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그런 하늘에 떠다니는 몇 점 구름은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깨끗했다.
하지만 벨리사는 그렇게나 좋은 날을 제대로 즐겨볼 새도,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미트라스 부인, 엘리가 있었다.
“이거 어때요? 부인과 딱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가요?”
옷을 사는 것은 벨리사였는데 어째 들뜬 것은 엘리였다. 그녀는 마치 그녀 자신의 옷을 고르는 것처럼 한껏 신이 나서는 벨리사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으로 이끌었다.
“위글로우에 파티용 드레스를 취급하는 곳은 네 곳뿐이에요. 아무래도 이런 옷은 찾는 이들이 정해져 있다 보니 수요가 그리 많지는 않거든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벨리사는 최대로 잡아도 네 곳만 들리면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드레스를 취급하는 곳은 단 네 곳뿐이라지만, 한 곳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어마어마했다. 엘리는 판매하는 모든 드레스를 다 확인할 기세였다.
“이거랑 이거. 아! 저것도 괜찮네. 차례대로 들고 와 주게.”
“예. 부인.”
외관부터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한 달에 두어 번 씩 살마드로 상행을 나서는, 꽤나 규모 있는 상단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의 종업원들은 잘 훈련된 귀족 가의 하인처럼 능숙하면서도 격식 있게 그들을 상대했다.
“미트라스 부인. 드레스를 맞추시려고요?”
“아니요. 제가 아니라 이쪽, 군터 부인께서 맞추실 거예요. 저는 도와드리려고 온 거고요.”
드레스를 보던 중에 몇 명의 귀부인들을 만났다. 엘리와 그녀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엘리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그들과 벨리사를 인사시켜주었다. 엘리와 함께 있는 벨리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그들은 ‘군터 부인’이라는 소개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 군터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벨리사는 어색한 속내를 최대한 감추며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일 터인데, 어째서인지 그들은 좀처럼 대화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엘리가 적절히 나서서 끊지 않았다면 그들은 언제까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 물러간 후, 벨리사는 땀도 흐르지 않는 이마를 괜히 손등으로 훑었다.
“후우. 다들 활발하시네요.”
“극성이죠? 그렇지만 부인께서 워낙 유명인이시니까요.”
“제가요?”
“그럼요. 부사령관의 부인이신데. 어떻게 안 유명하시겠어요? 게다가 부사령관께서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하시기도 하니까…….”
그런 와중에 벨리사는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으니, 그녀에 대한 말은 늘 남 이야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의 화젯거리였다. 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가끔씩은 벨리사에 대한 이상한 소문도 돌곤 했다. 물론 그런 소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감히 부사령관의 아내를 두고 안 좋은 이야기를 대놓고 나불거릴 배짱 있는 여인네도 없었고, 벨리사와 연이 닿은 유일한 귀부인인 엘리가 그런 소문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위글로우의 사교계에서 사령관의 측근이자 천인장인 미트라스를 남편으로 둔 그녀에게 감히 뻗댈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그리몰드나 올리네이스의 안주인들이겠지만, 사령관과 두 가주의 사이가 원만해진 이후로는 그녀들도 엘리로 대변되는 사령관측 귀부인들과 좋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번에 부인께서 파티에 나가시면 모두들 깜짝 놀랄 거예요.”
“그건 좀…부담스러운데요.”
“부담은요. 그냥 즐기시면 돼요. 부인께서 주인공인 파티가 될 테니까요. 물론 익숙하지 않으셔서 어색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지체 높은 귀부인답지 않게 어수룩한 벨리사다. 웃음 뒤에 칼을 감추고 뱀처럼 혀를 놀리는 교활한 여인네들과는 전혀 다르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신분은 저 콧대 높은 양 가문(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의 귀부인들에 뒤지지 않는다. 위글로우의 정점은 사령관이고, 그의 최측근이자 위글로우의 2인자가 바로 그녀의 남편이니까 말이다.
‘참 신기한 일이지.’
하지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녀에 대해 떠돌았던 소문들 중 그녀가 천한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소문을 잠재운 엘리 본인도 벨리사의 출신이 천민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인 부사령관부터가 아쿼러즈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언제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한미한 출신들끼리 만나 이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두 사람의 신분을 가지고 입을 놀려댈 간 큰 이들은 없겠지만, 뒤돌아서서 구시렁댈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본래 시시한 자들일수록 어떻게든 남을 긁으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정말 곱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벨리사를 보며 엘리는 눈을 빛냈다. 가만히 서면 차분해 보이지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매끈한 종아리가 드러나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 좋은데요?”
“그, 그런가요?”
미리 맞춰둔 양 착 달라붙는 옷과는 달리 벨리사의 표정은 영 어색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보기에는 좋아도 입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나 불편한 옷이었던 것이다. 특히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조여 오는 압박감은 아찔하기까지 했다.
“불편하신가요?”
“예. 조금…그러네요.”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그녀를 보는 엘리의 표정은, 마치 ‘내가 네 마음 다 알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조금이요?”
“…조금 많이요.”
“숨 쉬기가 힘드시죠? 처음이라 그래요.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편해지나요?”“그건 아니고…그냥 견딜 만은 해진다는 거죠.”
엘리가 어색하게 웃고, 벨리사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왜 이런 불편한 옷을 입는 거죠?”
“예뻐 보이니까요. 남자들은 이런 옷을 좋아한답니다.”
