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74화 (174/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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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것 없다.

긴 글이었지만 요약하면 그 뜻이다. 군터는 다 본 서신을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사령관께서 뭔가 수가 있으신 것 같군요.”

“사령관이 아니라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이겠지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곤란해질 것은 사령관님도 사령관님이지만, 그보다는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이니까 말입니다.”

“음?”

위벨이 상석에 앉은 군터를 보았다. 예의 그 총기 어린 눈빛으로.

“신 군부의 수장이 눈에 담기에 위글로우의 사령관은 너무 작습니다. 어차피 그가 노리는 것은 협상이고, 그 대상은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입니다.”“협상이라. 무엇에 대한?”“근래에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이 골치를 앓고 있다 하더군요.”

“골치?”

“그가 바크렌에 오면서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이 이끌던 말레이드군의 지휘권을 양도 받았지만, 좀처럼 그가 끌고 온 황도의 군대와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끄는 부하들도 제대로 규합하지 못하는가.”

신 군부의 수장이니 뭐니 하기 전에 지휘관으로서,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서 실격이 아닌가.

“꼭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어째서?”

“군터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전에 말레이드 군을 이끌던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은 따르는 이들에게 신망이 대단했지요. 말레이드군은 실상 그의 사병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말단 병졸들부터 시작해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 아란딜 페레모어에 대해 보통의 상관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존경심을 보였다. 그의 말이라면 그야말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군터는 카리비온 하야신이 이끄는 말레이드군과 함께 수차례 전투를 치렀기에 그것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한 모양새였고, 깔끔한 과정이었습니다만…직접 전쟁을 겪은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은 안다. 반이나마 바크렌이 여전히 제국의 땅일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그게 누구의 덕인지. 특히 일선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은, 살마드에서 야만인의 대병과 맞서 싸웠던 병사들은 더욱.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의 면직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반 병사들 중에서도 그런데 말레이드군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마음에 응어리가 진, 독기가 바짝 오른 군대는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콧대 높은 병사들을 함께 지휘해야 하는 처지라면 더 그렇겠지요.”

“병사를 다뤄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말하는군.”

“병사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병사도 사람이다. 사람 마음이 무엇이 크게 다르겠는가.

본래부터 단결력이 좋았던 말레이드군이다. 그런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며 더욱 더 결집력이 강해졌을 터인데, 그런 상황에 군졸들의 신망이 두터운 아란딜 페레모어를 패전의 책임을 지워 면직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때깔 좋은 군대와 장군을 붙여 놓으면 어찌 반감이 생기지 않겠는가. 만약 그들에게 구심점이라도 없었다면 속으로야 불만이 가득해도 얌전히 따랐을 터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있었다.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을 주축으로 한 말레이드군은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에게도 부담일 것입니다.”

본래 천인장에 불과했던 카리비온 하야신은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장군직에 올랐다. 무위장이긴 하나 중앙관직이었다. 우습게도 그의 상관이었던 아란딜 페레모어는 패전의 책임을 졌건만, 그는 승전의 수혜를 한 몸에 받았다.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던 중앙조정의 행사에 득을 본 것이다.

“나는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을 안다. 그는 충직한 군인이야. 불만이 있다고 상관을 거스를 사람은 아니지.”

“물론 말레이드군이 그를 대놓고 거스르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담은 부담이지요.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이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을 제대로 보고, 그 성정을 파악했다면 더더욱 그와 말레이드군을 떼어놓으려 할 겁니다. 실제로 그러려고 하고 있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은 파이메인 강의 동쪽 유역에 요새를 짓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대로 된다면, 요새의 사령관은 카리비온 하야신 장군이 될 겁니다.”

“말레이드군과 함께?”

“좋지 않습니까. 요새가 들어설 자리는 더할 나위 없는 요충지입니다. 일단 한 번 요새가 세워지고 나면 그 중요성은 현존하는 그 어떤 요새나 도시에 비해도 밀리지 않겠지요.”

종전이 아니라 정전중인 제국이고 바크렌이다. 군사적 요충지는 본래의 목적 외에 다른 중요성도 갖는다. 바로 군비라는 명목 하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이며, 허용되는 온갖 종류의 이권들이다. 일선이라 할 수 있는 파이메인 강에 붙은 요새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요새 설립부터 관리자까지 모두 신 군부에서 차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 다른 세력들에서는 자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신 군부에게도 명분이 있는지라 완전히 이야기가 엎어지지는 않은 채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던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지지부진한 안에 대해 자기들 쪽에 힘을 실어달라는 얘기군.”

“그렇지요. 하지만 위글로우의 밀금에 대한 건 하나를 붙잡고 협력을 구하기에는 요새 설립 건이 너무 큽니다. 그러니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그쪽에서 무언가를 더 내밀겠지요.”

