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73화 (173/1,064)

<-- 2부 -->

“무슨 일인가?”

파비우스 리에론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서신을 읽고 있는 막시밀리언에게 향했다.

“쥐새끼들이 들락거린 모양입니다.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놈들이 말입니다.”

쥐새끼라는 말에 파비우스 리에론은 다시 나이프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썰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원래 보물 곁에는 온갖 것들이 꼬이기 마련이니.

“누가 부리는 쥐새끼들이지? 알아냈나?”

“아그니스 체스퍼…라고 하는군요.”

“…….”

얼마 움직이지도 않은 나이프가 다시 멈췄다. “하아.” 하는 한숨소리는 덤이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골치 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갔으면 했는데,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는군.”

“어리석은 분이 아니지요. 고귀한 혈통이며, 무려 흑포장군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지. 요새 설립 건이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전쟁은 전투로 하고, 큰 전쟁은 정치로 한다고. 결국 전쟁이라는 것이 이득을 위한 것이니, 큰 이득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큰물에서의 암중교전이다. 그리고 지금, 아그니스 체스퍼는 너희가 챙기는 부정한 금에 대한 것을 눈감아줄 터이니 너희 역시 내게 협조하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송구합니다. 제가 집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 했는데.”

“철저히 했으면 그쪽도 더 철저히 작업했겠지. 오히려 지금까지 잠잠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야.”

“허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뭘 어쩌겠나. 내줄 건 내줘야지.”

퉁명스러운 말투에 막시밀리언은 스테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 숙여 육즙이 흥건한 고기를 한 점 입에 가져갔다.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

바쁜 와중에도 막시밀리언은 시간을 내어 그의 본가에 들렀다. 결혼이라는 것이 당사자들 간의 일이면서, 또 양가의 행사인 만큼 그의 친가도 적잖이 바쁜 상태였다. 때문에 이야기가 이루어진 것은 한밤중이었다.

“바쁜 모양이군.”

“맞아. 하지만 너만 할까.”

막시밀리언보다 조금 작은 체구다. 눈매가 더 아래로 처진 것만 빼면 딱 몇 년 후 그의 외모가 저렇지 않을까 싶은 사내. 그가 바로 막시밀리언의 친형이자 가문의 후계자인 하이덴이다.

“피곤할 텐데 그냥 쉬지. 이 시간에 따로 할 이야기라니?”

요 며칠 동안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눈 밑이 거뭇하다. 그런 점마저도 막시밀리언과 비슷했다.

“별 건 아니고, 이번에 혼사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랑 어머니는 내가 모시려고.”

“뭐?”

“작은 도시지만 기반은 확실하니까. 시끄러운 살마드에서 지내시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뭐, 상단의 일이야 지금도 형이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도…….”

“왜?”

“아버지랑 어머니께는 먼저 말씀드린 거냐?”

“어머니께는 전부터 몇 번 언질을 드렸어. 아버지는 뭐…이제 말씀드리면 되고. 어차피, 아버지는 어디서 지내시든 상관 안 하실 테니까.”

하이덴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연로하신데다 근래에 몸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 살마드에 계속 계시는 편이 더 좋지 않겠냐.”

“흐음. 몰랐네. 언제부터 형이 그렇게 효자였지? 못 본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그냥 내 말대로 하자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하이덴은 더 이상 동생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한숨 한 번 내쉴 뿐.

“아내 될 사람은 만나 봤니?”

“아직. 유서 깊은 귀족 가의 아가씨라 그런지, 그런 쪽으로는 쓸데없이 철저해. 뭐, 어차피 식을 마치고 나면 질리게 볼 얼굴, 며칠 당겨서 못 본다고 아쉬울 건 없다만.”

“그래도 드디어 결혼인데, 설렘 같은 것은 없는 거냐?”“그런 걸 느끼기에는 너무 세파에 찌들어서. 꿈에서 만나려고 해도 얼굴을 알아야 만나든 말든 할 것 아니야.”

정략혼이라는 게 다 그렇다. 필요에 의해서 엮이는 사이이니 거기에서 무슨 연정이 생기고 애틋함이 피겠는가. 물론 살 붙이고 살다가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거야 정말 극소수다. 서로 조심하는 몇 년이 지나고, 자식들도 몇 낳고 하면 서로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갖는 경우도 흔하다. 귀족들의 사교계라는 것이 바로 그 창구 중 하나다.

‘정숙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카트리나 리에론에 대한 소문은 좋은 것들뿐이다. 아름답다, 조신하다, 착하다 등등. 안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오히려 그러지 않기가 더 힘들다. 유력 가문, 특히나 귀족가에 있어서 가문의 여식이란 적절한 때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손에 든 패나 가치 있는 상품과 같으니 평소에 잘 관리를 하는 탓이다. 안 좋은 소문이 생기려 하면 어떻게든 틀어막고 좋게 포장을 하니 어찌 나쁜 말이 돌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놀랍구나. 네가 한 도시의 사령관이 되고, 리에론의 여식까지 신부로 맞이하게 되다니.”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말이었을까. 막시밀리언은 형의 탄식과도 같은 말에 냉기 흐르던 표정을 지우고 씩 웃었다.

“나도 그래. 특히 요 며칠 사이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바쁘게 돌아다녔으니까. 실감이 안 날 때가 많아.”

