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71화 (171/1,064)

<-- 2부 -->

“공무로 바쁘실 분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시오?”

“이 또한 공무입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사령관과 더불어 도시를 다스리시는 분이 감찰관 아니십니까.”

“허허.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게 금칠을 해주시는군.”

군터는 물끄러미 반백의 머리칼을 한 초로(初老)를 보았다. 미리 온다고 사람을 보내 알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갑작스런 방문이었는데 그의 얼굴에 꺼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 관리를 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찔리는 구석이 없어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 이럴 때는 참 아쉽다. 물론 그런 재주가 있다한들 이 노인, 바즈쇼어의 마음을 읽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연륜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 띄워주는 말은 그쯤 했으면 됐소. 날 찾은 까닭이 무엇이오?”

“앞으로 한동안은 사령관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사차 들른 것입니다. 사령관께서 제게 살마드로 떠나시기 전에 감찰관을 잘 살펴드리라 당부하셨습니다.”

“고마운 말이군. 허나 난 괜찮소. 부사령관도 알다시피 내 항상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소이다. 모두 사령관의 덕분이지.”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기왕에 오셨으니 술이나…아니지.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군. 그럼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오. 내게 꽤 괜찮은 찻잎이 있다오.”

바즈쇼어는 직접 하인이 가져온 뜨거운 물로 차를 타 주었다. 요즘 들어 취미를 붙였다면서 말이다. 나이를 먹은 시간 많은 이들은 대개 이런 고풍스러운 취미에 맛을 들이는 모양이다.

“한 번 들어보시오. 향이 아주 좋다오.”

“무식해서 좋은 차를 마셔도 맛을 제대로 느낄 줄 모릅니다.”

“이런. 그럼 안 되지. 취미를 붙여 보시오. 뭐…그러고 보면 나도 예전에는 이런 쓰기만 한, 차갑지도 않은 맹물을 뭐 한다고 마시나 생각하기는 했지만.”

마실 것을 앞에 둔다는 것은 대화에 윤활유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명이 할 말이 없을 때는 말 대신에 마실 것을 들면 되고, 그러면 말을 들으며 생각하고 있던 상대가 화제를 이끌어간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면 서로 할 말이 없어 어색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군터는 친목이나 다지려고 바즈쇼어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하여 그는 온갖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의 말을 적절한 때에 끊고 나왔다.

“근래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음? 무슨 이야기 말이오?”

“추레한 부랑자들의 이야기, 성벽 밖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도적놈들의 이야기지요. 어떻게든 해먹을 게 없나 들개처럼 어슬렁거리는 놈들 말입니다.”

“흐음.”

“근자에 놈들 중 몇몇이 도시 내로 스며들었다고 하더군요. 바로 잡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성문을 지키던 어리숙한 병사들이 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들여보낸 듯합니다.”

“문제로군. 놈들의 행방은 아직 모르오?”

“예. 하지만 도시 안에 있겠지요. 놈들은 결코 무사히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빠른 시일 내에 놈들을 잡아들일 테지만, 혹여 모르는 일이니 감찰관께서는 가족 분들의 바깥출입에 신경을 써주십시오. 관찰관께서도 외출을 하실 때는 호위 병력을 대동하시고 말입니다. 뭣하면 말씀하십시오. 제 휘하에 믿을 만한 녀석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소. 하는 것도 없는 늙은 몸이 열심히 일 하시는 분께 부담까지 드려서야 되겠소?”

바즈쇼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군터는 태연한 그를 보며 아직 식지 않은 차를 들이켰다.

*

어둠이 짙게 내린 밤. 고지대에 위치한 바즈쇼어의 저택이 올려다 보이는 길목에 일단의 사내들이 집결했다. 하나같이 몸에 달라붙는 새카만 복장을 한 이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저택 안에 들어간 뒤로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장. 혹시 저택 안에 비밀통로라도 있어서 이미 빠져나간 거면 어떻게 합니까? 높으신 분들 집에는 항상 비밀통로 한, 두 개 정도는 기본으로 다 있지 않습니까.”

“상관없어. 쥐새끼 놈들을 잡으면 거야 최고지만, 못 잡는다 해도 좋아. 우리는 저 집 주인 늙은이에게 경고만 해주면 되거든.”

“경고요?”

“그래. 경고. 어차피 정체를 숨겨도 늙은이는 다 짐작할 거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 늙은이가 우리의 정체를 깨달으면, 우리가 왜 들이닥쳤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미겔은 씩 웃으며 목에 걸친 검은 천을 당겨 입과 코를 가렸다.

“하고픈 대로 해라. 몇 놈 정도는 죽여도 상관없어. 다만 늙은이의 가족들은 건드리지 마. 불도 지르지 말고. 오늘 밤 경비대는 귀를 닫을 거다.”

“이미 부사령관 양반하고 이야기는 다 됐다는 거요?”

“그래.”

“눈치 보지 않고 일 벌여도 된다는 건 참 좋구만. 그나저나 대장은 언제쯤 제대로 된 관직을 얻는 거요? 이건 뭐, 떳떳하게 관리라고 어디 가서 이야기도 못하니 원.”

미겔은 투덜거리는 부하를 보았다. 두건에 가리지 않은 그의 눈이 하늘의 달처럼 휘었다.

