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76화 (176/1,064)

<-- 2부 -->

올리네이스 가문은 한때 3대 가문이라 일컬어졌다. 위글로우의 모든 이들이 그 이름 앞에 고개를 조아렸고, 어떻게든 그들과 연을 맺고 싶어 하거나 하다못해 밉보이지 않으려 발을 동동 구를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 그들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3이란 숫자에서 하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2대 가문으로 남은 그들은 여전히 위글로우의 최고 권력가였으니까. 하지만 예전의 그들이 무소불위였다면, 지금은 한 계단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가 생겼다. 곧 리에론 가의 사위가 될, 어쩌면 지금쯤 됐을지도 모르는 젊은 사령관 말이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대로, 그들의 위세는 예전만 못할지언정 여전히 대단했다. 그것은 해가 진 초저녁부터 거대한 저택 앞에 득시글거리는 마차를 통해 드러났다.

“어서 오십시오. 미트라스 부인. 그리고…….”

“부사령관 부인이시네.”

“아!”

외관에서부터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년인이 황망히, 아니 그런 모습을 드러내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벨리사는 그가 진심으로 당황한 게 아니란 것을 알았으나, 그럼에도 몸을 숙이는 그의 모습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멋들어진 중년의 집사를 보며 그의 정중함에 웃음 지을 것이다.

하지만 벨리사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노예로 지내던 시절,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았다. 그녀를 찾는 사내들이 다 그런 의도로 오는 자들인 만큼, 대부분은 바깥에서 차리던 모습 따위는 다 내팽개치고 처음부터 추악한 욕망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간혹, 신사인 양 부드러운 얼굴과 목소리로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여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바라며, 흡사 애인이 된 것 같이 사근사근하게 몸을 내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자들은 얼굴에 가면을 쓴다. 지금 눈앞의 집사처럼.

벨리사는 가면을 쓴 이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경험했던 바로 가면을 쓴 이들은 아예 체면을 버린 이들보다 더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도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가면을 부수고 그 파편으로 상대의 살을 찍어버리는 이들이었다.

“고귀하신 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벌써부터 돌리고 싶은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엘리는 벨리사의 앞에서 여유롭게 길을 열었다.

“어머! 미트라스 부인.”

“오랜만에 뵙네요.”

화려하게 장식된 넓은 홀에는 이미 저마다 한껏 치장한 귀부인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녀들 중 일부는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엘리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다들 인사하세요. 이쪽은 부사령관 부인이십니다.”

“어머!”

뒤편의 벨리사를 보며 누구냐는 시선을 던졌을 때, 적당히 뜸을 들이던 엘리가 벨리사를 소개했다. 그러자 몰려온 귀부인들은 하나 같이 토끼 눈이 되어서는 우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 벨리사도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로 답했다.

너덧 남짓한 귀부인들은 벨리사를 포위하듯 둘러싸고는 신나게 재잘거렸다. 그 내용은 주로 왜 그간 사교계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에 벨리사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엘리의 도움을 받으니 끝도 없이 따라올 것 같았던 여인들도 곧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신없으시죠? 호호.”

“예…조금 그러네요.”

“다들 부인을 뵌 게 기뻐서 그런 거랍니다. 저들은 모두 무관의 안사람들이거든요.”

위글로우에서 사교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규모 있는 파티에서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상가의 부인이라면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는 상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하고, 거기에 더해 어느 정도의 연줄도 필요하다. 그리고 관료의 아내라면 남편이 일정 직위 이상이어야 한다. 무관 쪽을 들자면 최소 백인장급. 그것도 그냥 백인장이어서는 안 된다. 백인장 중에서도 군부 내 입지가 있는 자여야만 한다. 방금 엘리를 보고 몰려왔던 여인들도 그런 경우였다. 허나 그들은 파티장에 발을 디딜 자격만을 부여받았을 뿐, 이곳에서 그녀들은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때문에 그녀들은 자신들을 대변해줄 수 있는 이를 갈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역할은 엘리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렇군요.”

자세한 사정을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벨리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자. 이쪽이에요.”

엘리는 벨리사를 데리고 홀의 중앙 한복판을 지났다. 그쯤 되었을 때, 모든 귀부인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집중 되었다. 그 시선들에 벨리사는 긴장하여 얇은 장갑 낀 손을 꽉 쥐었다. 엘리를 따라붙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올리네이스 부인.”

“미트라스 부인. 반가워요. 제 파티에 와 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광이 나는 것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눈길을 붙드는 여인이었다. 다른 귀부인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엘리의 정중한 인사를 받고서 마찬가지로 정중하고 우아한 인사로 화답했다.

