시하기 위한.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감수했다네.”
이 또한 주고받는 내용 중에 포함된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막시밀리언은 지금쯤 열심히 말을 달리고 있을 쥐새끼나, 그 쥐새끼들을 움직인 감시자들이 다소 거북하기는 할지언정 불쾌하지는 않았다.
“간단한 문제야. 보여줄 것은 보여주고, 감출 것은 감추면 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쥐들을 관리하는데 각별히 신경 써야겠지.”
“감찰대장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야.”
“하여 군터에게도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지금 이렇게 안심이 되는 이유다. 한동안 그런 쪽의 일에서 손을 뗀 군터의 부하들이지만, 그렇다고 그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군터와 그의 부하들은 막시밀리언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냥꾼들이다.
“그러고 보니 미겔 녀석도 정식으로 임명해야겠군.”
“도적 주제에 출세했군요.”
“흥. 혹여 다른 곳에서 내색하지는 말게. 과거야 어찌 되었든 이제는 그 녀석도 나를 섬기고 있거늘,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코르넬도 무슨 악의가 있거나 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역시 미겔이 그동안 막시밀리언을 위해 음지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귀가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당분간은 그래야 하지 않겠나? 어쨌거나 신혼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를 본 코르넬의 얼굴도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
그어어어…….
꺼져 있던 두 눈이 어두운 빛을 발했다. 널브러져 있던 시체가 스스로 두 팔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수분이 대거 빠져나가 왜소해 보이는 몸뚱이가 악취를 풍기며 비틀거렸다.
“성공이군.”
“예. 성공입니다.”
군터는 본래 감정표현이 후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가 감정을 드러낼 때는 벨리사와 있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면 살라스나 할렌 같이 오랜 수하들과 함께 있을 때 정도였다.
“드디어 해냈군.”
그러나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런 그조차 들뜨는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토악질 나오게 생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망자의 면상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털썩!
그랬기에 비틀거리며 선 망자가 힘없이 도로 쓰러졌을 때, 그는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상한 대로군요.”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실패한 건가?”
“아닙니다. 성공은 성공이되…불완전하다는 뜻이지요.”
모페이브의 설명은 이랬다.
그간 그는 칸젤의 간섭으로 인해 술력을 밖으로 뻗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간섭이 헐거워져 술수를 부릴 수 있을 만큼은 술력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칸젤의 간섭은 약해졌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일단 술법을 성공시킨 다음에 그 유지를 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 망자를 일으키는 술법은 일단 일으킨 다음에도 빙의 상태를 유지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칸젤의 간섭 때문에 술력의 선이 끊어지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시일이 지나면 언젠가는 칸젤의 간섭이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너무 막연하지요.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단발성 술법 위주로 가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단발성?”
“유지가 필요 없는, 한 번 사용하고 나서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잠을 잘못 잤는지 목이 뻐근하네요... 아마 많이들 주무시고 계시겠지만 굿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