“정말 대단한 일이지. 맨몸뚱이 하나 가지고 백인장으로 임관한 네가 어느새 리에론의 사위가 되다니 말이야.”

“같은 말을 왜 자꾸 반복하는 거야?”

“그만큼 대단한 일이니까.”

“대단하기는 형도 마찬가지지. 제이린의 가주가 됐잖아. 상단도 요즘 들어 성세가 더 커지고 있고.”

“네 덕분이지.”

채굴한 금의 반절 가량은 리에론에게로 흘러들어가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막시밀리언이 챙긴다. 위글로우의 두 가문과 나눠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적지 않은 물량이 그의 사재로 들어오는 것이다. 막시밀리언은 그렇게 챙긴 금을 친가를 통해 거래했다. 그 과정에서 제이린 가 역시 막대한 이득을 챙겼으니, 그에 힘입어 제이린 가문은 근래에 들어 말 그대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네 덕이지. 모든 게.”

가문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준 것이 막시밀리언임은 분명했지만, 읊조리는 하이덴의 목소리는 묘하게 깊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를 알아차렸다.

“그쯤 해둬.”

“…….”

“언제까지 그렇게 나약하게 굴 생각이지? 난 말이야. 형이 그렇게 위선적으로 굴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형이 앉아있는 그 자리가 그냥 돌아온 거라 생각해? 주어진 모든 걸 다 누리고 있으면서 혼자 깨끗하게 굴려는 건가? 응?”

“아니. 그런 건 아니다.”쾅!

“그게 아니면 뭐!”

두툼한 잔이 식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격양된 노성을 내지른 막시밀리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의 형을 노려보았다. 하이덴은 그런 동생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아. 새삼스러울 것도 없군. 늘 그랬으니까. 형은 항상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망칠 궁리부터 했어. 되도 않는 희망적인 망상만 머릿속에 가득 채워두곤,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지.”

“말이 심하구나.”

“심한 건 형의 머저리 같은 정신머리야!”

이제 막시밀리언은 기세까지 피워 올렸다. 아무리 무관 치고 솜씨가 없는 편이라 하나, 그래도 막시밀리언은 직접 일선에서 전쟁을 겪은 몸. 사선을 몇 번이나 건너온 군인의 기세는 돈이나 만지는 상인이 견뎌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이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막시밀리언은 조금도 봐주지 않고 그를 몰아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하이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직도 그때처럼 확신해? 그 뱀 같은 년이 어머니와 형을, 나를 이 집에 남겨뒀으리라고? 설마하니 그 년이 형에게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그냥 넘겨줬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다.”

“그래. 잊지 마. 결국에는 했어야 하는 일이야. 내가 한 일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내가 아니라 형이 해야 하는 일이었어. 형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나선 거고. 난 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손을 더럽힌 거야.”

하이덴의 앞까지 다가간 막시밀리언이 두 손을 뻗어 형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을 뜬 하이덴은 바로 앞에 다가온 동생과 시선을 마주쳤다. 사나운 숨결이 떨리는 그의 입술을 스쳐갔다.

“날 봐.”

“…….”

가만히 있어도 떨리는 눈은 불처럼 이글거리는 막시밀리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그가 도망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랬기에 하이덴은 괴로워하면서도 동생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도 가끔씩 악몽에 시달리곤 해. 그 꼬마 녀석이 말이야.”

막시밀리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또렷하던 눈빛도 이따금씩 바람을 맞은 촛불마냥 흔들렸다.

“사과를 하더라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건 그 녀석이 아니라 그놈 어미인데 말이야.”

막시밀리언의 감정선이 위태롭게 오락가락했다. 뱀 같은 여인을 떠올릴 때는 날이 바짝 선 칼날처럼 예리해졌다가, 순수했던 꼬마를 떠올릴 때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목소리에 물기가 찼다.

“그러고서는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르지 않은 그 조그만 손으로, 다 커버린 내 다리를 붙잡고서. 겁에 잔뜩 질려선 울부짖는단 말이야. 그럼 나도 미안하다고 울지. 그러면서 녀석을 뿌리치고 도망을 쳐. 녀석의 목소리가, 울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 달려서 도망을 친단 말이야.”

눈이 붉어졌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눈에도 물이 한 두 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이제 형제는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벌써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데, 여전히 가끔씩 그런 꿈을 꾼다고. 아무리 잊으려고 해봐도 잊히지가 않아.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은 항상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 하지만 형. 내가 후회할 것 같아? 아니. 아니야.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도 선택을 한 거야. 형은 비겁하게 도망쳤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고.”

막시밀리언은 감싸 쥐었던 하이덴의 얼굴을 내던지듯 하며 몸을 돌렸다. 눈의 물기를 닦아낸 그는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래도 난 형을 용서했어. 그뿐이야? 애초 원했던 길을 가는 것뿐이라지만, 어쨌거나 모든 걸 형에게 넘기기까지 했잖아? 그러니까 형에게 양심이란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보는 앞에서 그딴 감상적인 얼굴은 집어치워.”

막시밀리언은 그의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못 움직이시겠다면…좋아. 여기 남든 말든 맘대로 하시라 해.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모실 거야. 군인이 되겠답시고 집을 나가서 오랫동안 어머니 속을 썩였는데, 이제는 나도 자식 노릇 좀 해야지 않겠어?”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불금인데 모두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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