“이쪽은 부사령관 부인이십니다. 부인. 이쪽은 올리네이스 부인이세요. 이 아름다운 파티의 주인이시기도 하죠.”

며칠 전부터 엘리로부터 파티장에서의 격식에 대해 충분히 배운 덕에 벨리사는 어색한 마음으로나마 올리네이스 부인과 우아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아! 부인께서는 지금 제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실 거예요.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서신을 받고서도 정말 오실까 마음을 졸였답니다.”

그간 벨리사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냈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초대장이 왔지만 벨리사는 그때마다 정중한 거절의 답신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청하는 초대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초대에 응하고 응하지 않고는 그녀의 자유이나, 그녀를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무례이면서 나아가 그녀의 남편인 군터에 대한 무례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그녀만의 일이 아니었다. 유력가의 부인들은 모두 같은 처지(?)였다. 파티를 여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참고하는 명부의 상위에 위치한 이름들은 초대를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부인께서 오신다기에 평소보다 더 각별히 신경을 썼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올리네이스 부인. 자신을 이름을 리루라고 소개한 귀부인은 이제껏 벨리사가 보았던 그 어떤 귀부인과도 달랐다. 올리네이스의 안주인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일지는 모르나, 그녀는 얼굴 표정부터 말투, 자잘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기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하다못해 간단한 인사말마저도 그녀가 하는 말은 무언가 달랐다. 벨리사는 그녀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만약 적절한 때에 엘리가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바보처럼 가만히 서서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 대꾸나 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올리네이스 부인은 위글로우 사교계의 주인이랍니다. 그리몰드 부인도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께서는 나이가 지긋하시거든요. 때문에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쪽은 아무래도 올리네이스 부인 쪽이죠. 다른 부인들도 그리몰드 부인의 파티는 뭔가 숨 막히는 느낌이라고 기피하고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라는 게 그런 데서도 드러나거든요.”

엘리가 잔잔히 웃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벨리사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답하기만 할 뿐, 살짝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

“슬슬 사령관을 마중 나가야 할 것 같네.”

“아아. 시간 참 빠르군요.”

미트라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같은 천인장에, 나이도 더 많고 경력도 오래 된 그가 군터에게 말을 높이는 것이 어색해 보였으나 군터는 천인장이라는 직위 외에도 부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있는 만큼 두 사람의 지위는 고하가 확실히 나뉘니 그가 존대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철저히 준비하라 하시는군.”

군터는 다 본 서신을 미트라스에게 넘겼다. 빠르게 서신을 훑은 미트라스가 껄껄 웃었다.

“아직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막시밀리언은 서신에서 미트라스로 하여금 오백 군졸을 이끌고 나올 것을 명했다. 천인장인 미트라스가 움직이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막시밀리언이 직접 살마드로 데리고 간 병력이 적지 않은데 거기에 다시 오백을 끌고 오라는 것은 틀림없이 굉장히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동원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막시밀리언이 그것 하나 생각하지 못했을 리 만무.

“잘난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잘난 집안을 처가로 둔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군요.”

이것은 일종의 과시다. 막시밀리언은 그와 함께 오는 그의 부인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시시한 도시에서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는 시시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 함이다. 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꽤나 유치한 짓 같지만…….

“사령관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아내이지, 그분께서 리에론의 사위가 될 생각은 없으시다는 거겠지요.”

위벨이 말했다. 동시에 미트라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아마 당분간은 고달플 겁니다. 사령관 부인께서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분은 그분의 의무를 다하려 할 테니까요. 저희는 사령관의 위신을 세워드려야 합니다.”

“어렵지 않지. 내 병사들 여럿을 시켜 뿔 나팔을 불게 함세.”“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합니다. 그저 날이 잘 선 군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내 명심하겠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군터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미트라스가 붙들었다.

“제 안사람이 부인과 함께 올리네이스 부인의 파티에 간다 하더군요. 혹여 제 안사람이 부인께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게.”

시끄러운 여인이 성화를 부린 것은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벨리사 본인이 원치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군터는 벨리사가 색다른 경험을 하고서 즐거운 얼굴로 돌아오리라 기대했다.

========== 작품 후기 ==========

독자분들의 조언에 따라 일차적으로 컴퓨터를 분해 후 청소, 그 후에 메인보드와 파워를 살펴보려 했으나... 왠지 한 번 분해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보류했습니다. 컴퓨터 기사님을 한 번 불러볼 참입니다...

조언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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