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간밤에 오셨다가 발길을 돌리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소이다.”
군터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바즈쇼어를 보며 내심 조소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마치 반쯤은 세상사에 달관한 것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그였다. 헌데 단 하루가 지금은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겉으로야 화가 난 척, 그게 전부인 척하지만 어제와는 달리 지금은 그런 감정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아챌 수 있다. 읽히지 않던 속내가 읽히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리라.
‘일처리는 제대로 했나 보군.’
미덥지 않은 도적놈이 그래도 솜씨는 괜찮았던가. 하긴, 본래 도적놈들이 하는 짓이 약탈과 협박질 같은 것들이니 이런 일에는 오히려 적합했는지 모른다.
“먼저, 제 수하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윗사람으로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커험! 그건 뭐…됐소이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얼굴은 그냥 두지 그러셨습니까.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자식도 있는 녀석인데.”
“…뭐요?”
“제 말소리가 작았습니까?”
아니면 귓구멍이 막히기라도 했나?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쳐다보니 바즈쇼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만 뻐끔거린다. 설마하니 따지러 온 자리에서 이렇게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하지만 군터는 그를 골리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가 방금 한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바즈쇼어를 돌려보낸 직후 그에게 보고하던 할렌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그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즈쇼어야 야밤에 난데없이 벼락을 맞아 감정에 북받쳐 손 한 번 휘둘렀다지만, 군터에게 그런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수하들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군터가 바즈쇼어에게 손을 대며 가졌던 일말의 꺼림칙함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게…그게 지금 내게 할 소리요?”
“못 할 말이 따로 있습니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감찰관께서 제 수하에게 손을 댈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제 수하가 뭐, 감찰관 댁을 털기라도 했습니까?”
“이…이……!”
바즈쇼어는 군터가 자택에서 나와 출근하기 전에 들이닥쳤다. 그가 늦잠이라도 잤다면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할 셈이었으리라. 하지만 군터는 그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 그는 간밤에 그의 집에 들이닥친 불한당들과 군터의 연관성을 확신하게 됐으리라.
“감히…감히!”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지요. 아! 차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어제 감찰관께서 대접해주신 것만큼 좋은 차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드시면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내게 이러고도…무사할 것 같은가?”
씹어뱉듯 하는 말에 주먹 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것 같았다. 군터는 이쯤에서 조롱을 그만둬야 함을 느꼈다.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뭐라?”
“지금 감찰관께서 제게 찾아와 할 일이 협박입니까?”
“이렇게 날 능멸하는 자에게 고운 말이 나갈 리 있겠는가.”
“능멸은 감찰관께서 먼저 하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자네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요. 제가 아니라, 사령관께 말입니다.”
분노가 역력하던 얼굴에 당혹이 스친다. 군터는 한순간, 찰나 간에 보인 한줄기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그는 외지인들을 집에 들인 그의 저의에 대해 심증만을 갖고 있던 차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는 바즈쇼어를 몰아붙였다. 대단한 연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저 무표정하게, 낮은 목소리로 추궁하는 것으로 족했다.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령관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소식이 들어왔음에도 어제까지 기다린 이유를 아십니까? 제가 굳이 뜬금없이 감찰관을 댁까지 찾아가 뵌 이유는 또 아십니까?”
“이보게. 그건 오해…….”
“사령관과 감찰관의 관계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음에도 두 분은 그간 좋은 사이셨습니다. 그건 서로에게 양보할 것은 양보하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겁니다. 저 또한 사령관께서 감찰관을 대하시는 것처럼, 믿음을 가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감찰관께서는 저를 실망시키셨지요.”
입을 놀리면서도 말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데, 당황하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진심인 것처럼 헛소리에 감정을 싣기 시작하는 것이다. 군터는 자신에게 거짓말쟁이의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되는 대로 뱉어대다가 말문이 막히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안 되는 상황에 더 말을 하다가는 정말 이상한 소리가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능력부족이 낳은 침묵은 바즈쇼어에게 나름의 압박이 된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터질 듯 붉어져 있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간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던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어찌 해야 하겠소.”
“간밤에는 못 찾았다더군요. 그놈들,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오. 바로 전날에 내 집을 떠났소.”
“제가 감찰관 댁에 들른 후에 말입니까?”
“……”
“저를 실망시키시는군요.”