군터는 내심 감탄했다. 위벨이 막시밀리언의 꾀주머니가 될 정도로 머리가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분명히 같은 현상을 바라보고 있을 터인데 그저 드러난 것만을 보는 그와는 달리, 위벨은 그 내밀한 속사정까지 들춰보며 감춰진 의도를 파악한다. 그 통찰력은 군터로 하여금 약간의 자괴감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똑같이 생각하는 머리가 있는데 어찌 이렇게 다른가 하고 말이다.

“그럼, 이제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겠군.”

“예. 하지만 날파리에 대한 방비는 철저히 해야지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대답은 군터가 했으나 고개는 말석의 미겔이 숙였다.

그럴 만도 했다. 본래 요인에 대한 감시 업무는 미겔의 몫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날아든 날파리들이 바즈쇼어와 접촉하고,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가기까지 한 책임은 미겔에게 있다. 하지만 그 빠져나간 날파리들을 도로 잡아들이고 그 배후까지 캐낸 공 또한 있으니, 공으로 과를 덮은 셈이라 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미겔이 결연한 목소리로 다짐하듯 말했다.

“…관군의 책임도 없지 않소. 물론 말 안 해도 알고 있으실 테지만.”

“물론입니다.”

군터의 눈짓에 미트라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문병들을 닦달한다고 해서 작정하고 신분을 감춘 채 들어오는 이들을 걸러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긴장을 주는 일은 필요하다. 한가한 군병들이 정신 한 번 바짝 차리면 겉으로 보이는 군기가 바로 서고, 그렇게 되면 열 마리가 들어올 날파리들이 여덟 마리 정도로는 줄어들 테니까.

*

“여보.”

“응?”

“저…닷새 후에 열리는 파티에 가도 될까요? 히링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에요.”

“가. 그런 걸 왜 내게 묻지? 당신이 가고 싶으면 가고, 아니면 아닌 건데.”

군터는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벨리사를 보고 피식 웃었다. 굳이 이런 걸 자신에게 묻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음은 둘째 치고, 그녀의 표정이 너무 웃겼다.

“네? 다른 부인들은 다 남편의 허락을 받는다고 하던데요?”

“그래?”

군터는 몰랐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완전히 부부 사이가 갈라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형식적이건 뭐건 간에 사교계의 일에 대해서 부인은 남편에게 귀띔이라도 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왜냐하면 사교계의 행사라는 것은 단순히 여인들의 친목도모에서 머물지 않고 보다 정치적인 영역에까지 발을 디디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내게 따로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 다만 간다고 말은 해줬으면 좋겠군. 그래야 사람을 붙여줄 테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안 돼. 당신이 불편한 건 알겠지만 이건 양보 못해.”

군터가 엄한 얼굴이 되니 벨리사는 슬쩍 볼을 부풀리면서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군터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벨리사를 껴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그의 한 팔로도 거의 다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이야? 파티라니. 원래 그런 곳 별로 안 좋아했잖아?”

“지금도 좋은 건 아니에요. 근데 미트라스 부인이 하도 말씀을 하시니까…….”

“수다스러운 여자가 기어이 당신을 꼬시는 데 성공했군.”

“어쩔 수 없었어요. 끝내 안 간다고 하면 삐지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 자리는 낯설어서…….”

“처음부터 그런 자리가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바깥 행사를 극도로 지양하는 그가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군터는 벨리사가 조금 더 활동적이기를 바랐다. 그나마 공무로라도 바깥출입을 하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열흘에 한 번 꼴이다.

“옷이나 장신구 같은 것은 충분하게 있나? 잘은 모르지만, 그런 곳에 갈 때는 잔뜩 차려 입는다고 하던데.”

“안 그래도 옷은 미트라스 부인하고 같이 보러 가기로 했어요. 장신구는 당신이 사다준 것들이 많잖아요.”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내 부인의 첫 출전인데, 무장은 튼실하게 하고 가야지.”

“풋! 무장이 뭐에요? 내가 무슨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침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슬금슬금 손을 움직이며 불을 지피려던 군터는 부모의 웃음소리를 듣고 짧은 다리로 달려온 보리스로 인해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먼저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연재가 늦어졌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일이 갑자기 많아져서 글 쓸 시간이 부족했던 것.

둘째로는 해당 편에서 막시밀리언의 과거를 풀어놓으며 묘사를 함에 있어 몇 번이나 갈아 엎은 탓입니다. 아무래도 막시밀리언이 이제껏 나온 캐릭터들 중 군터를 제외하고는 거의 탑으로 꼽을 수 있는 중요 캐릭터이다보니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편에서 신중을 기하다가 글의 진도가 질질 끌리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2일 이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 모든 경우에 공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라뎌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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