“남자들이요?”
“예. 파티에는 사내들도 꽤 오거든요.”
“네에?”
벨리사가 토끼눈이 되어 고개를 들자 엘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가끔씩 남편과 함께 오는 부인들도 있기는 한데, 대부분 들러리랍니다. 파티장에 예쁘게 치장하고 나오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을 칭찬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기껏해야 간단한 춤이나 추는 정도지요. 부인들 중에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몇 번이나 춤 신청을 받았는지를 따지는 분들도 있을 정도예요.”
“그런가요? 저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이번에 파티에 가시면 부인께도 춤 신청이 밀려들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사내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부인과 춤을 추려고 줄을 설걸요?”
벨리사는 아름답다. 그리고 젊다. 지금 입은 그대로 파티장에 들어선다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거기에 신분까지 높으니, 자신의 매력에 자신이 있는 하찮은 사내들이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웃음을 팔 리라는 것을 엘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신분이 신분이니 만큼 대놓고 들이대지는 못하겠지. 이 도시에서 부사령관 군터의 이름을 듣고 몸이 굳지 않을 이는 없을 테니까.
“그런…저는 춤 같은 건 추고 싶지 않은 걸요.”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답니다. 파티장에서의 춤은 인사와 같은 거예요.”
엘리는 내키지 않음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벨리사를 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틀었다.
“하지만 부인께서 정 원치 않으신다면 거절해도 문제없지요. 춤 신청을 하는 것이 사내들의 자유이듯, 거절하는 것은 여인들의 자유니까요. 몇몇 부인들은 하찮은 사내들의 신청을 거절하면서 자신들의 품위를 세우기도 한답니다.”
30대를 넘어선 엘리였지만 사교계에서는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여인네들의 전쟁터에서 온갖 군상들을 다 보아왔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칼침을 놓는 자, 겉으로는 현숙한 척하며 빛이 사그라지면 한 번에 여러 사내를 침실에 끌어들이는 음탕한 요부. 그녀가 듣고 본 것들을 다 말하려면 하루를 꼬박 지새워도 모자랄 정도다.
‘귀엽단 말이지.’
그에 반해 이 파릇파릇한 여인은 너무도 순진하다. 그녀의 출생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과거야 어쨌거나 일단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꼭 그런 티를 내고 싶어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벨리사는 예외에 속하는, 드문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참 드문 한 쌍이다. 남편은 아내만을 사랑하고, 아내도 그 이상으로 남편만을 바라본다. 실로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닌가. 물론 이런 보기 좋은 모습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내의 삶은 길지만, 여인의 삶은 짧답니다. 숙녀 아가씨.’
여인의 삶은 미모가 시드는 순간 끝이 난다. 아주 간혹, 젊음이 다 지나고서도 침실에서 사내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특별한 여인들이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다. 그렇기에 엘리는 이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아가씨에게 여인의 삶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머물며 덩달아 덕도 보고 말이다.
“제가 보기엔 지금 입으신 드레스가 가장 좋아 보이네요.”
“아, 그런가요? 그럼 이걸로 할까요?”
“좋으실 대로.”
한참 어린 동생을 보는 눈으로, 엘리는 싱긋 미소 지었다.
*
살라스는 부하의 보고를 받았다. 오늘 하루 위글로우에서 있었던 일들 중 중요한 것들 몇 가지가 쭉 흘러나왔다.
“아! 오늘 마님께서 올리네이스의 파티에 참석하신다고 하는군.”“예. 미리 준비시켜 놨습니다.”
“얼마나?”
“십인대 하나가 움직이기로 되어 있습니다.”
살라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무 적다. 두 배로 늘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마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평소에도 호위병들을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이라.”
탁!
살라스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리치듯 내려놓았다. 그의 굳은 시선을 마주한 백인장은 바짝 굳은 채 고개를 숙였다.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님께서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은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호위를 느슨히 할 수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마님께 티끌만큼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 할 텐가.”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주의하도록. 그리고 혹여 파티장에서 놈팡이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미트라스 부인께서 동행한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 또한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타박을 들은 백인장이 바짝 군기가 선 채 방을 나서고, 살라스는 보던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파티라.’
그로서는 굉장히 낯선, 허영심 많은 귀부인들의 문화를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린 살라스는 곧 다시 빽빽하게 적힌 서류에 몰두했다.
========== 작품 후기 ==========
혹시 컴퓨터에 대해 잘 아시는 독자분 계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제 컴퓨터가 어제부터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전원 버튼을 눌러 부팅을 하면 소리를 내면서 켜지다가, 갑자기 툭! 하고 꺼집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자기 혼자 켜지는데 검은 화면에 영어가 잔뜩 뜨고, 계속하려면 F1을 누르라고 나옵니다. 이때 F1을 누르면 정상 부팅이 됩니다.
근데 더 큰 문제는 컴퓨터를 조금 오래 켜고 있으면 컴퓨터가 갑자기 뚝 꺼진다는 겁니다. 다시 켜면 정상적으로 켜지기는 하는데, 예고도 없이 이러니 작업물이 훅 날아갈까 걱정이 되네요. 다행히 저는 중요한 작업물은 USB에 따로 보관하기는 합니다만... 도대체 컴퓨터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컴퓨터는 조립컴퓨터이며 산 지는 한 4-5년 된 것 같습니다. 혹시 컴퓨터에 잘 아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이게 왜 이러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