“…미안하오. 내 할 말이 없소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참 우스운 말이다. 미안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어차피 피차간에 배신을 계획했을 뿐이고, 더 엄밀히 따지면 먼저 등을 돌리려 한 것은 막시밀리언 쪽이었다. 바즈쇼어는 자신이 뒤통수를 당하기 전에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했을 뿐. 다만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고,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런 그의 시도가 발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움직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할까.
“하루면 그리 늦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을 다 알려주십시오. 어차피 도망친 방향만 알면 길이야 정해져 있으니, 정오가 되기 전에 추격대를 보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설픈 실패자가 고개를 숙인다. 아마 그도 어렴풋이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그가 협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운명이 당장 닥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늦게 닥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번 시간 동안에 뭔가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겠고.
‘헛된 기대일 뿐이오.’
막시밀리언에게 있어 바즈쇼어는 그의 치부이며, 잠재적인 위험요소다. 물론 리에론의 사위가 되어 본격적으로 비호를 받기 시작하면 은퇴를 코앞에 둔 일개 감찰관의 증언이나 폭로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거슬리는 것은 거슬리는 것이다. 눈에 먼지 하나 낀다고 해서 죽거나, 실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지 않은가. 배제할 수 있다면 배제하는 것이 좋으니, 바즈쇼어는 막시밀리언에게 있어 딱 그런 정도의 의미다. 이제는 거기에 괘씸죄가 하나 더 붙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
바즈쇼어의 증언이 확보되자마자 편성된 추격대가 위글로우를 떠났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후에 돌아온 그들은 떠날 때는 없던 포로 셋과 함께였다.
“그놈들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일곱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무심한 대꾸에 미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독한 놈들이더군요. 거의 반 죽여 놔서야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가.”
미겔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돌덩이 같은 인간 같으니.’
도대체 이 인간 몸에 피가 흐르기는 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사람이라면 응당 다채로운 감정이라는 게 보여야 하는데, 이 인간과 말을 섞다 보면 사람이 아니라 벽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오싹함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그런 오싹함을 느끼는 것이 단순히 그런 과묵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보다 본질적인 무언가.
“뭐하는 놈들이지?”
“테일러 백인대 소속 병사들이라더군요.”
“테일러 백인대?”
“테일러 백인대는 파시니프 천인대 소속입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전혀.”
“파시니프는 아그니스 체스퍼 휘하의 아홉 천인장 중 하나입니다.”
“…….”
드디어 아는 이름이 나왔다. 군터는 낯빛을 굳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겔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감돌았다.
아그니스 체스퍼.
제국의 흑포장군이자 바크렌의 사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신 군부의 수장이다. 그의 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아란딜 페레모어와 같은 직급을 가진 자로서, 수 년 전 새로이 온 정규군과 기존에 있던 아란딜 페레모어의 구 말레이드군이 그의 명령을 따른다.
“어느 선에서 명령을 내린 거지?”
“일단은 지들 대장이라고 하는데…그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솔직한 심정으로 아그니스 체스퍼의 명령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미겔의 말처럼 하등 의미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아그니스 체스퍼와 얽히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아마 막시밀리언도 이 일을 알게 되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대로, 놈들은 바즈쇼어를 통해 밀광(密鑛)에 대한 것을 캐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도요. 사실 밀광 그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그쪽에 더 신경을 쓴 모양이더군요.”
“당연히 그럴 테지.”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 보잘 것 없는 도시의 사령관을 날려버리기 위해 따로 손을 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손을 쓴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리에론 가문을 향한 것일 터.
“그래도…그나마 다행이군.”
“뭐, 그렇지요.”
정말 진지하게 나설 생각이었다면 달랑 병사 몇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규모의 인원만 투입했다는 건, 애초에 그가 이곳의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 어쩌면 과잉충성을 보이는 천인장 하나가 주도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그니스 체스퍼는 수하의 계획에 허락만 내려준 것일지도.
‘이건 너무 행복한 생각인가?’
미겔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잡아들인 놈들은?”
“적당히 상하긴 했지만, 살아있습니다.”
적당하게 상했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숨이 붙어 있고 말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살마드에 계신 사령관께 다시 사람을 보낸다.”
이미 닷새 전에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상대가 밝혀진 이상, 이에 대한 사실은 막시밀리언도 필히 알아야 한다. 나아가 파비우스 리에론도.
========== 작품 후기 ==========
힘이 되는 말씀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전작에 관해서는, 예전에 몇 번 끄적인 것은 있지만 딱히 전작이라고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가쏘님 오타지적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