“좀만 더 참아라. 머지않았다. 사령관께서 리에론의 사위가 되시고 나면 이 도시는 그 분의 것이 되니까. 그때가 되면 우리도 떳떳하게 한 자리 할 수 있을 거다.”

비공식적인 그의 직함은 감찰대장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직위이며, 그가 이끌고 있는 감찰대도 당연히 겉으로 드러난 조직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감찰대장과 감찰대가 감찰관의 집을 터는구나.’

허나 지금까지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출신성분이 불분명한 그를 관직에 올리는 것은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나, 그가 모시고 있는 사령관이 위글로우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제대로 좀 살아보자고. 그러니까 방해는 곤란해.’

검을 빼든 미겔이 몇 걸음 떼지도 않고 단번에 높은 담을 뛰어넘었다.

*

“대장님. 벤락 거리 쪽에서 소란이.”

살라스는 수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땅에 꽂은 검 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무시해라.”

“옛.”

군터 천인대의 2인자이며, 위글로우 군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는 본래라면 이런 야간 경비대의 업무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일을 위해 군터의 명을 받아 이 자리에 있으니, 그 일은 방금 전 수하가 알린 소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병사들에게 일러, 혹시라도 사람들이 얼씬거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 감찰관 댁에서 사람이 오면 곧바로 내게 알리도록 해라.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감찰관 댁에 병사들을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

명을 받은 수하는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오늘 밤의 일에 대해 대충 언질을 들었으니 나름의 눈치를 발휘 했으리라.

‘달갑지 않군.’

명을 받는 수하는 고분고분한 반면에, 그에게 명을 내리는 살라스 본인은 내심 불만을 갖고 있으니 참 우스운 상황이다.

살라스는 상관인 군터에게 받은 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굳이 도적놈들의 손을 빌려 일을 벌여야 했는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감찰관의 집을 털고 그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입 무겁고 날랜 병사들 몇을 시켰어도 될 일이라 보는 것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디서 가서 떳떳하게 말도 못하는 감찰대라는 조직이 생긴 이후, 군터 천인대는 더 이상 사령관의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군터로서는 이번 일도 옆에서 살짝 거드는 정도에서 빠지고 싶었으리라. 사실 그게 최선이라는 것은 살라스도 알고 있었다. 단지 도적놈들과 연수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사실 이성적인 판단이 빠진, 그저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었을 뿐이다.

“끝난 것 같은데, 사람이 오지 않는군요.”

얼마 후. 감찰관 댁에서 소란이 잦아들고 한참이 지나서도 사람은 오지 않았다. 감찰대가 일을 마무리하고도 남음직한 시간이 흘렀는데 말이다.

“감찰관은 어리석지 않다. 경비대가 침묵한 이유를 아는 거겠지.”

그렇다면 경비대로 사람을 보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 테니,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하는 일 없이 직접 말을 해야 하는 상대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

바즈쇼어는 얇은 겉옷만 걸친 채 호위병 몇을 거느리고 집을 나섰다. 한밤중에 길을 나선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이라면 그를 따르는 호위병들은 걸음이 편치 않아 보였으며, 평소 점잖기로 알려져 있던 바즈쇼어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져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군터의 저택이었다. 그와 호위병들을 저택을 지키던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부사령관을 만나러 왔다. 비켜라.”

바즈쇼어는 걷는 동안 바람을 맞으며 흥분이 좀 가라앉은 상태였다. 덕분에 대뜸 고함을 지르는 대신 떨리지만 낮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바즈쇼어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답했다.

“감찰관 바즈쇼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와 말을 섞던 병사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상관과 함께 돌아왔다. 당일 저택의 경비를 서던 할렌이었다.

할렌은 바즈쇼어의 얼굴을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찰관님께서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부사령관을 만나러 왔다. 안내해주게.”

“밤이 늦었습니다. 대장님께선 이미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급한 일이네.”

“제게 말씀해주시지요. 듣고 판단하겠습…….”

“이놈!”

기어이 바즈쇼어가 폭발했다. 그는 그의 집을 나설 때처럼 시뻘겋게 얼굴이 변해 노성을 내질렀다.

“내 급한 일이라 하지 않느냐! 어디서 일개 백인장 따위가 사정을 판단하려 드느냐! 급한 일이 아닌데 내가 네 놈의 말처럼 이 밤중에 이곳까지 찾아왔겠느냐!”

“제 일은 이 저택을 지키는 것이지, 밤손님을 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흥분하신 것 같은데 좀 침착하시지요.”

“그래도 이놈이!”

짝!

할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바즈쇼어가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사나운 표정을 하고 걸음을 내딛자 할렌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퉷!”

피 섞인 침이 땅을 적셨다. 할렌은 서늘한 눈으로 바즈쇼어를 노려보았다. 약간의 살기까지 섞인 시선에 바즈쇼어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한 평생 펜대나 굴린 양반께서 손버릇이 별로 안 좋으시군요. 조심하십시오. 저 같은 무부들은 얼굴에 뭔가 날아오면 절로 손이 칼자루 쪽으로 가곤 합니다. 다행히 이번엔 참았습니다만, 다음번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이놈이……!”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찾아오던지 하십시오. 머리도 좀 식히셔서 말입니다.”

존댓말만 쓸 뿐이지, 잡아먹을 듯이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할렌에 바즈쇼어는 박박 이를 가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바즈쇼어는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모든 독자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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